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09.28.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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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37회 작성일 Sep 29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9월 28일
본문: 로마서 14:1-12
제목: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요?
수많은 임종 직전 환자들을 돌본 호스피스 간호사 브로니 웨어(Bronnie Ware)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백하는 다섯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습니다(이 내용은 그녀의 저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으면.
이것이 가장 흔한 후회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느라,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나 소망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면.
특히 남성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오는 후회였습니다. 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이나 배우자와의 따뜻한 시간 등 가족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했습니다.
3.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으면.
많은 사람이 타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평범한 삶에 안주했으며, 때로는 억눌린 분노나 원망이 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후회였습니다.
4.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으면.
임종 직전에 이르러서야 오래된 친구들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지만, 이미 연락처를 잃거나 다시 연락하기에 너무 늦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황금 같은 우정을 소홀히 한 것을 깊이 후회했습니다.
5. 나 자신을 더 행복하게 두었으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행복이 선택이라는 것을 임종 직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익숙함이라는 ‘안락함’속에 갇혀 살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척했지만, 진정으로 웃고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보십시오. 그 누구도 “조금만 더 돈을 벌 걸”, “더 높은 자리, 더 높은 직위에 오를 걸”이라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끝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평생을 바쳐 쫓았던 외적인 성공과 세상의 기준이 결국 자신의 영혼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위해 살도록 배웠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남들에게 ‘성공한 인생’으로 보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분주함의 결과는 공허함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알 수 없어 허무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갇혀 정작 가장 소중한 것, 즉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 가장 위대한 믿음의 선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여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한 문장은 우리의 삶의 본질(essence)과 비본질(non-essence)을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 본질을 잃어버린 삶은 마치 길을 잃은 채 열심히 노를 젓는 항해사와 같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도착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하고 표류하게 됩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 본질을 붙잡은 삶은 다릅니다. 삶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선택과 행동의 이유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외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지만, 삶의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이들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영혼은 만족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은 이 위대한 정체성, 즉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교회 공동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우상 제물이나 절기 문제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싸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음식이나 절기가 중요하지 않다! 너희가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너희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형식, 생활 습관, 세대 차이, 정치적 견해와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교회가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진 않습니까?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각각 개개인은 세상의 헛된 기준과 후회를 낳는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영원한 만족을 주는 삶의 주인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멈추고, ‘주님을 위함’이라는 본질 속에서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사랑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후회 없는 기쁨으로 채워줄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
다.
1.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1-5절)
오늘 본문에서 그 당시 로마 교회 안의 갈등 상황을 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고기를 꺼려서 채소만 먹는 이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믿음 안에서 음식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며 모든 것을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1, 3절)
이 말씀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 형제를 받아주셨음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찬송과 기도 방식을, 다른 이들은 현대적인 찬양과 영상 매체를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이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특별히 지키지만, 또 어떤 이는 매일이 주님의 날이라며 절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인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 사함과 영생의 약속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담는 형식, 즉 비본질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 찬양의 종류, 사용하는 언어 등은 모두 복음의 씨앗이 잘 뿌리내리도록 돕는 그릇과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이 그릇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본질을 훼손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율법주의와 근본주의는 바로 이 비본질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본질을 흐리게 한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율법주의는 처음부터 나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순수하고 경건한 동기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했던 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의 본질인 ‘사랑’과 ‘긍휼’은 사라지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와 같은 규율 그 자체가 신앙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정작 복음의 본질은 외면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들은 기적의 기쁨보다 율법을 어긴 것에 분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근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초,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확산되면서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는 위기 상황이 닥쳤습니다. 이에 맞서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등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수호하려는 숭고한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복음의 본질보다 자신들의 신학적 해석과 형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과 다른 해석을 가진 형제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는 배타적인 태도로 흘러갔습니다. 본질인 ‘사랑’과 ‘관용’은 뒷전이 되고, 교회는 서로를 정죄하며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와 근본주의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선한 동기가 항상 올바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질을 지키려다 비본질에 매몰될 수 있고, 순수한 열정이 배타적인 정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형제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신앙생활을 할까?”하고 비난하며,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품으시고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도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는 대신, 본질인 사랑과 용납으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2.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6-9절)
