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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08.24.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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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12회 작성일 Aug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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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8월 24일
본문: 로마서 12:14-21
제목: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수없이 악을 경험합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이웃에게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사회의 불의한 구조 속에서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이웃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같이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즉시 보복을 꿈꿉니다.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더 크게 되갚아 주겠다.” 또 다른 사람은 체념 속에 빠집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착하게 살면 바보 된다.” 어떤 이는 점점 냉소적이 됩니다. “선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 힘 있는 자가 이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충동에 쉽게 굴복하거나, 악에 압도되어 무력하게 주저앉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21절에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 솔직히 이 말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그래, 해볼 수 있지'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악을 보면 분노하고, 복수하고 싶고, 아니면 무력감에 주저앉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7-8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말하며, 우리의 본성, 곧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주셨을까요? 여기에는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 악순환을 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인 십자가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악의 폭력이 가장 잔인하게, 그리고 가장 극심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죄거 없으신 예수께서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며, 못 박히신 그곳은 세상의 모든 악이 총집결된 자리였습니다. 사단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사랑으로 악을 소멸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사랑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사단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을 꺾으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사단의 두 가지 권세, 즉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부활은 바로 그 승리를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을 완벽하게 이기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는 도덕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이미 악이 꺾였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가능해진 삶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악을 꺾으셨다는 승리의 소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에 동참한 자가 이제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전히 악에 대해 보복이나 냉소로 대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악을 꺾으신 주님의 승리를 힘입어 악에 굴하지 않고 선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악에게 지지 말라’(롬 12:21)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이제는 참된 자유와 생명을 더욱 충만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복과 생명이고, 불순종의 길은 저주와 사망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늘 마음 속에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강력한 무기는 거짓과 속임수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하여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옛적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귀는 지금도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하나님 없이 네 맘대로 사는 것이 자유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불편하고, 재미없는 인생이 된다.’라고 거짓 가르침으로 설득합니다.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다. 자유를 누려라. 네 원하는 대로 살면 행복해진다.’고 유혹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이 과연 자유할까요? 죄와 치유 받지 못한 상처, 그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들-열등감, 교만, 시기, 미움-에 묶인 인생이 과연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때 섭섭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되새길 수록 마음에 미움이 생깁니다. 복수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느덧 내가 미움에 묶입니다.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힘들어집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여기 앉아 있으면 나는 저기 떨어져 앉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편합니까! 늘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니까 그만큼 내 자신이 여기에 묶여서 제한을 받습니다. 마음에 평안과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자유합니다. 그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어집니다.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봐도 마음이 평안하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면서 기도를 해주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자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자유하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 신자들이 자유와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시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충만과 부요함을 누리는 비결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1.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담대히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은 단순히 소극적인 인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보다 더 강력한 능력으로 이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14-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축복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까?

17-18절에서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선한 일을 도모하고, 더불어 화목하라고 합니다. 악으로 갚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담대히 강력하게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악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에 우리도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죄와 악의 권세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그 승리가 실제인 것을 온 세상에 확증하여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승리의 삶이 가능한 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의 종이 아니라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연약한 자였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사람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19)라고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에게 쫓겨다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히 11:38).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희롱, 채찍, 감옥,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부활, 더 큰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상황의 피해자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담대히 사는 자들입니다.

2.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겨 드리기 때문입니다. 

19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때때로 악이 너무 강력해 보일 때 낙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십시오.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실패로 여겼으나, 악이 승리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활로써 그 모든 것을 뒤집으셨습니다. 악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악이 아주 강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허락을 벗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사단이 욥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허락 아래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깊으신 지혜 가운데 허락하시되 사단에게 그 한계를 분명히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고 갚으려고 하면 결국 우리의 마음이 먼저 병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과 회복을 보장하는 때,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소망이 있기에, 지금 내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악은 잠시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 백일하에 그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단순히 ‘복수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과 공의를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혹시 지금 너무 억울해서 잠 못 이루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억울하고 분해서 밤낮으로 눈물 흘리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고통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그분께서 직접 공의롭게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악이 나를 압도하고, 내 안에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를 때 “하나님은 내 사정을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속히 오셔서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의를 완전히 회복하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땅에서 악으로 인한 고난을 겪는 것에 대해 성경적인 이해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눈물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다듬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각가가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을 깎아내어 걸작을 만들듯, 하나님은 기쁨과 슬픔을 엮어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그분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두 번째 길입니다.

3.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실제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믿기에,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까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21절에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기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보복적 수치심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은혜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죄인이 참회할 때 숯불이 담긴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닌 풍습이 있었는데, 선을 베푸는 행위가 바로 그런 회개를 촉발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옷자락만 베어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해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치지 않았다.”(삼상 24장)

그때 사울은 부끄러워하며 울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으나 너는 나를 선대하였으니 네가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 24:17)

바로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미움만 커지지만, 선으로 감싸면 상대방의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십자가에서 저주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짊어지시고 죽음으로 이기신 사랑의 정점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이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나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악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결코 불가능한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이미 악을 꺾으시고, 부활로 새 생명을 주시며, 재림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실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삶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가 ‘새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재림의 약속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미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떤 악과 마주치고 있습니까?
• 내 안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맞서십시오.
•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망과 상처가 있을 때, 다시 오실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용서하십시오.

이 길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와 생명으로 가득찬 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승리의 길입니다. 이번 한 주간, 그 길 위에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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