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길 (08.17.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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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28회 작성일 Aug 18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8월 17일
본문: 로마서 12:9–13
제목: 사랑의 길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서론: 저에게는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홈리스 피풀(노숙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붉은 신호등 아래에서 차가 멈춰 섰을 때 투명한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차창 밖에 낡은 푯말을 든 사람과 마주칩니다. 허름한 옷차림과 표정 없는 얼굴, 그리고 삐뚤빼뚤 적힌, ‘HELP ME!, 도와주세요!’라는 글귀가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연민과 함께 불편함,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만약 내가 돈을 준다면, 과연 이 돈이 그에게 정말 필요한 따뜻한 식사 한 끼가 될까? 아니면 혹시 마약이나 술을 사는 데 쓰이는 건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 선의와 현실적인 의심이 충돌합니다. 순수한 연민은 ‘도와줘야 해’라고 속삭이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신중해야 해’라고 경고합니다. 섣부른 도움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닌지, 선의가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나를 멈춰 세웁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깨닫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불편함과 갈등은 단순히 그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어쩌면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무기력함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 배후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고, 그 근원은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을 나눌 때에 우리는 가장 복스러운 충만을 누리게 되고,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것입니다. 그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고, 무슨 일든지 힘드는 줄도 모릅니다. 사는 것이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사람과의 사랑도 이럴진대 하나님 사랑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복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모든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 대신에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욕망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공허함을 결코 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로니한 것은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가 음악, SNS, 광고, 드라마 등등 어디에나 흘러 넘쳐 납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이 이렇게 많은 세상입니까? 아니면, 사랑이 없는 걸 숨기려고 더 많이 말하는 겁니까?” 우리는 가장 풍성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이 가장 메말라가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가지 말세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주님은 말세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4절에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되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 자신’, ‘돈’, ‘쾌락’이 올라앉았습니다. 사랑이 본래 자리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바울은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동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을 또 하나의 무거운 율법이나 규범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죄와 율법의 포로 상태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키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ㅊ우만한 삶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1.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9절)
9절,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이것은 ‘위선 없는, 꾸밈없는’이란 뜻으로 사랑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가면 쓰지 말라. 겉으로는 미소 짓고 ‘사랑합니다’ 말하지만, 속으로는 계산하거나 냉담한 마음을 품지 말라.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사랑하라.”
이어서 ‘악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몸서리칠 만큼 혐오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뱀을 발견했을 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독 있는 음식을 본능적으로 뱉어버리는 것처럼, 성도는 악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단호히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분의 분노는 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참된 사랑은 악을 보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맞서 싸우는 거룩한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할 때, 우리는 진정한 힘과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서로 존경하고 뜨겁게 섬기라 (10-11절)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도 바울은 사랑을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공동체적 실천으로 확장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모이는 집단이 아니라, 영적 가족입니다. 가족이니까 더 쉽게 상처 주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족은 서로 먼저 존경하고 섬기는 법을 배웁니다.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말씀은, 내가 존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먼저 존경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섬겨주는 분들에게 다가가 “집사님 권사님, 섬겨주신 덕분에 은혜롭게 예배를 마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먼저 존경을 표현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존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입니까? 사랑은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것을 넘어, 남을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이 사랑은 또한 ‘열심’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게으른 마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식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공동체 안에서 섬김이 버겁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잠시 멈추어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회복될 때,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도 다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기도하라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사랑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상처도 받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환난과 오해, 심지어 핍박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세 가지 영적 동력을 말합니다.
첫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이 세상의 상황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확증된 소망입니다.그리고 이 소망으로 우리는 즐거워 합니다.
둘째, 환난 중에 참으라.
인내란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바라보며 능동적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인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십니다.
셋째, 기도에 항상 힘쓰라.
사랑의 길에서 지칠 때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연료통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 없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랑은 무의미하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망이라는 씨앗을 인내로 지키고, 기도로 매일 물을 줄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메마른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4. 나누고 섬기며 대접하라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랑은 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필요를 채우고, 낯선 사람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질을 나눈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었습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교회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영국 웨일스 부흥 당시에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한 가난한 광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거의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느 날 굶주린 이웃을 보고, 자기 집에 있는 유일한 빵을 내어주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도 먹을 게 없는데 왜 주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는데, 내가 이 빵 하나 못 내어놓겠습니까?”
