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복음의 능력 (10.19.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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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70회 작성일 Oct 20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0월 19일
본문: 로마서 15:8-13
제목: 경계를 허무는 복음의 능력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서론: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거울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름과 차이 때문에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고 대립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와 ‘저들’로 나누는 두꺼운 장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잠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세상에서 매일 거대한 갈등의 벽과 마주합니다.
먼저 경제적/사회적 갈등입니다. 과거에는 재산의 유무나 직업의 종류가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분열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부모님 세대와, 그 모습을 답답하게 보는 젊은 세대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이제는 인공 지능의 폭발적 성장으로 인해 같은 사회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살아가게 만들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이 벽은 더 두텁고 높게 세워질 것입니다.
또 정치적/이념적 갈등 및 세대/문화적 갈등입니다. 물론, 지지하는 정당이나 옳다고 믿는 가치의 다름, 또는 세대 간의 생각 차이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정치적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져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말로 다투는 수준을 넘어, 증오와 보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모든 차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판단하고 멀리하는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제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나만 옳다’고 외치는 교만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도 이런 분열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오랜 역사의 주역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새로 구원에 참여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한 문화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더 하나님께 가까운가’’누가 더 구원에 가까운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 충돌이었습니다.
• 유대인 지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함 받은 백성이며,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진 ‘원조이자 뿌리’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나중에 온 객(客)’, 심지어 ‘율법이 없는 이류 신자’처럼 보였습니다.
• 반면, 이방인 지체들은 율법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 준수라는 시대착오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며 무시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교회의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교회도 로마 교회의 갈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할례와 율법의 문제로 다투지 않지만, 세상의 갈등을 교회 안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여 새로운 경계를 만듭니다. 경제적 수준, 학력, 출신 지역, 심지어 신앙 방식의 차이나 문화적 배경의 다음까지 ‘사랑의 대상’이 아닌 ‘판단의 근거’가 되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결정하려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판단하고 멀리하는 벽을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을 통해 이 모든 갈등에 대한 문제의 해답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바로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분열시키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라는 두 기둥으로 이 경계를 허무셨는지, 이 경계를 허무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두 기둥-신실함과 자비 (8-9a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한 민족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분열시키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 두 그룹을 향했지만, 그 목적은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을 통해 이 복잡한 구원의 드라마를 변증합니다. 바울이 직면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실패하신 것인가?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실패로 인한 ‘급조된 대안’인가?”
바울의 답변은 “결코 아니다”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실패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계획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일시적인 거절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더 크고 놀라운 목적을 성취하는 역설적인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위에서,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이 모든 섭리를 지탱하는 두 가지 신학적 기둥, 곧 신실함과 자비를 선포합니다.
1) 신실함의 기둥: 유대인을 향한 약속의 성취 (8절)
8절,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자의 종’이 되셨습니다. ‘할례자’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특별한 언약(약속)을 맺었을 때 주셨던 표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분을 거부했을 때도 하나님은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실하심, 신실하심(Faithfulness)’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거부한 현실을 다루며,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졌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합니다. 답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남은 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이며, 그 약속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유대인으로서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정확하게 지키셨다는 불변의 진실성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 역사의 ‘뿌리(Root)’이며, 교회는 이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신실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 자비의 기둥: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확장 (9a절)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역은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언약 밖에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시어 하나님의 ‘자비(Mercy)’를 나타내셨습니다.
9절,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거절이라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아픔을 통해서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약속 밖에 있던 우리 이방인(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도 아무런 자격 없이, 오직 그분의 따뜻한 마음으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마치 ‘손님’이 아니라 ‘가족’으로 받아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함(유대인)’으로 언약의 뿌리를 견고하게 하시고, ‘자비(이방인)’로 구원의 가지를 세상 끝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이 두 기둥은 교회의 뿌리가 견고한 동시에, 모든 경계를 넘어 포용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2. 구약이 증언하는 이방인의 구원 (9b-12절)
바울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의 본질 (essence of God’s eternal plan)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구약 성경의 네 가지 인용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확증합니다.
