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03.26.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03.26.2023)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586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3월 26일
*제목: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본문: 로마서 1: 18-32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1:8-17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칠십 평생 이 소원을 위해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 소원을 달성하려고 사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얼마나 숙연해집니까! 얼마나 간절한 소원입니까? 이 소원을 위해서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기까지 혼신의 다해 싸웠고, 온갖 고초를 감내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소원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갈망하며 소원하는 한 가지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어떻게 하든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로마에 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고 노력했지만 이 로마서를 쓸 때까지 여러가지 이유로 로마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에 가려는 그의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로마에 가려는 열망이 강렬했을까요? 물론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 수도라서 인생의 기회를 삼으려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곳에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목회자의 야망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복음에 대해서 문외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이미 복음을 믿은 성도들을 통해서 로마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로마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행 2:10), 그들이 로마에 돌아와 교회를 세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은 사도 바울의 귀에 까지 들려왔습니다. (8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라’ 그들의 신앙적 열심과 열정은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그들이 이해하는 복음의 수준은 그리 깊거나 넓지 못했을 것입니다. 체계적으로 복음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로마서에 기록된 내용처럼 하나님의 복음의 부요함과 장엄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갈 위험성이 있었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서 외부로 부터 핍박에 대해 대단히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에게도 다시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로마서를 다시 공부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받고서 뜨거웠던 흥분과 감격은 이제 많이 식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습관화되었고, 형식적인 종교적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얼마나 매혹적이고 화려합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고, 타협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거룩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점점 지루하고, 귀찮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집니다. 어느덧 영생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복음에 대한 열정도 식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생기와 활력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도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해 줍니다.

1.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 첫째는 견고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세워 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열하고, 그리고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서 나열하는 성령의 ‘은사’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성령님의 주권적 권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나눠 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교회는 견고하게 서기는 커녕 분쟁과 분란을 비롯해서 많은 문제점이 돌출했던 교회였던 점을 감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단어를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줄 가르침과 권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한 경륜이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밝혀졌는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런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에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복음의 내용을 요약해서 로마서, 즉 로마에 보낸 편지에 담아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넷풀릭스의 다큐 “나는 신이다(In the Name of God)”를 보고 공분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교주들의 막무가내 행태에 분통이 터지고, 이런 자들이 이렇게 활개치도록 방치한 사회 조직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그리고 이미 듣고 보아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쉬쉬하며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지금도 피해자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며 합리화 시키는 동조자들의 더럽고 구역질나는 작태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런데 이 다큐를 보면서 복음이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 인생을 완전히 망가지게 만들고, 가정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줍니다. 이제 이단 교주들의 악함을 본 세상 사람들은 아예 종교자체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서슴치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방송으로 이단들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런데 이로 인해서 복음 전파 또한 크게 타격을 받고 위축될 것이라서 염려가 됩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이 복되고, 그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거짓 복음은 사람들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삶 자체가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눈물이 많은 사랑의 사도이었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주 강경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말합니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온갖 이단의 거짓 가르침들이 횡행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부터 오는 환란과 시련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복음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의 신앙은 견고하게 섰습니다. (살전 1:5-6)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비록 신앙이 어리고 약했지만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환란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진정성 있게 전파할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능력과 확신으로 크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었고, 그들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환란을 만났을 때 복음으로 인해 견고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 견고하게 하다는 헬라어로 ‘스테리조’인데 우리말로 ‘강하게 하다’ ‘확고부동하게 고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견고하게 하다’ 이 말을 영어로 ‘be strong’으로 번역이 되지만 또 ‘be established(설립하다)’로도 번역됩니다. 이것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담고 있는 단어로써 로마교회 한 성도 성도가 견고히 서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로마교회 공동체가 견고히 서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한 개인 그리스도인이 견고하게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견고하게 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으로 견고히 서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견고하게 서도록 잡아주고 있습니까? 또 우리 공동체 교회는 어떻습니까?

