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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강함의 역설을 묻다 (10.12.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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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87회 작성일 Oct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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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0월 12일
본문: 로마서 15:1-7
제목: 강함의 역설을 묻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무거운 무게를 그대로 느끼며 이 아침에 교회로 나오신 분은 안계십니까?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 불황 가운데 직장과 비즈네스에서 느끼는 압박감과 무게, 병석에 누워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과 병고의 무거운 짐, 영적 침체라는 보이지 않으나 무력하고 답답한 짐... 일반적으로 세상은 우리가 이 모든 짐을 혼자 짊어져 이겨내야만 ‘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흔히 이 ‘강함’은 권력, 재력, 지식, 육체의 힘,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등으로 연결 됩니다. 믿음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확신과 자유를 타인에게 굴복시키지 않는 것을 강함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약함’ 앞에서 좌절합니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에서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라는 세 가지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으며, 약한 자는 도태된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인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를 ‘힘의 패러다임’, 힘의 관점에서 봅니다. 세상이 힘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며,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힘을 추구하고 축적합니다. 그들은 이 힘이 있을 때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힘의 숭배’는 단지 현대 사회의 현상만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십시오. 그 내용은 신들의 파워 게임, 힘의 경쟁으로 가득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푸스를 지배한 것도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라는 거대한 신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였습니다. 로마 역시 막강한 군사력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이처럼 고대부터 인간의 마음속에는 힘을 숭배하는 본능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네가 진정 메시아라면 모세처럼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던 메시아는 다윗과 솔로몬 왕처럼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메시아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교회마저도 돈의 힘, 정치적 영향력의 힘을 가지고 세상에 그 힘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했는지, 대통령 선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지며 힘으로 사회와 국가를 움직이려 합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는 교회가 정권과 결탁하여 힘을 이용했던 악한 일들을 되풀이해 왔습니다. 19-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기독교가 정치와 군사의 힘을 업고 쉽게 선교하려 했고, 그 결과 제3세계에서는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불신하게 되는 아픔을 낳았습니다. 힘으로 문제를 풀려는 힘의 논리에 말려든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갈등은 바로 이 ‘힘의 숭배’가 신앙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강한 자’들은 음식, 절기 같은 비본질적 요소(아디아포라)에 대한 지식과 자유(힘)를 가졌다는 이유로, ‘연약한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진정한 강함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함’에 대한 완전히 다른 역설입니다.

잠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강한 자’입니까, 아니면 ‘연약한 자’입니까? 어쩌면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연약한 자의 짐을 같이 짊어져야 할 강한 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늘 넘어지고 흔들리는 연약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힘의 논리에 갇힌 우리 모두에게,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묻습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진정한 강함은 ‘자기희생과 공동체의 연합’이라는 강함의 역설(Paradox of Strength)에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진정 강한 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진정한 강함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합니다

진정 믿음이 강한 자의 첫 번째 책무는 약자의 짐을 짊어지는 십자가적 책임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담당하다’는 헬라어 ‘바스타조(bastazo)’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참아준다’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짊어지다’, ‘운반하다’, ‘결과를 감당하다’라는 능동적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의 그 행위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는 강한 자가 자신의 권리 포기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곧 사랑의 법이며, 자신의 지식과 자유(강함)가 연약한 형제의 영적 유익과 덕을 세우는 데 방해된다면, 그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의 약점(미성숙, 실수, 의심)을 ‘바스타조’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이 시대의 ‘강한 자’는 타인의 어려움을 보고도 ‘나만 아니면 돼’라며 냉정한 선을 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스타조’는 ‘내가 대신 그 짐의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능동적인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간과 나의 물질, 나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려는 ‘울타리’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형제가 은혜의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는 ‘다리’를 놓는 행위가 ‘바스타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담당해야 할 ‘연약한 자의 약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는 로마 교회의 음식 문제처럼, 오늘날 우리 공동체 안의 ‘비본질적인 다름’과 관련된 갈등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바스타조’ 담당해야 할까요?

  • 술, 옷차림, 문화생활, 정치적 견해 등 개인의 취향과 방식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연약한 자’ 혹은 ‘세속적인 자’로 멸시하지 않고 존중심을 갖는 태도입니다.
  • 경제적 압박과 육아로 인해 예배 시간에 늦거나 모임에 빠지는 지체를 보고 ‘믿음이 약하다’고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신 자녀 양육으로 인해 지친 부부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교회 사역에서 서툰 실수를 하는 지체를 비판하는 대신 인내하고, 봉사의 방향이나 스타일이 달라서 생기는 의견 충돌을 ‘틀렸다’고 단정 짓지 않고 ‘다름’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대신 첨단 기기 앞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어르신께 천천히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이렇게 본질적이지 않는 이슈와 다름 때문에 형제를 정죄하거나, 멸시하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신앙적 자유와 지식(강함)’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려 주고, 그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참된 강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13)고 선언하며, 자신의 정당한 ‘자유’를 이웃의 ‘구원과 덕’을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이렇게 진정 강한 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권리를 포기하여 이웃의 선과 덕을 세우는 십자가의 책임을 수행합니다. 2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이렇듯 강한 자의 책임은 곧 연약한 지체들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보호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혹시 내가 연약함 가운데 있다고 해도 크게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의 사랑의 희생을 통해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힘든 상황 속에서 ‘내가 남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나의 약함이야말로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진정한 강함의 역설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진정한 강함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대속적 희생입니다

