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신앙 (09.07.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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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75회 작성일 Sep 08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9월 7일
본문: 롬 13:1-7
제목: 국가와 신앙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요즘 세상 뉴스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특히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분열...때로는 뉴스를 끄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한 편으로는 법과 질서가 무너진 것처럼 느껴져 불안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권력이 남용되는 것 같아 답답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불체자를 단속하는 이민 정책을 둘러싼 논쟁들을 보면, 한쪽에서는 엄격한 법 집행을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법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권 침해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이 땅의 권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갈등과 긴장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입니다. 4,000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당시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을 마음대로 억누르던 시대에, 함무라비 왕은 돌기둥에 법을 새겨서 세상에 공포했습니다. ‘이제부터 왕의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돌기둥에 새겨진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명문화한 것이죠. 이게 세상에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인데 그 시대에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법에는 신분 차별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무조건 힘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향한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고, 힘을 가진 사람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를 가리켜 ‘법치주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모두 법 아래에서 공평하게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원리죠. 하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 법은 아무리 훌륭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법은 악을 처벌하고,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막는 역할에 그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마음 속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로써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법과 권력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깊이 연결된 신앙적 문제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반영하는 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과 권력의 문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어떻게 신앙적으로 풀어가야 할지, 현실적 과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3장 1–7절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모든 권세는 어디에서 오는가? 둘째,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가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굳건히 세워나가길 소망합니다.
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1–2절)
오늘 본문인 로마서 13장이 쓰여질 당시,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때로는 폭군이 등장해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신앙과 충돌하는 이 권력에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사도 바울의 첫 선언은 우리에게 큰 물음표를 던져줍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불의한 통치를 일삼던 권력 체제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권세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절에서는 ‘그 권력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2절)고 말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이 구절은 종종 불의한 정권과 권력을 옹호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로 부터’라는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모든 권력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십시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가 권력을 잡는 것을 보며 ‘하나님, 도대체 왜 저런 사람을 허용하시는 겁니까?’라고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성경적 답변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날 화려하고 웅장한 바벨론 도성을 내려다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외치며 자신의 권세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7년간 들에서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아무리 강력한 절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명과 권세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이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과 권력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불의해 보이는 권력 앞에서 낙담하며 좌절할 수 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은 노예처럼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신자들은 세상 권력을 우상화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고, 불의한 권력에 무작정 굴복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원자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짓도록 허락했죠.
놀랍게도,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여 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 44장과 45장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그를 ‘나의 목자’이자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양 떼를 돌보듯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 권력자까지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며, 세상의 모든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 의지입니다. 물론 고레스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따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든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구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인간의 계획이나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의해 보이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어 보이는 권력일지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오만함을 꺾기도 하시고, 그들의 야망을 이용하기도 하시며, 그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진리를 굳게 믿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2. 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3–4절)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국가와 권세를 세우셨을까요? 그냥 우리끼리 사랑하며 살면 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합니다.
3-4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바울은 국가와 권세를 ‘하나님의 사자(사역자)’, 즉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섬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질서와 악으로 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국가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질서한 사회가 되면 힘없는 약자가 고통받기 때문에, 국가는 칼을 들어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를 보면 국가는 종종 이 본래의 소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고, 국가 권력을 우상화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역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권력을 악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 공산주의 국가는 자기 이념을 우상화하여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이 모든 사례는 국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우상화할 때,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늘 성경 말씀에 비추어 국가가 본래의 소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서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존중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그 소명을 잊고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그 모든 권력 너머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3. 신자는 양심으로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5–7절)
사도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선언하며 신자들에게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복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5-7절입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는 우리의 복종의 근거와 동기가 단순히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 기준, 즉 양심에 있음을 명확히 밝힙니다.
