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04.16.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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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04.16.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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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39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4월 16일
*제목: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본문: 로마서 2: 1-16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롬 2:1-16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은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아니하여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피조물을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해서 하나님도 저희를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악함으로 진리를 막는 우리의 불경건과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실제로 우리 삶이 곤고해 지고 고통스러워해졌습니다. 1장 후반부에 죄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는데 우리 인생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로마서 1장 3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의롭고 무엇이 불의한지를 알면서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뭐,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살아’ 등등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하며 삽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자기 욕망과 욕심의 충동에 따라 선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잣대를 대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신을 남들보다 더 경건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의 죄, 특히 그 대표격인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맡았기에 자기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유대인들만큼 수난을 많이 받은 민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많이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철저히 회개하여야겠습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깨달고,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온전히 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복음에 합당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1. 남을 판단하는 죄 (1-5절)

대부분 종교인들도 그렇습니다만 유대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비해 평가 기준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평가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자기들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에 이방인들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1장 후반절에 나열된 것처럼 그들의 삶은 수준 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 취급하며 멸시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아주 수준 높은 백성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도 자신들도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2장 21절과 22절을 보면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자기들도 도둑질을 하였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도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외식과 위선이 아주 가증스러웠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곱 차례 ‘화 있을 진저’하며 준엄하게 질책하였습니다(눅 11:37-54). 그들은 식사하기 전에 ‘왜 손을 씻지 않느냐, 밭을 지나며 밀을 꺾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은 안식일에 노동을 한 것이다, 다른 날에 고치지 왜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냐’ 등등 시시콜콜 법 조항을 따져가며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힘이 없는 과부들의 재산을 통을 집어 삼켰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채로 삼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루살이는 이빨에 낀다고 방방 뛰더니 정작 낙타는 아예 통채로 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자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에는 저 사람이 문제고, 저 사람이 문제의 원인인 것 같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둘째 아들이 잘못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해서 날려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 아주 비참한 형편에 떨어졌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만약 그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요? 집으로 돌아왔을까요? 아닐거예요. 더 방탕한 삶으로 치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탕자라는 사실에 쉽사리 공감할 수 있고, 받아드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들 눈에 잘 포착되지 않습니다. 우선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지 않고, 올바른 일들을 행해 왔습니다. 순종적이고, 책임감 있고, 합법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칭찬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흠이 없는 모범적인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딱 집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아버지에게 분노하여 말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30). 이 얼마나 날카롭고 무서운 말입니까? 동생이 살아 왔다고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 교만과 무례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깊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장면을 얼마든지 쉽게 목격할 수 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양심적인 사람들’과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 많은 불평과 원망이 숨어 있어요. 소위 ‘성도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비판과 저주와 편견이 있어요.

왜 그들에게서 더 냉혹한 분노가 폭발할까요? 겉으로는 모범적이고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 남을 정죄하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고, 그토록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아직도 내게 합당한 대접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날라리들에게는 관심과 친절을 베풀면서 성실한 나에게는 소홀히 대하는 것입니까. 불공평합니다” 우리에게도 내면에 이런 불평이 있습니까? 이게 바로 또 다른 탕자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 일단 밖으로 표출 되면 이건 실수로 어쩌다 그런 것이지 본심이 아니라고 자기합리화시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두 양치기에 관한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긴히 들려 줄 얘기가 있다면서 찾아왔습니다. 양 한 마리밖에 갖지 못한 가난한 양치기가 그 양을 자기 식구마냥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 양치기에게 친구가 찾아 왔는데 손님을 접대한답시고 자기가 치고 있는 많은 양들은 그대로 두고, 하나 밖에 없는 가난한 양치기의 양을 빼앗아 도살하고 말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노로 일그러진 다윗의 입에서 “저런 죽일 놈 봤나. 그런 놈은 절대 살려둬서는 안 돼!”하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놈이 누구냐? 당장 잡아 들여라!”라며 열 받은 다윗을 바라보면서 나단이 짧게 한 마디 내뱉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이 한 마디가 결정타였습니다. 나단의 비수 같은 말 한 마디가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다윗의 양심을 찌르자 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습니다. 자기가 분노하고, 비난했던 그 대상이 실상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야를 죽인 짓은 가난한 양치기의 양을 도살한 부자 양치기의 행동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말 죽일 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날부터 다윗의 얼굴은 검게 변했고, 식음을 전폐하며 밤마다 눈물로 자기 침상을 홍건하게 채웠습니다.

