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책임 (10.05.2025) 주일예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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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0월 5일
본문: 로마서 14:13–23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책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러분, 우리 인간은 그냥 먹고사는 것이 전부인 존재가 아니잖아요? 물론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은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죠.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인 생존을 넘어선 순간, 아니, 그 생존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짐승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쌀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바로 존엄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이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남의 명령이나, 외부의 강압, 혹은 운명이라는 굴레에 맡기기 싫은 본능이 있어요.
마치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이, 우리 인간의 영혼은 구속받지 않는 상태, 즉 자유를 가장 본질적인 삶의 방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압제와 독재에 저항해 왔고, 작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유를 갈망해요. 누가 내 삶의 방향을 강요하거나, 내 의사와 관계없이 따라야 하는 규칙에 부딪힐 때, 우리는 깊은 불만과 좌절을 느끼죠. 왜냐고요? 나의 존재 가치와 존엄성이 훼손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결국, 인간이 자유를 갈망한다는 건 단순한 희망(wish)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의 본질적인 외침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서 삶을 주도하려는 강력한 의지인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우리에게 그 참된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의 올무로 우리를 얽어맵니다. 특히 미신과 무속 신앙은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죠.
하지만 미신만 우리 자유를 빼앗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묶어두는 대표적인 족쇄는 바로 돈(물질), 성공에 대한 강박, 그리고 타인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족쇄들 때문에 스스로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어요.
• 동양에서는 ‘손 없는 날’을 따지고, 사주팔자를 맞추지 않으면 불행할까 두려워하죠. 숫자 ‘4’를 두려워해서 엘리베이터 버튼마저 ‘F’로 바꿔 놓기까지 합니다. 서양에서는 깨진 거울이 7년간의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어 사소한 실수에도 공포를 느끼고, 숫자 ‘13’을 병적으로 두려워합니다.
• 돈과 성공의 강박은 우리를 끝없는 경쟁으로 내몹니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화려한 명품을 소유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낙인찍히는 물질 만능주의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 타인의 시선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듭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와 경쟁 사회 속에서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을 숨기고, 끊임없이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전하고 재앙을 피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혹시 내가 금기를 어긴 것은 아닐까?”, “이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라는 끝없는 불안이 자리 잡게 돼요. 처음에는 평안을 얻기 위해 의지했지만, 실제로는 불안과 공포를 더 키워 버리는 악순환이죠. 사람은 결국 귀신과 운명,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다니며 스스로도 모르게 감옥 속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단번에 깨뜨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먹고 마시는 것(음식)'이나 '날을 지키는 것'과 같은 외적인 규례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어요.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놀라운 해방, 즉 참된 자유를 주신 겁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귀신의 장난이나 운명의 장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분의 손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가장 빛나는 선물이 바로 이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셨어요. 이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죠!
그런데 지난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고귀한 '자유'는 종종 오해되어 위험한 두 극단으로 흐르곤 했습니다.
1. 방종 (Antinomianism)입니다. “나는 자유롭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자유를 이기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는 면허증으로 사용하는 태도예요.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이 무율법주의에 대해 바울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참된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을 의미합니다.
2. 율법주의 (Legalism)입니다. “방종은 안 된다! 성도라면 반드시 거룩히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외적 규칙을 지키는 데 집착해요. 신앙생활을 마치 체크리스트처럼 여기며, 규칙을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 없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무거운 멍에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불완전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직면했던 논쟁, 즉 먹는 문제와 날을 지키는 문제를 통해 이 두 극단을 동시에 해체합니다. 바울은 신학적으로는 “음식 자체는 깨끗하다”는 진리를 확고히 믿었어요. 개인의 자유는 보장된다는 뜻이죠.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라고 경고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합법성(해도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과 덕(해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단순히 권리의 대립으로 보지 않아요. 그는 오히려 “누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느냐”(롬 14:4)는 질문으로 시작하며, 우리의 자유가 나를 위한 권리를 넘어, 형제를 세우는 책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복음적 해답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은 우리에게 이 가장 큰 은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곧 가장 무거운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우리의 삶을 진정한 사랑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1. 자유의 책임: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랑 (13–16절)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13절)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왜 비판하면 안 될까요?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다른 형제자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딪히지 않게 하라”와 “거칠게 하지 말라”는 표현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형제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심각한 문제를 의미해요. 자유롭게 행하는 나의 행동이 다른 성도의 양심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자유이며 결국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의 예를 들어 봅시다. 믿음이 강해서 술을 마셔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성도가 있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그 성도 앞에서 술 중독으로 고생하다 겨우 믿음으로 끊은 초신자가 그 장면을 본다면 어떨까요? 그 초신자는 큰 유혹에 빠지고, 결국 “나도 다시 마셔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술을 마신 성도의 행동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죄가 아닐지라도, 초신자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근심’을 주게 됩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서 '근심'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믿음이 약해져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심각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형제 한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원하신, 곧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믿음을 세워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책임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닌,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제3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의 길이죠.