1) 바울은 9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시 18:49, 삼하 22:50)라는 말씀을 시편에서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넘어서, 모든 민족(열방, Gentiles)으로 확장될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처음부터 계획하셨다는 증거입니다.
2) 그 다음은 10절에서는 이방인들이 단순히 구원 받는 것을 넘어 주의 백성(유대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예언합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신 32:43) 더 이상 인종과 문화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3) 11절에서는 다시 시편을 인용합니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시 117:1)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상이 제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합니다. 이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4) 마지막으로 12절에서 이사야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사 11:10) 다윗의 후손(이새의 뿌리)으로 오실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국경이나 민족의 경계 없이 온 우주를 다스릴 왕이 되십니다.
이 모든 구약의 예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통일이 단순한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임을 밝혀줍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계획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3. 신약에서 교회의 성취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통일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라는 사실을 에베소서 2장에서 선언합니다.
(엡 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헐으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중간에 막힌 담’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실제 경계벽이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도 들어와 기도할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 뜰을 지나 유대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 앞에는 약 1.5미터 높이의 돌담이 있었습니다. 이 돌담을 ‘소레그(Soreg)’라고 불렀는데, 이는 곧 죽음의 경계였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 돌담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섬뜩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실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벽을 넘어 안뜰로 들어오는 이방인은, 그 자신의 죽음이 뒤따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지어다.”
복음이 없던 세상에서는, 중간에 막힌 담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원수 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이 소레그가,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을 가르는 죄의 담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가장 신성한 곳에 있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예수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적인 장벽이 무너진 동시에, 그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던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라는 종교적, 인종적 장벽, 곧 소레그와 같은 모든 구별을 폐지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엡 2:15)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는 우리의 차별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망치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모든 담벼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허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람(One New Man)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의 긍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에베소서 1:10에서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의 새 사람(one new man)이 된 교회가 바로 땅에 있는 것(things on earth)의 통일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세대, 인종, 사회적 지위를 넘어 함께 찬양하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가진 다름은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포용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찬양의 재료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땅에서 경계를 허물어 통일을 이루는 것은, 온 우주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n)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완성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 예배에서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이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무리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모인 자들로 묘사됩니다(계 5:9). 이것은 모든 경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보여주며, 모든 인종과 문화가 동등한 자격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주적 통일의 최종적인 성취를 증언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대와 배경을 넘어 함께 찬양하는 이 순간이 바로 장차 맞이하게 될 그 천국을 지금 맛보는 증거입니다.
결론:
<그린 북 (Green Book, 2018)>은 1960년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남부 순회 공연을 위한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 됩니다. 두 사람은 함께 남부로 향하지만, 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에서 ‘흑인 예술가와 백인 운전사’라는 이색적인 조합으로 많은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돈 셜리 박사를 존경하지만, 식당이나 숙소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는 모순된 현실이 반복됩니다.
이 여정 속에서 토니는 점점 돈 셜리의 고독과 존엄을 이해하게 되고, 돈 셜리는 토니의 거친 인생 속 진솔함을 통해 사람의 따뜻함을 배우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고용인과 고용자’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게 되죠.
마지막 장면에서 토니의 가족 식탁에 돈 셜리가 초대받아 함께 앉는 장면은, 복음이 이루는 “하나의 식탁 공동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경계의 벽을 허물고, 함께 앉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위대한 화해와 통일의 비전은 오직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분열된 세상을 통합하고, 우리의 다름을 조화로 바꾸실 능력은 오직 그분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노력으로 쥐어짜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넘치게 주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힘이며, 모든 지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능동적인 영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의 익숙함을 내려놓고 다른 지체의 다름을 인정하며 사랑할 힘은, 오직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에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소망의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의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서 모든 경계를 허무는 화해와 통일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날짜: 2025년 10월 19일
본문: 로마서 15:8-13
제목: 경계를 허무는 복음의 능력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서론: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거울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름과 차이 때문에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고 대립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와 ‘저들’로 나누는 두꺼운 장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잠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세상에서 매일 거대한 갈등의 벽과 마주합니다.
