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율법의 완성 (09.14.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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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62회 작성일 Sep 15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9월 14일
본문: 롬 13:8-10
제목: 사랑, 율법의 완성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혹시 가장 외롭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직장 회식 자리에서도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순간은 없으셨습니까? 명절이 와도 가족들의 전화 한 통이 없는 순간은요? 오늘날 우리는 역설적으로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SNS 알림 속에서도, 우리는 진정한 관계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 속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인사하지만 마음으로는 거리를 두는 관계들, 오직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우리 사회의 온기를 식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웃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아파트 복도,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계산만 오가는 시장, 명절에도 전화 한 통 걸기 어려운 가족 관계...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우리를 영적인 삭막함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예언한 마지막 시대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 말씀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닙니까? ‘나 자신’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돈과 성공을 향한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며,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삶. 바로 이러한 영적인 빈곤이 우리를 끝없는 허무와 외로움 속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입니다. 사랑의 불이 꺼져가고, 관계의 온기가 사라져버린 삭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 삭막함을 이겨낼 힘은 어디에 있는가?’‘진정한 사랑의 불꽃을 다시 지필 길은 없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 8-10절이 주는 놀라운 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목표이자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감성적인 외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근본 원리이자,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사랑이 갖는 핵심적인 의미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주제를 깊이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있거나,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을 나열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율법이 결코 무작위적인 규율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원칙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본질은 결국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1계명부터 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이 계명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는 우상을 만들지 않고,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며, 창조주이신 그분만을 예배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의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 계명들 또한 모두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내면을 향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 ‘간음하지 말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죄를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을 넘어, 이웃의 몸과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 ‘살인하지 말라’는 단순히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넘어섭니다. 예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고 말씀하셨듯이, 마음속의 미움과 분노는 이미 영혼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웃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존엄성까지 존중하는 것입니다.
• ‘탐내지 말라’는 율법의 가장 마지막 계명이면서, 모든 죄의 뿌리를 드러내는 계명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것은 단순히 소유욕을 넘어,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이웃의 잘됨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태복음 22:40)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율법의 조항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 위에 서 있습니다. 율법의 문자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율법의 정신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이 율법의 전부입니다.
2.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사랑과 율법의 관계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원에 관한 깊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요한일서 4:8)이시며, 삼위일체를 통해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을 넘어, 우리 존재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비극적인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은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주지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거나 율법을 온전히 지킬 힘을 주지는 못한다는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는 결코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한계를 초월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유일한 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궁극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 즉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는 말씀처럼, 우리 안의 사랑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율법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두려워하거나 의무감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랑의 본질로 인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율법의 요구를 채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끝내야 할 빚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끝낼 수 없는 빚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사랑의 빚진 자로서 평생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값없이 받았으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영원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요한일서 4:11).
이 사랑의 빚은 우리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에, 그 감사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갚아나가고 싶어지는 ‘기쁨의 빚’입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우리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계속 사랑을 나누고 베풂으로써 관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역설적인 빚입니다. 이 빚은 갚을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갚을수록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관계가 바로 이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일상에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 증명됩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병든 자를 고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죄인을 품으신 모든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소극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컴패션의 대표 서정인목사님이 쓴 책, <고맙다>에 나오는 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병원에서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 아이를 위하여 골수 이식을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디. 예전에 혈액 등록하면서 골수 이식하겠다고 신청해 두었는데, 목사님의 골수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연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골수 이식 수술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골수를 받은 아이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5개월쯤 지나서 아이의 병이 재발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이식 수술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서는 다시 이식수술을 해도 아이가 살 확률이 1%도 안 된다면서 거절하셔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수술 때 있었던 의료 사고 때문에 아내도 말리고, 주변 사람들마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충분해요. 가능성이 없는데 괜히 고생하시는 거예요.”하고 말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지 않겠다고 병원에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부담감이 있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어내려는 의도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셨어요. 이제는 목사님의 책임이 아니에요.”모두 말렸습니다.