2. 자유의 원칙: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역사 (17–18절)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17절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핵심 가치를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행위나 규칙에 있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내적인 가치입니다.
• 의 (Righteousness):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 평강 (Peace):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 서로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 희락 (Joy): 세상의 쾌락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쁨과 만족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에는 "주일 성수", "새벽 기도"와 같은 외적인 규율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행위들 이면에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교우들과의 평화, 그리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절). 만약 우리의 자유가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형제의 믿음을 흔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3. 자유의 실천: 믿음으로 행하는 사랑 (19–23절)
이제 바울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19절).
아직 신앙생활이 서툴러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리는 분이라면 이렇게 질문해 보세요. “나의 이 행동이 우리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릴까? 우리 형제자매의 믿음을 세워줄까?” 만약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안과 의심을 준다면, 그것을 잠시 멈추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 앞’이라는 개인적 영역에서는 확신을 가지고 행할 수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자매를 위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이 자유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였잖아요.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는 사도로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자유)가 있었지만 (고전 9:18),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어린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이 권리를 사랑으로 포기했습니다. 참된 믿음의 용기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형제의 유익을 위해 그 권리를 내려놓는 희생적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롬 14:21)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복은 자유를 누리는 데 있지 않고,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니라”(23절). 즉,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이 서지 않고, 다른 형제를 넘어뜨릴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 자유로운 행동일지라도 사랑의 확신이 없기에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을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책임으로 완성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14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단순한 권리나 방종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사랑임을 배웠습니다.
• 자유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 책임입니다.
• 자유는 율법주의의 무거운 멍에와 무율법주의의 방종을 모두 거부하고, 은혜 안에서 사랑으로 순종하는 길입니다.
• 자유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세우며,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되, 그 자유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가 가진 역설이자 가장 감동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은혜, 즉 자유는 우리가 “내 마음대로 할 권리”를 주장할 때 빛을 잃고, 우리를 다시 이기적인 쇠사슬에 묶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자유를 형제를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섬기는 책임에 사용할 때, 비로소 이 자유는 가장 강력하고 의미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의 명분으로 삼지 말고, 사랑과 감사의 도구로 사용합시다! 그럴 때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 차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날짜: 2025년 10월 5일
본문: 로마서 14:13–23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책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러분, 우리 인간은 그냥 먹고사는 것이 전부인 존재가 아니잖아요? 물론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은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죠.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인 생존을 넘어선 순간, 아니, 그 생존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짐승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쌀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바로 존엄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이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남의 명령이나, 외부의 강압, 혹은 운명이라는 굴레에 맡기기 싫은 본능이 있어요.
마치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이, 우리 인간의 영혼은 구속받지 않는 상태, 즉 자유를 가장 본질적인 삶의 방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압제와 독재에 저항해 왔고, 작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유를 갈망해요. 누가 내 삶의 방향을 강요하거나, 내 의사와 관계없이 따라야 하는 규칙에 부딪힐 때, 우리는 깊은 불만과 좌절을 느끼죠. 왜냐고요? 나의 존재 가치와 존엄성이 훼손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결국, 인간이 자유를 갈망한다는 건 단순한 희망(wish)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의 본질적인 외침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서 삶을 주도하려는 강력한 의지인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우리에게 그 참된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의 올무로 우리를 얽어맵니다. 특히 미신과 무속 신앙은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죠.
하지만 미신만 우리 자유를 빼앗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묶어두는 대표적인 족쇄는 바로 돈(물질), 성공에 대한 강박, 그리고 타인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족쇄들 때문에 스스로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어요.
• 동양에서는 ‘손 없는 날’을 따지고, 사주팔자를 맞추지 않으면 불행할까 두려워하죠. 숫자 ‘4’를 두려워해서 엘리베이터 버튼마저 ‘F’로 바꿔 놓기까지 합니다. 서양에서는 깨진 거울이 7년간의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어 사소한 실수에도 공포를 느끼고, 숫자 ‘13’을 병적으로 두려워합니다.
• 돈과 성공의 강박은 우리를 끝없는 경쟁으로 내몹니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화려한 명품을 소유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낙인찍히는 물질 만능주의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 타인의 시선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듭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와 경쟁 사회 속에서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을 숨기고, 끊임없이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전하고 재앙을 피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혹시 내가 금기를 어긴 것은 아닐까?”, “이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라는 끝없는 불안이 자리 잡게 돼요. 처음에는 평안을 얻기 위해 의지했지만, 실제로는 불안과 공포를 더 키워 버리는 악순환이죠. 사람은 결국 귀신과 운명,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다니며 스스로도 모르게 감옥 속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단번에 깨뜨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먹고 마시는 것(음식)'이나 '날을 지키는 것'과 같은 외적인 규례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어요.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놀라운 해방, 즉 참된 자유를 주신 겁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귀신의 장난이나 운명의 장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분의 손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가장 빛나는 선물이 바로 이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셨어요. 이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죠!