초대 교회는 단순하고 평범하고 학식이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을 지켜 줄 힘이나 군대도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박해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음에는 강력한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그들 중 다수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3세기 동안에 발생한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곳저곳으로 내몰렸으며 대규모의 학살을 당했습니다. 교회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갖가지 방법과 힘으로, 때로는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지난날 교회 역사의 기록을 읽어본다면 성도들이 원형극장에 던져져 짐승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 화형에 처해지고, 동굴과 바위 틈으로 쫓겨다닌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 철학과 동방 종교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잠입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질식시키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타락한 로마 카톨릭의 교황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근세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뿌리채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속주의, 물신주의, 쾌락주의가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이 노골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복음이 교회에 의해서 여전히 순수한 형태로 계승되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왜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까요? 복음으로 인해 견고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 또한 복음의 역사로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2.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안위함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12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 나오는 ‘안위함’을 영어 성경에는 ‘comforted’로 ‘위로하다’ ‘격려하다’으로 되어있는데 지금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가 필요하기에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피차”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이 격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앞절에서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내가 사도로서 너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준다’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다”라고 바로 잡아줍니다. 사도인 바울도 너희 믿음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믿음 있는 교회였습니다. 로마교회의 믿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멀리서 전해 듣고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대한 소문으로 사도 바울도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아,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 정말 역사하는구나, 이 일이 결코 헛되지 않는구나, 역시 복음이 변화를 일으키는구나’라는 생각에 그는 힘을 얻습니다. 사실 그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주님으로 인해 심한 고난을 받았는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고백을 할까요? 그런데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위로하셨을까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속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기 때문입니다.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결국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인해 우리가 확신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확신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위로를 받고, 이제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됩니다(고후 1:4).

우리 모두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복음의 안위자, 복음의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성도들 간에 서로 복음으로 격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열매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왜 그럴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한 삶 것입니다. 농부의 얼굴이 죽을 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수할 때 거둘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신령한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괜히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 신경질내고 짜증내지 마십시오. 열매 맺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복음이 열매를 맺게 합니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극상품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기름진 가나안땅에 흙을 파서 돌을 제하고 품질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파서 좋은 포도열매 맺기를 바라셨습니다(사 5:2). 그런데 그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예레미야 2: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타락을 다음과 같이 책망합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즉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들 포도나무, 병든 포도나무, 실패한 포도나무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인생을 창조하실 때도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거룩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포도나무들로 지으셔서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병든 나무, 쓸모 없는 나무, 타락한 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극상품의 열매들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가 없으시고, 이 세상 죄악된 것들로 오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로 좋은 열매들을 맺게 하실 수 있는 참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그러면 이미 죄로 오염되고 병들고 타락한 우리들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가지인 우리가 접붙인바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열매는 내가 열심히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갈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이 열매 맺는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은 나찌의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36년 나찌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 집시, 반체제인사들, 전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용소에는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도 있었습니다. 반체제인사들도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비좁은 독방의 창문에는 나무 가리개가 덮여 있어 수감자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감방 창문 바로 옆에는 고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동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똑같은 아픔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지금도 그 독방에는 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246;ller) 목사의 초상화도 걸려 있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찌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가 나찌 친위대의 감방에 유폐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독방에 걸린 그의 사진을 보면 귀에 익숙한 한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듯 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여러분, 이렇게 복음을 위해 산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찬송가의 가사에 은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도록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견고하게 서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위안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열매를 맺도록 할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이 다시금 성령의 불방망이가 되어서 우리 시대에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게 되기를 소원합니다.본문: 로마서 1:18-32

로마서가  쓰여졌던 주후 1세기 초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물론 오늘날처럼 대다수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무시했겠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할 때 듣던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지는 것을 봅니다. 한 패는 겸손히 복음을 받아드립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패는 분기가 탱천하여 복음을 거절할 뿐 아니라 바울을 죽이겠다고 달려듭니다. 그 핍박을 피해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피하면 거기까지 쫓아와 난동을 피웁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능력 있게 복음이 제대로 전파된다면 빛과 어둠이나뉘듯이 확실히 두 패로 나뉘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듣고서 분노하며 거절하든지, 아니면 겸손히 받아드리든지 어느 쪽이든 확실한 반응을 보이게 될 때 ‘아, 복음이 정상적으로 올바르게 정확히 전파되고 있구나’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복음은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내용 속에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그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죄인이고 구원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의 죄성을 고발합니다.

