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11.16.2025)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11.16.2025)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87회 작성일 Nov 17 2025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1월 16일
본문: 고후 12:7-10
제목: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올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드리는 추수감사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수고의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모두는 올해 우리 삶 속에 함께 하신 주님의 손길을 되돌아보며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먼저, 올 한 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눈에 보이는 풍성함에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을 지켜주신 것, 일터를 주신 것, 자녀들이 잘 자라준 것,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부터 지켜주신 것 등등, 이 모든 풍성한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올해도 쉽지 않았습니다. 몸이 약해져서 병원에 빈번히 출입하는 분도 계시고, 자녀와 손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물질적으로 궁핍한 형편에 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흔히 ‘감사’하면, 우리는 먼저 풍성한 수확과 평안한 삶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어려운 중에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며, 그 반대의 자리, 고난과 약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가시’는 헬라어로 ‘스콜롭스’, 즉 ‘말뚝’이라는 의미입니다. 내 손가락 끝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온 몸의 신경이 그곳에 쏠리는데, ‘말뚝’이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의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평생 낫지 않는 만성적 건강 문제일 수 있고, 어떤 분에게는 오랫동안 기도해도 끊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불화나 중독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이유없이 겪는 부당한 시련이나 경제적 곤핍이 그 가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로 인해 하나님께 무릎 꿇게 되고, 오직 주님만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 또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이나 누추함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역설’을 경험한 바울 사도는 오히려 자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힘이 있습니다. 약점으로 부터 자유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아주 큰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깨달은 진리입니다. 그것은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이 ‘족한 은혜’야말로 오늘 우리 삶에서 발견하고 감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추수감사절의 선물입니다.

1. 가시밭 같은 인생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극적인 삶을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기를 보낼 때에는, 자기 민족 종교인 유대교에 아주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 1:14)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와 민족의 전통에 대한 특별한 열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새롭게 등장한 신흥 종파 예수교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어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어요. 이웃나라 수도 다멕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무리들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길 가는 중에 부활하셨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청년 사울(큰 자)이 바울(작은 자)로 변하게 된 유명한 회심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씌워졌던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광의 하나님 아들이시요 구세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자비하게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을 오히려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부르십니다. 주님께 직접 부름 받아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지만, 동시에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행 9:16)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알 수 있어요. 제1차, 2차, 3차 세계 선교여행을 통해서 단기간에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 일부에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개종자들을 얻었지만 동시에 대적자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다른 도시로 떠나도 거기까지 쫓아와서 방해합니다. 그곳 사람들을 충동질하면서 그를 핍박했어요. 사도 바울은 훗날 그 때 고통스러웠던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을 이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고 말하겠어요?
사도 바울이 당한 시련과 핍박의 내용에 대해서 고린도 후서 11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고 이런 환란 외에 그에게 또 다른 심적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세운 연약한 교회들을 위한 염려였다고 말합니다. 혹시 거짓 교사들의 꾐에 복음을 버리고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까하고 염려했습니다.

2. 이상한 은혜

이렇게 수고하고 고통 겪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혜를 부어주셔야만 했을까요? 우선 핍박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선교 헌금도 풍성하게 모을 수 있게 해 주시고, 복음을 전파하면 사람들이 모두 잘 믿게 되고, 손을 얹으면 병도 척척 낫고, 교회의 모든 문제들도 없어지고....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반대의 방향으로 그를 몰고 가셨어요. 그에게 큰 고통거리를 안겨주신 거예요. 그의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통하여 그를 치셨다고 말합니다(7절). 육체의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마 사도 바울에게 가시처럼 찌르는 지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하수인으로써 늘 그를 괴롭혔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고침을 위해서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병을 고쳐 주셔야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더욱 크게 돌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소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다 같이 읽겠습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니야, 지금 상태 그대로, 현재 모습 그 가운데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여기서 ‘은혜’는 단지 구원의 은혜만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의 은혜를 뜻합니다. 이 은혜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 4:11-13)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은혜’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 주님이 무얼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너는 내 은혜 가운데서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역경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 너는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하나님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마치 너의 지혜와 경험, 너의 헌신과 열정과 열심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야, 네게 필요한 것은 나의 은혜다. 나의 은혜 없이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하게 나를 더욱 의지하지 않니. 그게 네 사역의 비밀이야’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에 가시가 있기에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붙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의 성공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3. 은혜의 역설

사실 바울 사도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사람입니다. 출신 배경도 성골 중에 성골인 바리새파입니다. 학문에서 출중했어요.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십도 탁월했고, 일을 추진해 가는 능력에서도 뛰어났어요. 여기에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적 체험까지 더해집니다. 고린도후서 12장 서두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낙원에 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이쯤이면 그는 교만에 빠질 가능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실제적으로 그는 자신의 교만과 많이 싸웠던 것 같습니다.