먼저 경제적/사회적 갈등입니다. 과거에는 재산의 유무나 직업의 종류가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분열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부모님 세대와, 그 모습을 답답하게 보는 젊은 세대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이제는 인공 지능의 폭발적 성장으로 인해 같은 사회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살아가게 만들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이 벽은 더 두텁고 높게 세워질 것입니다.
또 정치적/이념적 갈등 및 세대/문화적 갈등입니다. 물론, 지지하는 정당이나 옳다고 믿는 가치의 다름, 또는 세대 간의 생각 차이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정치적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져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말로 다투는 수준을 넘어, 증오와 보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모든 차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판단하고 멀리하는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제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나만 옳다’고 외치는 교만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도 이런 분열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오랜 역사의 주역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새로 구원에 참여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한 문화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더 하나님께 가까운가’’누가 더 구원에 가까운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 충돌이었습니다.
• 유대인 지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함 받은 백성이며,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진 ‘원조이자 뿌리’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나중에 온 객(客)’, 심지어 ‘율법이 없는 이류 신자’처럼 보였습니다.
• 반면, 이방인 지체들은 율법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 준수라는 시대착오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며 무시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교회의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교회도 로마 교회의 갈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할례와 율법의 문제로 다투지 않지만, 세상의 갈등을 교회 안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여 새로운 경계를 만듭니다. 경제적 수준, 학력, 출신 지역, 심지어 신앙 방식의 차이나 문화적 배경의 다음까지 ‘사랑의 대상’이 아닌 ‘판단의 근거’가 되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결정하려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판단하고 멀리하는 벽을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을 통해 이 모든 갈등에 대한 문제의 해답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바로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분열시키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라는 두 기둥으로 이 경계를 허무셨는지, 이 경계를 허무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두 기둥-신실함과 자비 (8-9a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한 민족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분열시키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하나의 공동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 두 그룹을 향했지만, 그 목적은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을 통해 이 복잡한 구원의 드라마를 변증합니다. 바울이 직면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실패하신 것인가?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실패로 인한 ‘급조된 대안’인가?”
바울의 답변은 “결코 아니다”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실패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계획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일시적인 거절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더 크고 놀라운 목적을 성취하는 역설적인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위에서,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이 모든 섭리를 지탱하는 두 가지 신학적 기둥, 곧 신실함과 자비를 선포합니다.
1) 신실함의 기둥: 유대인을 향한 약속의 성취 (8절)
8절,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자의 종’이 되셨습니다. ‘할례자’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특별한 언약(약속)을 맺었을 때 주셨던 표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분을 거부했을 때도 하나님은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실하심, 신실하심(Faithfulness)’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거부한 현실을 다루며,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폐하여졌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합니다. 답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남은 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이며, 그 약속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유대인으로서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정확하게 지키셨다는 불변의 진실성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 역사의 ‘뿌리(Root)’이며, 교회는 이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신실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 자비의 기둥: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확장 (9a절)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역은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언약 밖에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시어 하나님의 ‘자비(Mercy)’를 나타내셨습니다.
9절,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거절이라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아픔을 통해서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약속 밖에 있던 우리 이방인(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도 아무런 자격 없이, 오직 그분의 따뜻한 마음으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마치 ‘손님’이 아니라 ‘가족’으로 받아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함(유대인)’으로 언약의 뿌리를 견고하게 하시고, ‘자비(이방인)’로 구원의 가지를 세상 끝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이 두 기둥은 교회의 뿌리가 견고한 동시에, 모든 경계를 넘어 포용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2. 구약이 증언하는 이방인의 구원 (9b-12절)
바울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의 본질 (essence of God’s eternal plan)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구약 성경의 네 가지 인용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확증합니다.