성경의 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그동안 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면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려 왔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하등에 이상히 여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 문제는 인간의 문제중 가장 불편하고 치명적인 정곡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사단 마귀가 죄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죄의 교리가 무너지면 기독교의 나머지 모든 교리들도 도미노 현상처럼 줄줄히 무너집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왜 구원이 필요합니까? 왜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습니까? 왜 우리가 십자가 은혜로 죄 용서함과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까? 이처럼 죄의 교리는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핵심적 사항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옳고 진리라면 그외 인간에 관한 모든 사상과 철학은 그 기초부터 완전히 허물어집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앙양과 존중, 인간 자존, 인간 자기충족, 인간 자아실현과 완성, 이 모든 것들이 허구요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벨탑처럼 쌓아왔던 철학과 종교, 그리고 이상과 꿈 등이 모래위에 지은 누각인 것을 판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피해 갈 수도 없고, 피해  가서도 안 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은 갈수록 죄의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수치심을 느낄 법한 상황인데도 지금 사람들은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을 만큼 뻔뻔스럽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

당연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진노의 하나님인가’고 의아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말씀해 주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또한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에서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은 영광으로 나타나는데 그 영광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사실로 나타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로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신발을 벗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과 뇌성과 번개, 그리고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도저히 그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이 지나도록 손으로 덮으셨다고 했습니다. 영광 가운데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었으나 얼굴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 하나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광을 잠시라도 보는 것을 허락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모세도 (출 3:6)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욥도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 스스로 회개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소에서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은 타는 불과 밝은 광채 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만을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를 땅바닥에 거꾸러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썩은 동아줄처럼 혼절하여 쓰러졌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지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 영광이 가리워 있었지만 그래도 그분을 대면한 사람들은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늘이 열리는 가운데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볼 때 주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거룩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은 죄와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눈은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얼굴을 우리에게서 감춰지게 합니다. 죄는 또한 우리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분노는 원칙도 없이 발작적으로 폭발하고 절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으로 보복하려는 시도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절제되고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대적하는 자라 할지라도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묵과하지 않습니다. 거룩과 죄는 함께 병존할 수 없어요.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이처럼 거룩과 죄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본성이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킵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마치 식중독에 걸린 사람이 음식찌꺼기를 토해 내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을 배척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레위기서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문란한 성도덕과 우상 숭배의 풍습이 너무도 역겨웠기 때문에 그 땅이 가나안족속을 토하여 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죄를 범하면 토해 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그 땅이 악을 거부하고 토한다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상 여호와께서 그렇게 악을 거부하신다는 말입니다.

같은 문맥으로 가나안 족속의 악행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고 선언합니다. (레 18: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들을 자기 입에서 ‘뱉어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때 사용된 ‘뱉어버린다’는 헬라어 단어는 ‘토하겠다(emeo)’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위선을 참으시거나 삭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입에 맞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구토를 일으킬 정도라는 것입니다. 죄와 악은 하나님께 너무나 불쾌해서 토해 내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가 나와 상관없이 들리는가?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서 내 죄와 악이 불꽃을 튀기며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격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이 별로 절실하게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죄의 용서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았다고 들어도 별로 감사와 감격이 없어요. 그런데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뜨겁게 감격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진정 복되고 기쁜 소식이 됩니다.