그런데 지난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고귀한 '자유'는 종종 오해되어 위험한 두 극단으로 흐르곤 했습니다.
1. 방종 (Antinomianism)입니다. “나는 자유롭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자유를 이기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는 면허증으로 사용하는 태도예요.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이 무율법주의에 대해 바울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참된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을 의미합니다.
2. 율법주의 (Legalism)입니다. “방종은 안 된다! 성도라면 반드시 거룩히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외적 규칙을 지키는 데 집착해요. 신앙생활을 마치 체크리스트처럼 여기며, 규칙을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 없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무거운 멍에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불완전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직면했던 논쟁, 즉 먹는 문제와 날을 지키는 문제를 통해 이 두 극단을 동시에 해체합니다. 바울은 신학적으로는 “음식 자체는 깨끗하다”는 진리를 확고히 믿었어요. 개인의 자유는 보장된다는 뜻이죠.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라고 경고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합법성(해도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과 덕(해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단순히 권리의 대립으로 보지 않아요. 그는 오히려 “누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느냐”(롬 14:4)는 질문으로 시작하며, 우리의 자유가 나를 위한 권리를 넘어, 형제를 세우는 책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복음적 해답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은 우리에게 이 가장 큰 은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곧 가장 무거운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우리의 삶을 진정한 사랑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1. 자유의 책임: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랑 (13–16절)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13절)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왜 비판하면 안 될까요?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다른 형제자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딪히지 않게 하라”와 “거칠게 하지 말라”는 표현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형제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심각한 문제를 의미해요. 자유롭게 행하는 나의 행동이 다른 성도의 양심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자유이며 결국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의 예를 들어 봅시다. 믿음이 강해서 술을 마셔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성도가 있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그 성도 앞에서 술 중독으로 고생하다 겨우 믿음으로 끊은 초신자가 그 장면을 본다면 어떨까요? 그 초신자는 큰 유혹에 빠지고, 결국 “나도 다시 마셔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술을 마신 성도의 행동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죄가 아닐지라도, 초신자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근심’을 주게 됩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서 '근심'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믿음이 약해져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심각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형제 한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원하신, 곧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믿음을 세워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책임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닌,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제3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의 길이죠.
2. 자유의 원칙: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역사 (17–18절)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17절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핵심 가치를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행위나 규칙에 있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내적인 가치입니다.
• 의 (Righteousness):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 평강 (Peace):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 서로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 희락 (Joy): 세상의 쾌락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쁨과 만족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에는 "주일 성수", "새벽 기도"와 같은 외적인 규율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행위들 이면에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교우들과의 평화, 그리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절). 만약 우리의 자유가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형제의 믿음을 흔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3. 자유의 실천: 믿음으로 행하는 사랑 (19–23절)
이제 바울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19절).
아직 신앙생활이 서툴러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리는 분이라면 이렇게 질문해 보세요. “나의 이 행동이 우리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릴까? 우리 형제자매의 믿음을 세워줄까?” 만약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안과 의심을 준다면, 그것을 잠시 멈추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 앞’이라는 개인적 영역에서는 확신을 가지고 행할 수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자매를 위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이 자유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였잖아요.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는 사도로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자유)가 있었지만 (고전 9:18),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어린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이 권리를 사랑으로 포기했습니다. 참된 믿음의 용기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형제의 유익을 위해 그 권리를 내려놓는 희생적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롬 14:21)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복은 자유를 누리는 데 있지 않고,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니라”(23절). 즉,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이 서지 않고, 다른 형제를 넘어뜨릴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 자유로운 행동일지라도 사랑의 확신이 없기에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을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책임으로 완성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14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단순한 권리나 방종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사랑임을 배웠습니다.
• 자유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 책임입니다.
• 자유는 율법주의의 무거운 멍에와 무율법주의의 방종을 모두 거부하고, 은혜 안에서 사랑으로 순종하는 길입니다.
• 자유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세우며,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되, 그 자유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가 가진 역설이자 가장 감동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은혜, 즉 자유는 우리가 “내 마음대로 할 권리”를 주장할 때 빛을 잃고, 우리를 다시 이기적인 쇠사슬에 묶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자유를 형제를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섬기는 책임에 사용할 때, 비로소 이 자유는 가장 강력하고 의미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의 명분으로 삼지 말고, 사랑과 감사의 도구로 사용합시다! 그럴 때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 차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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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Y7Ld4JBgv-s 111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