여기서 양심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감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진 내면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행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분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대제사장에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권력 위에 존재하시는 궁극적인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국가의 불의한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을 거부할 신앙적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 원칙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생명을 건 선택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요, ‘신’이라 칭하며, 모든 시민에게 황제의 신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경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충성을 넘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종교적 요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며 국가의 법을 따랐지만, ‘오직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가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행위임을 양심으로 깨달았고, 베드로의 선언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재산을 빼앗기고, 투옥되고, 순교 당하는 끔찍한 핍박을 겪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참된 복종임을 증명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은 20세기에도 이어졌습니다. 나치 독일의 압제 속에서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정권이 불의한 길로 나아갈 때 교회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국가의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를 끌어내는 일뿐 아니라, 때로는 그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본 회퍼는 불의한 권력에 순종하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저항하는 것이 참된 복종임을 보여주었고,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삶은 "인간의 권력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앙의 증거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바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이 땅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이 땅의 시민으로서 충성하십시오.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교통 규칙을 지키며,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얼마나 책임감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의 성실한 삶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들기보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입니다. 또한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를 외치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디모데전서 2장은 모든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지도자이고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와 평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위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들을 위해 지혜와 정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민자로서의 삶이 때로는 불안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권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진리가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러니 불의와 혼란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당신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새로 맞이하는 한 주를 담대히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9월 7일
본문: 롬 13:1-7
제목: 국가와 신앙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요즘 세상 뉴스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특히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분열...때로는 뉴스를 끄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한 편으로는 법과 질서가 무너진 것처럼 느껴져 불안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권력이 남용되는 것 같아 답답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불체자를 단속하는 이민 정책을 둘러싼 논쟁들을 보면, 한쪽에서는 엄격한 법 집행을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법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권 침해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이 땅의 권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갈등과 긴장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입니다. 4,000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당시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을 마음대로 억누르던 시대에, 함무라비 왕은 돌기둥에 법을 새겨서 세상에 공포했습니다. ‘이제부터 왕의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돌기둥에 새겨진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명문화한 것이죠. 이게 세상에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인데 그 시대에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법에는 신분 차별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무조건 힘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향한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고, 힘을 가진 사람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를 가리켜 ‘법치주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모두 법 아래에서 공평하게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원리죠. 하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 법은 아무리 훌륭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법은 악을 처벌하고,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막는 역할에 그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마음 속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로써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법과 권력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깊이 연결된 신앙적 문제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반영하는 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과 권력의 문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어떻게 신앙적으로 풀어가야 할지, 현실적 과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3장 1–7절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모든 권세는 어디에서 오는가? 둘째,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가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굳건히 세워나가길 소망합니다.
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1–2절)
오늘 본문인 로마서 13장이 쓰여질 당시,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때로는 폭군이 등장해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신앙과 충돌하는 이 권력에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사도 바울의 첫 선언은 우리에게 큰 물음표를 던져줍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불의한 통치를 일삼던 권력 체제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권세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절에서는 ‘그 권력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2절)고 말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이 구절은 종종 불의한 정권과 권력을 옹호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로 부터’라는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모든 권력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십시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가 권력을 잡는 것을 보며 ‘하나님, 도대체 왜 저런 사람을 허용하시는 겁니까?’라고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성경적 답변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날 화려하고 웅장한 바벨론 도성을 내려다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외치며 자신의 권세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7년간 들에서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아무리 강력한 절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명과 권세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이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과 권력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불의해 보이는 권력 앞에서 낙담하며 좌절할 수 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은 노예처럼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신자들은 세상 권력을 우상화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고, 불의한 권력에 무작정 굴복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원자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짓도록 허락했죠.
놀랍게도,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여 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 44장과 45장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그를 ‘나의 목자’이자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양 떼를 돌보듯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 권력자까지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며, 세상의 모든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 의지입니다. 물론 고레스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따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든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구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인간의 계획이나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의해 보이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어 보이는 권력일지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오만함을 꺾기도 하시고, 그들의 야망을 이용하기도 하시며, 그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진리를 굳게 믿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2. 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3–4절)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국가와 권세를 세우셨을까요? 그냥 우리끼리 사랑하며 살면 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합니다.
3-4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바울은 국가와 권세를 ‘하나님의 사자(사역자)’, 즉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섬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질서와 악으로 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국가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질서한 사회가 되면 힘없는 약자가 고통받기 때문에, 국가는 칼을 들어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를 보면 국가는 종종 이 본래의 소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고, 국가 권력을 우상화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역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권력을 악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 공산주의 국가는 자기 이념을 우상화하여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이 모든 사례는 국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우상화할 때,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늘 성경 말씀에 비추어 국가가 본래의 소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서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존중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그 소명을 잊고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그 모든 권력 너머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3. 신자는 양심으로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5–7절)
사도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선언하며 신자들에게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복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5-7절입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는 우리의 복종의 근거와 동기가 단순히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 기준, 즉 양심에 있음을 명확히 밝힙니다.
여기서 양심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감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어진 내면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행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분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대제사장에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권력 위에 존재하시는 궁극적인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국가의 불의한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을 거부할 신앙적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 원칙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생명을 건 선택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요, ‘신’이라 칭하며, 모든 시민에게 황제의 신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경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충성을 넘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종교적 요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며 국가의 법을 따랐지만, ‘오직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가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행위임을 양심으로 깨달았고, 베드로의 선언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재산을 빼앗기고, 투옥되고, 순교 당하는 끔찍한 핍박을 겪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참된 복종임을 증명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은 20세기에도 이어졌습니다. 나치 독일의 압제 속에서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정권이 불의한 길로 나아갈 때 교회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국가의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를 끌어내는 일뿐 아니라, 때로는 그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본 회퍼는 불의한 권력에 순종하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저항하는 것이 참된 복종임을 보여주었고,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삶은 "인간의 권력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앙의 증거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바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이 땅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이 땅의 시민으로서 충성하십시오.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교통 규칙을 지키며,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얼마나 책임감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의 성실한 삶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들기보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입니다. 또한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를 외치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디모데전서 2장은 모든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지도자이고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와 평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위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들을 위해 지혜와 정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민자로서의 삶이 때로는 불안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권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진리가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러니 불의와 혼란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당신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새로 맞이하는 한 주를 담대히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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