2. 죄의 뿌리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다같이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우리 인생의 모든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죄가 나옵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자연 만물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산과 바다와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오늘도 숨 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 목자와 목원식구들, 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분들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교만을 떱니다. 자기가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거드름을 피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면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9, 2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가 너무나 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시편 19:1-4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자연세계를 바라볼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그랜드캐년 국립공원에서 하룻밤 캠핑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어릴 적 시골 밤을 기억했습니다. 모닥불에 쑥을 덮어서 모기향을 피우고, 평상에 드러누웠을 때, 별빛으로 가득했던 검푸른 하늘이 생각난 것입니다. 곧 쏟아질 듯이 초롱초롱한 별빛으로 가득했던 그 밤에 우주와 우리 인생의 신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경외감에 흠뻑 빠진 경험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 인체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지만 과연 당연한 것입니까? 신체 구조와 작동을 생각해 보세요. 세포 하나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래서 시편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절인 150:6절에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왜요? 내가 숨을 쉬는 코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파와 심장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살아 있게 하시고 호흡이 멈추지 않게 하신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자세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우리도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반면에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심과 불평으로 가득차 있으면 내 마음에 비참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생이라는 창조 질서가 바로 잡혀 있을 때에 내 마음에 에덴의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런 영적 질서가 파괴되면 우리에게서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불행해집니다.

잠언 3장에 보면 (잠 3:6,8)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괜히 비싼 건강식품 먹고, 호의호식한다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고, 모든 일에 그분께 감사하며 사는 자가 가장 복된 자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맘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욕심대로 살면 정말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나님 대신 신이 되어서 내 자신을 주장하며 살면 과연 행복과 안녕을 확보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1b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면 그 마음이 허망해져서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니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인데 하나님을 부인하니 마음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됩니다. 22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자기는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미련합니다. 똑똑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얼마나 잘났습니까? 얼마나 지식이 많고, 자기 주장이 강합니까? 아주 똑똑해졌는데 헛똑똑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게 됩니다. 하나님대신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격과 삶이 더 고상해졌습니까? 차원 높은 사상과 철학으로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돈과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쾌락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성공과 출세, 안락함과 편안함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한마디로 창조 질서를 어기고 바꾸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 죄입니다. 25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과 조물주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 죄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네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터무니없이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잘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타락과 추락을 가져왔습니다. 불행의 시작이요, 죄와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25b절을 보십시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토록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에 진정한 낙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런데도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한마디로 더러워집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사라지면 정욕이 들어오게 됩니다. 정욕은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 내면을 거룩하게 합니다.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정욕은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추하게 만듭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꽉 잡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헛생각으로 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죄의 소욕과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면 영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온갖 더럽고 추한 잡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우리 내면이 쓰레기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성이 사라지고 육체가 되면 짐승보다 못하게 됩니다. 다같이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인간이 추해지면 어느 정도까지 더러워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동성애까지입니다. 로마시대에는 황제를 비롯해서 로마의 귀족들, 장교들 대부분이 동성연애자였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냥 정욕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즉 순리를 거스르기 까지 합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서 살면 행복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27b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반드시 죄 값을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고 불륜을 행하는 자들은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자신도 평생 괴로워합니다. 자기 스스로 죄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 네 맘대로 한번 해 봐라”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자꾸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허랑방탕하다가 거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돼지를 치는 자가 되어 굶주린 나머지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내가 주인이 되어 낙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 내면은 황폐해집니다. 사막같이 됩니다.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칠어집니다. 사악해집니다. 이기적이 됩니다. 파괴적이 됩니다.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에 모든 악이 나옵니다. 29-31절을 봅시다.“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대로, 순리대로 살아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역리대로 살면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해지고 비극적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계명이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자유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마치 기차가 넓은 들판을 마음껏 자유롭게 달리고 싶다고 선로를 이탈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물에서 뛰쳐나가 백사장에 드러누워 있다면 말린 생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8절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쓰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시고,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결론: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소망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그 위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직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동일한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인간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구지를 타고 다녔던 사람이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나 그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천따지를 읇조렸던 시대의 사람이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조금도 인간성은 변하지 않았고, 그 죄인됨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이전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전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친구를 구원하는 이 복음을 우리 모두 힘 있게 붙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