여러분, 최근에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것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미뤄두고 있습니까? 사랑은 계산하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돌아가셔서 작은 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바쁜 일과 중에도 병상에 있는 성도에게 5분만 전화해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전해 보십시오. 혼자 사는 이웃의 문 앞에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놓아두십시오. 성경 말씀 한 구절과 짧은 격려를 메시지로 보내 보십시오. 이런 작은 사랑이 모여, 주님의 큰 사랑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결론: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함경남도 흥남 지역까지 밀려났습니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혹독한 추위 속에 부두에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에 미 해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해 있었고, 선장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였습니다.
원래 이 배는 군수물자와 장비를 싣고 철수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두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 아이, 부녀자들이 끝없는 줄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우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따르면 저들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반면에 저들을 살리려면 상부의 명령을 거스리게 됩니다. 상부의 명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불명예스러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 갈등 속에서 그는 결국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군수물자를 전부 버려라. 대신 이 사람들을 태운다.” 그 순간, 배 안에 쌓여 있던 무기와 장비를 전부 바다에 던지고, 그 자리에 피난민들을 태웠습니다. 원래 60명 승무원과 12명의 병력만 탈 수 있는 1만 톤급 화물선이었지만, 그날은 무려 14,000여 명의 피난민이 승선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한 번에 구조한 해상 작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3일 동안 혹한 속을 항해했지만,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해 중에 5명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때가 크리스마스 절기였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라루 선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날 나는 군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사람을 살려라’는 강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 결정을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으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랑 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랑을 회복시켜서, 이 사랑으로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이 바로 그 사랑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율법의 조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용서하며, 섬깁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선장 레너드 라루처럼 매일 선택의 순간 앞에 섭니다. 오늘, 내 욕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이웃을 위한 사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자기 자신과 돈,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의 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명된, 영원하고 참된 사랑의 길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사랑의 길 위에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사랑을 잃은 세상 속에서 ‘사랑의 증인’이 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8월 17일
본문: 로마서 12:9–13
제목: 사랑의 길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서론: 저에게는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홈리스 피풀(노숙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붉은 신호등 아래에서 차가 멈춰 섰을 때 투명한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차창 밖에 낡은 푯말을 든 사람과 마주칩니다. 허름한 옷차림과 표정 없는 얼굴, 그리고 삐뚤빼뚤 적힌, ‘HELP ME!, 도와주세요!’라는 글귀가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연민과 함께 불편함,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만약 내가 돈을 준다면, 과연 이 돈이 그에게 정말 필요한 따뜻한 식사 한 끼가 될까? 아니면 혹시 마약이나 술을 사는 데 쓰이는 건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 선의와 현실적인 의심이 충돌합니다. 순수한 연민은 ‘도와줘야 해’라고 속삭이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신중해야 해’라고 경고합니다. 섣부른 도움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닌지, 선의가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나를 멈춰 세웁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깨닫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불편함과 갈등은 단순히 그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어쩌면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무기력함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 배후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고, 그 근원은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을 나눌 때에 우리는 가장 복스러운 충만을 누리게 되고,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것입니다. 그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고, 무슨 일든지 힘드는 줄도 모릅니다. 사는 것이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사람과의 사랑도 이럴진대 하나님 사랑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복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모든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 대신에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욕망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공허함을 결코 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로니한 것은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가 음악, SNS, 광고, 드라마 등등 어디에나 흘러 넘쳐 납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이 이렇게 많은 세상입니까? 아니면, 사랑이 없는 걸 숨기려고 더 많이 말하는 겁니까?” 우리는 가장 풍성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이 가장 메말라가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가지 말세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주님은 말세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4절에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되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 자신’, ‘돈’, ‘쾌락’이 올라앉았습니다. 사랑이 본래 자리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바울은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동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을 또 하나의 무거운 율법이나 규범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죄와 율법의 포로 상태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키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ㅊ우만한 삶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1.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9절)
9절,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이것은 ‘위선 없는, 꾸밈없는’이란 뜻으로 사랑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가면 쓰지 말라. 겉으로는 미소 짓고 ‘사랑합니다’ 말하지만, 속으로는 계산하거나 냉담한 마음을 품지 말라.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사랑하라.”