진정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케노시스(kenosis)를 따르는 대속적 희생에서 나옵니다.

“왜 이렇게까지 내가 희생하고, 양보해야 합니까?”하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은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3절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자기 비움(kenosis) 사역을 압축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강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강함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 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비워 자신의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권리를 ‘비워낸(케노시스)’ 대속적인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비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비워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 시간의 ‘여유’, 내 주장의 ‘권리’, 그리고 ‘내가 옳다’는 자존심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작은 것들을 기꺼이 비워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강함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4-6절에서 이 희생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원천을 제시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와 위로로 성경의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기희생은 결코 우리의 도덕적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나를 위해 가장 강한 것을 비워내신’ 그 케노시스 은혜가 우리를 오래 참게 하고, 지친 이웃을 격려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을 때 비로소, 우리를 비방하는 자를 용서하고(3절), 연약한 형제를 위로할 압도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3. 진정한 강함은 서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받아주는 것’을 실천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은 이 논리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가 서로를 받아주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도덕적 훌륭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죄인 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너그럽게, 완전히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했고, 우리의 약점과 죄악 때문에 도저히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드려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집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껴안아 주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처럼 선행하는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의 작은 자존심과 확신을 내려놓고, ‘나와 다름’ 때문에 불편하고 거슬리는 타인의 연약함과 차이까지도 기꺼이 받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서로 받으라(proslambanesthe;προσλαμβάνεσθε)”는 명령은 단순히 상대를 ‘용납하라’는 수준을 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인 된 상태에서 따뜻하게 받아 주신 것처럼, 형제를 진심으로 포용하고 교제 속으로 맞아 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지못해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기쁨의 순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른 서신에서도 강조했습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따라서‘서로 받아주라’는 명령은 신앙의 본질(복음)이 아닌 비본질적인 차이(예배 형식과 방식, 헌금 형태, 정치적 견해, 문화적 차이 등)로 인해 형제를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들을 환대하고 품어 안으라는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경험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음식 규례와 정결법으로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겼고, 베드로 또한 그 전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그의 시각을 바꾸셨습니다. 하늘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가 내려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환상 직후,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했고,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그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랍게도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사건은 음식이나 문화의 차이로 형제를 판단하던 율법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5장 7절에서 명한 것은 바로 이 진리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포용은 교회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성격이 극과 극인 결혼 10년 차 A씨 부부의 일화는 우리가 직면하는 작은 차이를 보여줍니다. 남편은 깔끔하고 질서를 중요시하지만, 아내는 조금 자유롭습니다. 남편이 욕실에서 치약 뚜껑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잔소리를 했을 때, 아내는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라고 맞섭니다. 별일 아닌 치약 뚜껑 문제는 결국 “너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와 “당신은 사소한 걸로 사람을 몰아붙인다”는 식의 큰 싸움으로 번집니다. 다음날, 욕실에는 닫힌 치약 뚜껑과 함께 “미안해요. 우리 마음의 뚜껑은 닫지 말아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팎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와 해석의 차이에서 옵니다. 진정 강한 자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셨으니, 나도 저 사람의 사소한 차이까지도 기꺼이 포용하겠다”고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이 ‘은혜를 근거로 한 상호 포용’이야말로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고, 로마서 15장 6절의 말씀처럼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다윈적 힘의 논리를 숭배합니다. 강함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이익을 취하고,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요합니다. 심지어 교회까지도 힘의 논리에 말려들어 세상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힘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설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창조주이시지만, 힘으로 세상 문제를 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해법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힘이 아닌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힘으로 세상을 이기려 했던 다윈의 길입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자신을 비워내신 십자가의 길입니까? 오늘, 당신의 ‘강함’이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가 아니라, 연약한 지체가 은혜의 강을 건너게 하는 ‘바스타조의 다리’가 되게 하십시오.

잠시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물어봅시다. 오늘, 나의 시간, 나의 주장, 나의 자존심 중 기꺼이 ‘비워내야 할 케노시스의 희생’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의 강함을 이용해 오늘 내가 다리를 놓아주어야 할 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강함의 역설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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