앞서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더 깊은 질문을 던지며 우리 신앙의 본질을 일깨웁니다. 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행위, 즉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되묻습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입니다. 나의 삶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요셉은 자신을 향한 유혹이 단지 사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사는 거룩한 고백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총리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의 삶은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고 살아갈 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공’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쫓겨 살아갑니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부와 명예, 건강과 장수, 세상 즐거움과 쾌락, 편안과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지만, 정말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연로하신 성도님의 고백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이 심히 쇠약해져서 언제 쓰러질지 몰라 교회에 나올 수 없게 됨을 늘 늘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예전에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봉사했던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고 하시면서, 꿈을 꾸어도 함께 예배 드리는 모습을 꿈을 꾼다고 하십니다. 비록 지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회중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예배 드리는 심정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분처럼 인생의 최후 순간에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나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것으로 온전히 소유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존귀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우리의 구원, 지혜, 거룩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의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10-12절)
앞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며 영적인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0, 12절)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헬라어로 베마 (Βῆμ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베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법정에서 재판관이 앉는 높은 단상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심판대가 아니라,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가 상을 받는 시상대와 더 가까운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 단어를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는’ 심판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심판은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았는지,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고 상급을 정하는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감히 형제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을 살아가는 청지기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14-30)는 이 심판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충성된 종들은 그 달란트를 사용하여 이윤을 남겼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종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가진 재능, 시간, 물질,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달란트가 얼마나 큰지, 혹은 그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책임은 오직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마치 게으른 종이 다른 종이 어떻게 달란트를 썼는지 비난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에 취해 형제를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너무나 쉽게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양심적으로 살고 있어’, ‘저 사람은 지혜와 분별력이 없는 것 같아’와 같은 말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고통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단면만 볼 뿐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때, 정작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인 봉사와 섬김, 사랑과 나눔의 기회는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그 형제 역시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 각자도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직접 보고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 타인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데 집중합시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이 아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설교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후회 없는 고백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 엄중한 도전 앞에서 해답은 오직 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른 소속을 강요합니다. 성공의 소유가 되라, 돈의 소유가 되라, 사람의 인정을 받으라, 때로는 두려움과 죄책감의 종이 되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이 우리의 마지막 숨이 되는 날에도 남기를 소망합니다. 병상에 누워 힘없이 눈을 감을 때, 남은 재산도, 명예도, 관계도 우리를 붙잡아주지 못합니다. 그 순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이 고백뿐입니다..
“살아도 주의 것, 죽어도 주의 것.”
이 고백이 우리의 노래가 되고, 우리의 위로가 되고, 우리의 영원한 승리가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9월 28일
본문: 로마서 14:1-12
제목: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요?
수많은 임종 직전 환자들을 돌본 호스피스 간호사 브로니 웨어(Bronnie Ware)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백하는 다섯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습니다(이 내용은 그녀의 저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으면.
이것이 가장 흔한 후회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느라,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나 소망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면.
특히 남성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오는 후회였습니다. 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이나 배우자와의 따뜻한 시간 등 가족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했습니다.
3.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으면.
많은 사람이 타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평범한 삶에 안주했으며, 때로는 억눌린 분노나 원망이 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후회였습니다.
4.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으면.
임종 직전에 이르러서야 오래된 친구들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지만, 이미 연락처를 잃거나 다시 연락하기에 너무 늦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황금 같은 우정을 소홀히 한 것을 깊이 후회했습니다.
5. 나 자신을 더 행복하게 두었으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행복이 선택이라는 것을 임종 직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익숙함이라는 ‘안락함’속에 갇혀 살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척했지만, 진정으로 웃고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보십시오. 그 누구도 “조금만 더 돈을 벌 걸”, “더 높은 자리, 더 높은 직위에 오를 걸”이라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끝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평생을 바쳐 쫓았던 외적인 성공과 세상의 기준이 결국 자신의 영혼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위해 살도록 배웠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남들에게 ‘성공한 인생’으로 보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분주함의 결과는 공허함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알 수 없어 허무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갇혀 정작 가장 소중한 것, 즉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 가장 위대한 믿음의 선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여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한 문장은 우리의 삶의 본질(essence)과 비본질(non-essence)을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 본질을 잃어버린 삶은 마치 길을 잃은 채 열심히 노를 젓는 항해사와 같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도착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하고 표류하게 됩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 본질을 붙잡은 삶은 다릅니다. 삶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선택과 행동의 이유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외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지만, 삶의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이들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영혼은 만족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은 이 위대한 정체성, 즉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교회 공동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우상 제물이나 절기 문제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싸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음식이나 절기가 중요하지 않다! 너희가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너희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형식, 생활 습관, 세대 차이, 정치적 견해와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교회가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진 않습니까?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각각 개개인은 세상의 헛된 기준과 후회를 낳는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영원한 만족을 주는 삶의 주인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멈추고, ‘주님을 위함’이라는 본질 속에서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사랑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후회 없는 기쁨으로 채워줄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
다.
