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 (09.21.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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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52회 작성일 Sep 22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9월 21일
본문: 로마서 13:11-14
제목: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인류는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타히티에서 자신이 그린 대작에 이 질문을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이 그림에 갓난아이, 청년, 노인을 나란히 그려 넣으며 인생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마지막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오른 쪽 끝 노인의 모습이 보여주듯이 결국 공허와 절망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줍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창 1:27). 우리는 이 땅의 욕망과 성취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입니다(미 6:8).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은 허무가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요 14:2–3)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이란 바로 이 진리 안에서 출발합니다. 역사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있습니다. 세상은 질문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라는 더 본질적인 물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 바울은 “시기와 때를 알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마치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달력과 시계에 새겨진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바라봅니다. “오늘을 즐겨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이들은 그저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그림, 곧 역사의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것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마치 강물 속에서 거대한 폭포를 만나는 것처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순간, 바로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때,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역사 속에도 그때그때 분명한 ‘카이로스’즉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날을 암호명으로 D-Day라고 부릅니다. 그날로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독일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곧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고,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V-Day, 승리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D-Day입니다. 그날로 죄와 사단의 권세는 꺾였고, 우리의 구원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V-Day, 곧 주님의 재림과 최종적 승리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긴장 속에 있고, 방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전히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밤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V-Day, 그분의 재림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일으키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대 오늘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까? 오늘 주식이 올랐는지, 부동산 값이 떨어졌는지, 내 건강이 어떤지, 자녀의 미래가 어떤지에는 온 신경을 다 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나라의 시계가 어디쯤 와 있는지는 모르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1.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벼락같은 외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단순히 육체의 피로로 인한 잠이 아닙니다. 이 잠은 우리 영혼이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곧 영적 무감각을 의미합니다. 영적 잠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죄가 눈앞에 있어도 무뎌지고,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는 ‘나는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 ‘이 정도는 죄가 아니겠지’라는 안일함, ‘신앙생활이 재미없다’는 무력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영적 잠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어린 시절 물맷돌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승리에 취해 영적으로 방심했을 때, 한낮의 나태함 속에서 밧세바를 탐하는 치명적인 죄를 짓고 맙니다. 또 한 명의 비극적인 영웅,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초인적인 힘을 가졌지만, 쾌락과 안일함에 빠져 영적으로 잠들었습니다. 결국 들릴라의 무릎에서 잠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잃고, 두 눈이 뽑힌 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조차, 그들은 영적 경각심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흔들어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말세에는 우리가 특별히 어떤 죄를 짓는 것 때문에 경고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두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다 멸망시켰느니라”(눅 17:26–29).
여러분,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은 특별히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결혼하고, 집 짓는 일상에만 묶여 살다가 하나님의 때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연속극, 영화, 스마트폰과 SNS, 게임과 영상에 빠져 밤을 새우면서, 정작 기도와 말씀에는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는 쾌락의 문화에 취해 있고,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조차 영혼을 살리는 열정보다는, 외적인 규모와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위험입니다. 우리도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한 채, 노아와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일상에만 파묻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과거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우리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already), 아직 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not yet) 새벽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2.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잠에서 깨어난 성도에게 바울은 새로운 행동을 촉구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2절)
여기서 ‘밤’은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어두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낮’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성경 전체는 이 위대한 역사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세상은 죄의 깊은 밤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새 날을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둠 가운데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사 9:2).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결정적인 승리였지만, 아직 완전히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동이 트기 직전 가장 깊은 어둠 속을 살아가는 새벽의 사람들입니다. 밤은 깊었고, 낮이 곧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벽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바울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다툼과 시기하지 말라.”(13절)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쾌락과 방종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술집과 클럽은 밤새 불을 밝히고, 도박과 중독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습니다. 음란과 호색은 인터넷과 영상 매체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다툼과 시기는 어떻습니까? 정치와 사회는 끝없는 갈등으로 찢겨져 있고, 가정 안에서도 평화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비방하고 경쟁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어둠의 일’입니다.