그런 중에 에콰도르에 비전트립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 장로님이라는 분을 만나서 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장로님도 “아유, 목사님 그 정도하셨으면 충분하네요.”하고 나와야 하는데 ‘목사님, 해 드리세요.”하고 나오는 거에요. 목사님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니, 장로님, 제가 또 해야 하나요?”하고 묻자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 큰 아이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그 아이의 부모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 것입니다. 목사님이 골수 이식을 해 주시면 그 아이가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아이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날 호텔로 돌아와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여자아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너는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겠니? 설사 1%의 가능성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그 말씀에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그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내가 이럴 수 있나?!’ 이런 생각이 스쳐갈 때에 하나님이 못을 박듯이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다.”
결국 목사님은 병원에 연락해서 골수 이식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괜히 ‘목사님이 훌륭해서 이렇게까지 희생적으로 사랑하시는구나’하고 받아드릴까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솔직히 다 쓰면서 자신은 부끄러운 목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항복했기에 골수 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붙잡읍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이식 준비를 하는데,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다섯 장의 긴 편지였는데 장마다 눈물 자국이 범벅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이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애가 무균실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감사의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얘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달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게 됐고,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아이한테 골수 이식 수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서정인 목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나도 저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반드시 이렇게 극적이고 거창한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희생을 요구하시기 전에,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의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본래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희생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조차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 부터, 가령 독감에 시달리는 형제 자매를 위해서 뜨거운 국을 끓여서 갖다 주는 일 정도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사랑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율법이 지향하는 모든 가치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랑을 실행할 때,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단번에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빚을 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사랑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을 넘어, 적극적으로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둘째,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의 실천을 시작하십시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지체들에게,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를 건네고, 작은 봉사로 섬기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셋째,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힘입어 실천할 때, 우리는 율법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당을 나설 때 ‘나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다. 이 빚은 갚을수록 내가 더 행복해지는 빚이다’라고 가슴에 새기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짓눌려 살지 말고,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불씨’를 심기 바랍니다!
날짜: 2025년 9월 14일
본문: 롬 13:8-10
제목: 사랑, 율법의 완성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혹시 가장 외롭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직장 회식 자리에서도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순간은 없으셨습니까? 명절이 와도 가족들의 전화 한 통이 없는 순간은요? 오늘날 우리는 역설적으로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SNS 알림 속에서도, 우리는 진정한 관계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 속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인사하지만 마음으로는 거리를 두는 관계들, 오직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우리 사회의 온기를 식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웃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아파트 복도,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계산만 오가는 시장, 명절에도 전화 한 통 걸기 어려운 가족 관계...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우리를 영적인 삭막함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예언한 마지막 시대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 말씀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닙니까? ‘나 자신’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돈과 성공을 향한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며,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삶. 바로 이러한 영적인 빈곤이 우리를 끝없는 허무와 외로움 속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입니다. 사랑의 불이 꺼져가고, 관계의 온기가 사라져버린 삭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 삭막함을 이겨낼 힘은 어디에 있는가?’‘진정한 사랑의 불꽃을 다시 지필 길은 없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 8-10절이 주는 놀라운 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목표이자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감성적인 외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근본 원리이자,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사랑이 갖는 핵심적인 의미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주제를 깊이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있거나,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을 나열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율법이 결코 무작위적인 규율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원칙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본질은 결국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1계명부터 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이 계명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는 우상을 만들지 않고,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며, 창조주이신 그분만을 예배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의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 계명들 또한 모두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내면을 향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 ‘간음하지 말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죄를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을 넘어, 이웃의 몸과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 ‘살인하지 말라’는 단순히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넘어섭니다. 예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고 말씀하셨듯이, 마음속의 미움과 분노는 이미 영혼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웃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존엄성까지 존중하는 것입니다.
• ‘탐내지 말라’는 율법의 가장 마지막 계명이면서, 모든 죄의 뿌리를 드러내는 계명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것은 단순히 소유욕을 넘어,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이웃의 잘됨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태복음 22:40)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율법의 조항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 위에 서 있습니다. 율법의 문자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율법의 정신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이 율법의 전부입니다.