교만은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잘하면 잘한다고 교만합니다. 못하면 못하면서도 교만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교만합니다. 돈이 많다고 교만합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교만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 잘하는 것 가지고도 교만할 수 있어요. 가령 나보다 기도생활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성경지식에 취약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기 쉽습니다. 제대로 못하다고 비판적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훨씬 더 겸손해 질 겁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오히려 격려하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교만이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만에 빠지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 사역에도 큰 파멸이 찾아옵니다. 교회가 시험에 빠집니다.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육체의 가시를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이런 깊으신 뜻이 들어있었어요. 육체의 가시 그 자체는 악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탄은 사도 바울에게 고통을 가중시켜 그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고, 그의 사역을 망가뜨릴 목적으로 가시를 주었어요. 그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이 악한 의도를 하나님은 역이용하십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고, 사역에서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4. 영광을 받으실 분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과 그의 사역을 무너뜨리는 위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 외부로부터 오는 무서운 사단의 공격이 있어요.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도우시면 너끈히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오는 도전이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결코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자신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부패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머리 깎인 삼손에게서 홀연히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우리는 땅에 곤두박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사역은 크게 성공적이었어요. 지중해를 중심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제 로마 가도를 따라서 서서히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 정치, 군사, 경제, 학문, 문화의 중심지인 로마 심장부를 향해 복음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놓여졌어요.

이렇게 사역이 눈부시게 성공할 때에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우리 힘으로 잘 해낼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주님께 대하여 사랑과 열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사역에 큰 축복이 임합니다.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매달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내 힘과 내 지혜, 그리고 내 경험에 의존합니다. 내 주장이 갈수록 강해집니다. 그리고 돈과 조직이 받쳐주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눈물의 기도가 말랐어요. 더 이상 깊은 헌신이 없어요.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직은 점점 경직화되고, 지도자는 자만과 독선에 빠집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 왕국이 아닌 인간의 왕국으로 전락합니다.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지극히 큰 계시를 받은 후 교만해지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크고 놀라운 계시를 받은 후 14년이 지난 후 고린도후서를 썼으니까 14년 동안 육체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산 셈입니다. 매일 ‘너는 나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것을 깨우쳐 주시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만큼 오히려 강해진다는 비결을 체험으로 깨달았습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것을 깨닫는데 사도 바울도 14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의 질병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럽고 장애가 되었겠어요? 사람들이 그의 질병을 보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런 심각한 질병을 가진 자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이 맞는가? 참, 이상하다. 위대한 사도가 왜 자기 질병 하나 못 고치고 저렇게 고통스러워 할까?’ 갖가지 추측과 의혹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로 인하여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성취한 일로 그를 영웅시하기 쉬웠어요. 마치 그가 똑똑해서 그런 위대한 일을 성취한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병도 못 고치는 그를 볼 때 사람들은 깨달았어요. ‘저 능력은 사도 바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저가 전파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나!’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무엇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의 완벽한 성공과 건강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족하게' 채워주신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족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을 아주 정확하게, 낭비 됨 없이, 그러나 부족함 없이 틀림없이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필요를 위해서 일상적인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갑작스러운 필요를 위해서 갑작스러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엄청난 필요를 위해서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그러나 낭비되지 않게 그 때 그 때마다 정확하게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비록 내 능력이 약하지만 그 은혜로 인해 오히려 온전해집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 가시 때문에 울었던 순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가시를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 부족함 때문에 염려했던 순간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굶주리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감사하십시오.

올해 우리의 가장 큰 추수는 밭에서 거둔 곡식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 영적인 성장, 겸손과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25년 연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은혜 안에 머물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족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 연약할 그 때에 강함을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