이어서 ‘악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몸서리칠 만큼 혐오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뱀을 발견했을 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독 있는 음식을 본능적으로 뱉어버리는 것처럼, 성도는 악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단호히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분의 분노는 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참된 사랑은 악을 보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맞서 싸우는 거룩한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할 때, 우리는 진정한 힘과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서로 존경하고 뜨겁게 섬기라 (10-11절)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도 바울은 사랑을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공동체적 실천으로 확장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모이는 집단이 아니라, 영적 가족입니다. 가족이니까 더 쉽게 상처 주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족은 서로 먼저 존경하고 섬기는 법을 배웁니다.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말씀은, 내가 존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먼저 존경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섬겨주는 분들에게 다가가 “집사님 권사님, 섬겨주신 덕분에 은혜롭게 예배를 마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먼저 존경을 표현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존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입니까? 사랑은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것을 넘어, 남을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이 사랑은 또한 ‘열심’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게으른 마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식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공동체 안에서 섬김이 버겁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잠시 멈추어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회복될 때,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도 다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기도하라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사랑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상처도 받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환난과 오해, 심지어 핍박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세 가지 영적 동력을 말합니다.
첫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이 세상의 상황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확증된 소망입니다.그리고 이 소망으로 우리는 즐거워 합니다.
둘째, 환난 중에 참으라.
인내란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바라보며 능동적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인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십니다.
셋째, 기도에 항상 힘쓰라.
사랑의 길에서 지칠 때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연료통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 없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랑은 무의미하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망이라는 씨앗을 인내로 지키고, 기도로 매일 물을 줄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메마른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4. 나누고 섬기며 대접하라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랑은 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필요를 채우고, 낯선 사람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질을 나눈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었습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교회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영국 웨일스 부흥 당시에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한 가난한 광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거의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느 날 굶주린 이웃을 보고, 자기 집에 있는 유일한 빵을 내어주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도 먹을 게 없는데 왜 주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는데, 내가 이 빵 하나 못 내어놓겠습니까?”
여러분, 최근에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것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미뤄두고 있습니까? 사랑은 계산하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돌아가셔서 작은 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바쁜 일과 중에도 병상에 있는 성도에게 5분만 전화해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전해 보십시오. 혼자 사는 이웃의 문 앞에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놓아두십시오. 성경 말씀 한 구절과 짧은 격려를 메시지로 보내 보십시오. 이런 작은 사랑이 모여, 주님의 큰 사랑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결론: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함경남도 흥남 지역까지 밀려났습니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혹독한 추위 속에 부두에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에 미 해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해 있었고, 선장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였습니다.
원래 이 배는 군수물자와 장비를 싣고 철수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두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 아이, 부녀자들이 끝없는 줄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우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따르면 저들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반면에 저들을 살리려면 상부의 명령을 거스리게 됩니다. 상부의 명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불명예스러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 갈등 속에서 그는 결국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군수물자를 전부 버려라. 대신 이 사람들을 태운다.” 그 순간, 배 안에 쌓여 있던 무기와 장비를 전부 바다에 던지고, 그 자리에 피난민들을 태웠습니다. 원래 60명 승무원과 12명의 병력만 탈 수 있는 1만 톤급 화물선이었지만, 그날은 무려 14,000여 명의 피난민이 승선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한 번에 구조한 해상 작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3일 동안 혹한 속을 항해했지만,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해 중에 5명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때가 크리스마스 절기였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라루 선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날 나는 군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사람을 살려라’는 강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 결정을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으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랑 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랑을 회복시켜서, 이 사랑으로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이 바로 그 사랑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율법의 조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용서하며, 섬깁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선장 레너드 라루처럼 매일 선택의 순간 앞에 섭니다. 오늘, 내 욕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이웃을 위한 사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자기 자신과 돈,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의 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명된, 영원하고 참된 사랑의 길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사랑의 길 위에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사랑을 잃은 세상 속에서 ‘사랑의 증인’이 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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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6mWW0YJYRo 238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