2.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사랑과 율법의 관계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원에 관한 깊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요한일서 4:8)이시며, 삼위일체를 통해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사랑’은 단순히 감정을 넘어, 우리 존재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비극적인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은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주지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거나 율법을 온전히 지킬 힘을 주지는 못한다는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는 결코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한계를 초월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유일한 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궁극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 즉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는 말씀처럼, 우리 안의 사랑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율법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두려워하거나 의무감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랑의 본질로 인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율법의 요구를 채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끝내야 할 빚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끝낼 수 없는 빚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사랑의 빚진 자로서 평생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값없이 받았으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영원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요한일서 4:11).
이 사랑의 빚은 우리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에, 그 감사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갚아나가고 싶어지는 ‘기쁨의 빚’입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우리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계속 사랑을 나누고 베풂으로써 관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역설적인 빚입니다. 이 빚은 갚을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갚을수록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관계가 바로 이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일상에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 증명됩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병든 자를 고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죄인을 품으신 모든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소극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컴패션의 대표 서정인목사님이 쓴 책, <고맙다>에 나오는 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병원에서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 아이를 위하여 골수 이식을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디. 예전에 혈액 등록하면서 골수 이식하겠다고 신청해 두었는데, 목사님의 골수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연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골수 이식 수술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골수를 받은 아이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5개월쯤 지나서 아이의 병이 재발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이식 수술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서는 다시 이식수술을 해도 아이가 살 확률이 1%도 안 된다면서 거절하셔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수술 때 있었던 의료 사고 때문에 아내도 말리고, 주변 사람들마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충분해요. 가능성이 없는데 괜히 고생하시는 거예요.”하고 말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지 않겠다고 병원에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부담감이 있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어내려는 의도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셨어요. 이제는 목사님의 책임이 아니에요.”모두 말렸습니다.
그런 중에 에콰도르에 비전트립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 장로님이라는 분을 만나서 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장로님도 “아유, 목사님 그 정도하셨으면 충분하네요.”하고 나와야 하는데 ‘목사님, 해 드리세요.”하고 나오는 거에요. 목사님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니, 장로님, 제가 또 해야 하나요?”하고 묻자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 큰 아이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그 아이의 부모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 것입니다. 목사님이 골수 이식을 해 주시면 그 아이가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아이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날 호텔로 돌아와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여자아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너는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겠니? 설사 1%의 가능성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그 말씀에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그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내가 이럴 수 있나?!’ 이런 생각이 스쳐갈 때에 하나님이 못을 박듯이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다.”
결국 목사님은 병원에 연락해서 골수 이식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괜히 ‘목사님이 훌륭해서 이렇게까지 희생적으로 사랑하시는구나’하고 받아드릴까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솔직히 다 쓰면서 자신은 부끄러운 목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항복했기에 골수 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붙잡읍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이식 준비를 하는데,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다섯 장의 긴 편지였는데 장마다 눈물 자국이 범벅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이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애가 무균실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감사의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얘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달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게 됐고,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아이한테 골수 이식 수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서정인 목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나도 저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반드시 이렇게 극적이고 거창한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희생을 요구하시기 전에,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의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본래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희생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조차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 부터, 가령 독감에 시달리는 형제 자매를 위해서 뜨거운 국을 끓여서 갖다 주는 일 정도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사랑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율법이 지향하는 모든 가치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랑을 실행할 때,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단번에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빚을 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사랑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을 넘어, 적극적으로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둘째,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의 실천을 시작하십시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지체들에게,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를 건네고, 작은 봉사로 섬기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셋째,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힘입어 실천할 때, 우리는 율법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당을 나설 때 ‘나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다. 이 빚은 갚을수록 내가 더 행복해지는 빚이다’라고 가슴에 새기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짓눌려 살지 말고,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불씨’를 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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