성도는 이 어둠의 옷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갑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옷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나를 지키고 승리를 쟁취하게 하는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사단은 스마트폰, 미디어, 쾌락을 안겨주는 현대 사회의 도구들을 이용해 우리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 믿음과 사랑으로 빛의 갑옷을 입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옷을 갈아입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마치 군인이 군복을 입는 순간 민간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바뀌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정체성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역사 속에는 이 말씀에 의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한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를 갈망했지만, 육체의 욕망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았지만, 죄의 유혹 앞에서는 늘 무릎 꿇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 저에게 순결을 주소서!”라고 외쳤지만, 이내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라고 덧붙이는 처절한 이중성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성경을 펼쳤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의 영혼을 짓누르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방탕한 삶을 끊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내 영혼의 모든 어둠이 사라졌다”고 그는 훗날 고백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순간, 우리도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옷을 입고, 학교에서는 학생의 옷을 입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있든 주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주님의 향기를 맡고 주님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2001년 9월 11일, 뉴욕시의 상징인 100층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파괴되었습니다. 잔해 속을 파헤치며 사체와 시체조각을 끌어내고 있던 경찰관, 소방수,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 잔인한 파괴현장에서 모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한 뉴스 진행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힘과 번영의 상징이 한시간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뉴스 진행자는 자신이 계시록 18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한시간만에, 한 시간 안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지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시작을 압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역사의식 없는 신앙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저 표류하는 배처럼 목적 없이 둥둥 떠다닐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적 역사의식을 가진 신앙은 이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나는 아직도 어둠의 옷을 입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정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깨어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빛의 갑옷을 입을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입니다. 그리하여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성도로 굳건히 살아가며,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9월 21일
본문: 로마서 13:11-14
제목: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인류는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타히티에서 자신이 그린 대작에 이 질문을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이 그림에 갓난아이, 청년, 노인을 나란히 그려 넣으며 인생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마지막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오른 쪽 끝 노인의 모습이 보여주듯이 결국 공허와 절망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줍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창 1:27). 우리는 이 땅의 욕망과 성취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입니다(미 6:8).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은 허무가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요 14:2–3)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이란 바로 이 진리 안에서 출발합니다. 역사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있습니다. 세상은 질문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라는 더 본질적인 물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 바울은 “시기와 때를 알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마치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달력과 시계에 새겨진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바라봅니다. “오늘을 즐겨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이들은 그저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그림, 곧 역사의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것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마치 강물 속에서 거대한 폭포를 만나는 것처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순간, 바로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때,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역사 속에도 그때그때 분명한 ‘카이로스’즉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날을 암호명으로 D-Day라고 부릅니다. 그날로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독일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곧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고,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V-Day, 승리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D-Day입니다. 그날로 죄와 사단의 권세는 꺾였고, 우리의 구원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V-Day, 곧 주님의 재림과 최종적 승리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긴장 속에 있고, 방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전히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밤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V-Day, 그분의 재림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일으키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대 오늘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까? 오늘 주식이 올랐는지, 부동산 값이 떨어졌는지, 내 건강이 어떤지, 자녀의 미래가 어떤지에는 온 신경을 다 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나라의 시계가 어디쯤 와 있는지는 모르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1.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벼락같은 외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단순히 육체의 피로로 인한 잠이 아닙니다. 이 잠은 우리 영혼이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곧 영적 무감각을 의미합니다. 영적 잠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죄가 눈앞에 있어도 무뎌지고,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는 ‘나는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 ‘이 정도는 죄가 아니겠지’라는 안일함, ‘신앙생활이 재미없다’는 무력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영적 잠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어린 시절 물맷돌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승리에 취해 영적으로 방심했을 때, 한낮의 나태함 속에서 밧세바를 탐하는 치명적인 죄를 짓고 맙니다. 또 한 명의 비극적인 영웅,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초인적인 힘을 가졌지만, 쾌락과 안일함에 빠져 영적으로 잠들었습니다. 결국 들릴라의 무릎에서 잠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잃고, 두 눈이 뽑힌 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조차, 그들은 영적 경각심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흔들어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말세에는 우리가 특별히 어떤 죄를 짓는 것 때문에 경고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두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다 멸망시켰느니라”(눅 17:26–29).
여러분,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은 특별히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결혼하고, 집 짓는 일상에만 묶여 살다가 하나님의 때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연속극, 영화, 스마트폰과 SNS, 게임과 영상에 빠져 밤을 새우면서, 정작 기도와 말씀에는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는 쾌락의 문화에 취해 있고,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조차 영혼을 살리는 열정보다는, 외적인 규모와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위험입니다. 우리도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한 채, 노아와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일상에만 파묻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과거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우리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already), 아직 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not yet) 새벽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2.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잠에서 깨어난 성도에게 바울은 새로운 행동을 촉구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2절)
여기서 ‘밤’은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어두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낮’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성경 전체는 이 위대한 역사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세상은 죄의 깊은 밤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새 날을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둠 가운데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사 9:2).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결정적인 승리였지만, 아직 완전히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동이 트기 직전 가장 깊은 어둠 속을 살아가는 새벽의 사람들입니다. 밤은 깊었고, 낮이 곧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벽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바울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다툼과 시기하지 말라.”(13절)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쾌락과 방종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술집과 클럽은 밤새 불을 밝히고, 도박과 중독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습니다. 음란과 호색은 인터넷과 영상 매체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다툼과 시기는 어떻습니까? 정치와 사회는 끝없는 갈등으로 찢겨져 있고, 가정 안에서도 평화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비방하고 경쟁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어둠의 일’입니다.
성도는 이 어둠의 옷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갑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옷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나를 지키고 승리를 쟁취하게 하는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사단은 스마트폰, 미디어, 쾌락을 안겨주는 현대 사회의 도구들을 이용해 우리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 믿음과 사랑으로 빛의 갑옷을 입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옷을 갈아입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마치 군인이 군복을 입는 순간 민간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바뀌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정체성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역사 속에는 이 말씀에 의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한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를 갈망했지만, 육체의 욕망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았지만, 죄의 유혹 앞에서는 늘 무릎 꿇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 저에게 순결을 주소서!”라고 외쳤지만, 이내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라고 덧붙이는 처절한 이중성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성경을 펼쳤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의 영혼을 짓누르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방탕한 삶을 끊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내 영혼의 모든 어둠이 사라졌다”고 그는 훗날 고백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순간, 우리도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옷을 입고, 학교에서는 학생의 옷을 입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있든 주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주님의 향기를 맡고 주님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2001년 9월 11일, 뉴욕시의 상징인 100층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파괴되었습니다. 잔해 속을 파헤치며 사체와 시체조각을 끌어내고 있던 경찰관, 소방수,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 잔인한 파괴현장에서 모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한 뉴스 진행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힘과 번영의 상징이 한시간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뉴스 진행자는 자신이 계시록 18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한시간만에, 한 시간 안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지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시작을 압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 역사의식 없는 신앙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저 표류하는 배처럼 목적 없이 둥둥 떠다닐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적 역사의식을 가진 신앙은 이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나는 아직도 어둠의 옷을 입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정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깨어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빛의 갑옷을 입을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입니다. 그리하여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성도로 굳건히 살아가며,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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