1) 바울은 9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시 18:49, 삼하 22:50)라는 말씀을 시편에서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넘어서, 모든 민족(열방, Gentiles)으로 확장될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처음부터 계획하셨다는 증거입니다.
2) 그 다음은 10절에서는 이방인들이 단순히 구원 받는 것을 넘어 주의 백성(유대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예언합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신 32:43) 더 이상 인종과 문화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3) 11절에서는 다시 시편을 인용합니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시 117:1)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상이 제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합니다. 이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4) 마지막으로 12절에서 이사야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사 11:10) 다윗의 후손(이새의 뿌리)으로 오실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국경이나 민족의 경계 없이 온 우주를 다스릴 왕이 되십니다.
이 모든 구약의 예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통일이 단순한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임을 밝혀줍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계획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3. 신약에서 교회의 성취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통일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라는 사실을 에베소서 2장에서 선언합니다.
(엡 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헐으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중간에 막힌 담’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실제 경계벽이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도 들어와 기도할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 뜰을 지나 유대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 앞에는 약 1.5미터 높이의 돌담이 있었습니다. 이 돌담을 ‘소레그(Soreg)’라고 불렀는데, 이는 곧 죽음의 경계였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 돌담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섬뜩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실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벽을 넘어 안뜰로 들어오는 이방인은, 그 자신의 죽음이 뒤따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지어다.”
복음이 없던 세상에서는, 중간에 막힌 담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원수 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이 소레그가,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을 가르는 죄의 담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가장 신성한 곳에 있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예수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적인 장벽이 무너진 동시에, 그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던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라는 종교적, 인종적 장벽, 곧 소레그와 같은 모든 구별을 폐지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엡 2:15)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는 우리의 차별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망치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모든 담벼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허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람(One New Man)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의 긍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에베소서 1:10에서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의 새 사람(one new man)이 된 교회가 바로 땅에 있는 것(things on earth)의 통일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세대, 인종, 사회적 지위를 넘어 함께 찬양하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가진 다름은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포용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찬양의 재료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땅에서 경계를 허물어 통일을 이루는 것은, 온 우주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n)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완성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5장의 천상 예배에서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이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무리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모인 자들로 묘사됩니다(계 5:9). 이것은 모든 경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보여주며, 모든 인종과 문화가 동등한 자격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주적 통일의 최종적인 성취를 증언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대와 배경을 넘어 함께 찬양하는 이 순간이 바로 장차 맞이하게 될 그 천국을 지금 맛보는 증거입니다.
결론:
<그린 북 (Green Book, 2018)>은 1960년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남부 순회 공연을 위한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 됩니다. 두 사람은 함께 남부로 향하지만, 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에서 ‘흑인 예술가와 백인 운전사’라는 이색적인 조합으로 많은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돈 셜리 박사를 존경하지만, 식당이나 숙소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는 모순된 현실이 반복됩니다.
이 여정 속에서 토니는 점점 돈 셜리의 고독과 존엄을 이해하게 되고, 돈 셜리는 토니의 거친 인생 속 진솔함을 통해 사람의 따뜻함을 배우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고용인과 고용자’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게 되죠.
마지막 장면에서 토니의 가족 식탁에 돈 셜리가 초대받아 함께 앉는 장면은, 복음이 이루는 “하나의 식탁 공동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경계의 벽을 허물고, 함께 앉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위대한 화해와 통일의 비전은 오직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분열된 세상을 통합하고, 우리의 다름을 조화로 바꾸실 능력은 오직 그분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노력으로 쥐어짜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넘치게 주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힘이며, 모든 지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능동적인 영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의 익숙함을 내려놓고 다른 지체의 다름을 인정하며 사랑할 힘은, 오직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에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소망의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의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서 모든 경계를 허무는 화해와 통일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관련링크
- https://youtu.be/X1MVihqszw8 84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