1.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1-5절)
오늘 본문에서 그 당시 로마 교회 안의 갈등 상황을 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고기를 꺼려서 채소만 먹는 이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믿음 안에서 음식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며 모든 것을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1, 3절)
이 말씀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 형제를 받아주셨음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찬송과 기도 방식을, 다른 이들은 현대적인 찬양과 영상 매체를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이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특별히 지키지만, 또 어떤 이는 매일이 주님의 날이라며 절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인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 사함과 영생의 약속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담는 형식, 즉 비본질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 찬양의 종류, 사용하는 언어 등은 모두 복음의 씨앗이 잘 뿌리내리도록 돕는 그릇과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이 그릇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본질을 훼손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율법주의와 근본주의는 바로 이 비본질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본질을 흐리게 한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율법주의는 처음부터 나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순수하고 경건한 동기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했던 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의 본질인 ‘사랑’과 ‘긍휼’은 사라지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와 같은 규율 그 자체가 신앙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정작 복음의 본질은 외면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들은 기적의 기쁨보다 율법을 어긴 것에 분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근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초,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확산되면서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는 위기 상황이 닥쳤습니다. 이에 맞서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등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수호하려는 숭고한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복음의 본질보다 자신들의 신학적 해석과 형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과 다른 해석을 가진 형제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는 배타적인 태도로 흘러갔습니다. 본질인 ‘사랑’과 ‘관용’은 뒷전이 되고, 교회는 서로를 정죄하며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와 근본주의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선한 동기가 항상 올바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질을 지키려다 비본질에 매몰될 수 있고, 순수한 열정이 배타적인 정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형제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신앙생활을 할까?”하고 비난하며,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품으시고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도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는 대신, 본질인 사랑과 용납으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2.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6-9절)
앞서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더 깊은 질문을 던지며 우리 신앙의 본질을 일깨웁니다. 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행위, 즉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되묻습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입니다. 나의 삶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요셉은 자신을 향한 유혹이 단지 사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사는 거룩한 고백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총리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의 삶은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고 살아갈 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공’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쫓겨 살아갑니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부와 명예, 건강과 장수, 세상 즐거움과 쾌락, 편안과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지만, 정말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연로하신 성도님의 고백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이 심히 쇠약해져서 언제 쓰러질지 몰라 교회에 나올 수 없게 됨을 늘 늘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예전에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봉사했던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고 하시면서, 꿈을 꾸어도 함께 예배 드리는 모습을 꿈을 꾼다고 하십니다. 비록 지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회중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예배 드리는 심정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분처럼 인생의 최후 순간에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나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것으로 온전히 소유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존귀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우리의 구원, 지혜, 거룩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의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10-12절)
앞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며 영적인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0, 12절)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헬라어로 베마 (Βῆμ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베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법정에서 재판관이 앉는 높은 단상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심판대가 아니라,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가 상을 받는 시상대와 더 가까운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 단어를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는’ 심판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심판은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았는지,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고 상급을 정하는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감히 형제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을 살아가는 청지기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14-30)는 이 심판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충성된 종들은 그 달란트를 사용하여 이윤을 남겼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종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가진 재능, 시간, 물질,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달란트가 얼마나 큰지, 혹은 그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책임은 오직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마치 게으른 종이 다른 종이 어떻게 달란트를 썼는지 비난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에 취해 형제를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너무나 쉽게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양심적으로 살고 있어’, ‘저 사람은 지혜와 분별력이 없는 것 같아’와 같은 말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고통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단면만 볼 뿐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때, 정작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인 봉사와 섬김, 사랑과 나눔의 기회는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그 형제 역시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 각자도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직접 보고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 타인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데 집중합시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이 아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설교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후회 없는 고백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 엄중한 도전 앞에서 해답은 오직 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른 소속을 강요합니다. 성공의 소유가 되라, 돈의 소유가 되라, 사람의 인정을 받으라, 때로는 두려움과 죄책감의 종이 되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이 우리의 마지막 숨이 되는 날에도 남기를 소망합니다. 병상에 누워 힘없이 눈을 감을 때, 남은 재산도, 명예도, 관계도 우리를 붙잡아주지 못합니다. 그 순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이 고백뿐입니다..
“살아도 주의 것, 죽어도 주의 것.”
이 고백이 우리의 노래가 되고, 우리의 위로가 되고, 우리의 영원한 승리가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uUdV8JhnGRY 180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