반면에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3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죄가 없어서 지금 가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오래 참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를 악용했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우리가 불쌍해서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데 이를 악용하여 방자하게 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진노의 화로를 뒤집어 엎습니다. 5절을 볼까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다만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을 뿐입니다. 진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쉽사리 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잡생각할 때마다 교통위반 티켓을 뗀다거나, 주일예배 빠질 때마다 집에 우환이 든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인자를 멸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무서운 진노의 채찍을 드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보십시오. 노아가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 심판을 경고하며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회개치 않자 결국 홍수 심판으로 다 쓸어 버리셨습니다. 무릇 코로 기식하는 모든 자들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한번 시작되면 그냥 싹 쓸어 버리십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엘리의 가정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두 아들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나태해져서 의자에 앉아 졸기 일쑤였습니다. 그 아들들은 제사 드릴 제물을 강탈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은 이들을 책망하여 회개 시키기는 커녕, “애들아, 그리 말라 요즘 여론이 심상치 않다.” 그런 정도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 앞에 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온 집안을 싹 쓸어 버리셨습니다. 법궤를 매고 블레셋과 싸우러 나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전쟁에 패하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며느리는 산고 끝에 아들을 낳고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외치며 죽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당장에 무슨 일이 안 일어난다고 위험한 도박을 하면 나중에 큰 코 다칩니다. 물의 온도가 100도에 도달하면 반드시 팔팔 끓습니다. 그전까지는 끓는지 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80도 90도를 지나서 100도가 되면 반드시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 끓는 물을 머리 위에서 쏟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가? 아니면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쌓고 있는가? 사람은 모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2. 차별 없는 심판 (6-11절)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유대인인가? 헬라인인가?’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제사장인가? 평민인가?’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무엇이 기준입니까? “그 행한대로” 하나님은 그 사람이 무엇을 행했는가 행한 것만 보시고 보응하십니다.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우리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참고 선을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참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단은 자꾸 우리로 하여금 지금 죄를 즐기라고 부추킵니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의 소욕대로 사단의 유혹을 쫓아 살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열매는 사망입니다. 로마서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나쁘다는 것을 압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의 달콤한 쾌락 때문에 참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험담하는 것이 재미 있습니다. 그것도 혼자하면 재미없으니까 당을 지어서 함께 몰려다닙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 속에는 무서운 칼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당을 지어 진리를 대적하는 역사 배후에는 반드시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악 간에 나타나는 결과가 꼭 마지막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하나님의 보응은 당장 우리의 영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그 영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들어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가인은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한 사울은 왕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반면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어떠했습니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행 6:15).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물과 채소만 먹는데도 얼굴이 윤택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출중한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단 1장). 선을 행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영이 반짝반짝 빛이 나게 됩니다.

이와같이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이생에서도 환난과 곤고가 임하게 됩니다. 반면에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임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바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고, 그 심령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에 순복해서 선을 행하면 그 영혼에 샘솟는 기쁨이 있고, 그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 행한 대로 판단하시며 보응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아무도 자기 의로써는 구원 받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의로써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믿음이라면 반드시 그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 받은 믿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 있다는 변화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눅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야고보도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살아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심판의 기준 (12-16절)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율법이 있는 자와 율법이 없는 자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실까요?

12절 읽겠습니다.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우리 인간의 죄 문제는 율법이 있고 없고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아도 죄를 지을려고 하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법을 알기 때문에 그 헛점을 이용해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13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말씀에 대해 많이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지식을 자랑하라고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라고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반박합니다. 15절을 볼까요?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양심이라는 율법의 칩을 더 넣어서 창조하셨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듯이 내 마음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

한 마디로 율법을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고, 율법을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 없이 망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 멸망 받게 될 죄인입니다. 독이 있는 줄 알고 독극물을 마신 사람이나, 모르고 마신 사람이나 독극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죽습니다. 그래서 알고 죄를 지은 유대인이나 모르고 죄를 지은 이방인이나 다 구원이 필요합니다.

결론:
우리가 남들보다 더 종교적이고, 착하고 성실하다는 근거로 자기합리화에 빠지거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차별없이 우리의 행함 그대로 보응하시기에 우리 모두 입을 다물 수밖애 없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소망이 없던 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부터 절대적으로 건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 영광의 부요함을 깨닫고 놀라십시오. 감격하시고 이를 귀중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이 간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 이런 식으로 여전히 죄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합리화하며 더러움 가운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못난 나를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경외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 분은 내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까지 하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를 영광의 그 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거룩한 모습으로 세우시기 까지 그 분의 열심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후퇴하지 말고, 이제 다시 일어나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합시다. 제자리 걸음하지 말고, 믿음의 진보를 나타냅시다. 또 한 주를 살면서 주님의 거룩한 형상이 회복되어 뚜렷이 나타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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