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드리는 예배 (08.03.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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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73회 작성일 Aug 04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8월 3일
본문: 로마서 12:1-2
제목: 삶으로 드리는 예배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배는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만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이 다소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1-2절은 어쩌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서 가운데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착하게 살아라'는 윤리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로 초대하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만나는 다음 주일까지,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선택과 결정,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긴 여정은 마치 죄와 구원, 은혜와 반응이 치밀하게 얽힌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율법으로 망하고, 이방사람들은 율법없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 11장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12장으로 넘어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이렇게 해라”라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순종하는 모든 동기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해서도 아니고, 어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몰랐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세상 모든 종교들과 구별됩니다. 세상 종교는 구원 받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내어 종교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받은 은혜로 부터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기꺼이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가 어떻게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세 가지 방향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바울 사도는 “마음을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헬라 철학의 영과 육의 이원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표현입니다. 헬라 철학은 영은 선하며 고귀하고, 물질에 속한 몸은 악하고 천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와 우리의 일상까지 포함하는 전인격적 예배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 에너지, 말, 행동, 가족 관계, 돈을 쓰는 방식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일 교회에 앉아 있는 1시간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모든 삶에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산 제물, 살아 있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 반드시 제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죄인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고, 그 피로 속죄받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히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죽어서 제물이 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제물이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맞춰 순종하는 삶입니다. 직장생활을 성실과 정직으로 하고, 가족 안에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도 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젊은 시절의 열정과 힘은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살아오며 얻은 지혜와 경험은 젊은 세대에게 귀한 조언이 되고,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힘든 육체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자녀와 손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 순간들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입니다. 여기서 ‘영적’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에 근거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충동이나 종교적 관습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에 대한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복음을 참되게 이해한 사람은 반드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가려면,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로마서 12:2)는 경고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구성된 세상의 가치관, 문화, 그리고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말합니다. “성공이 곧 존재의 이유다.” “쾌락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다.” “네가 먼저 잘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구호 아래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본받다’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틀에 맞추다’, ‘형틀에 끼워 넣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틀 속에 우리 삶 전체를 욱여 넣으라는 강요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틀은 곧, 무엇을 입어야 하고, 어디에 살아야 하며, 무엇을 가져야만 ‘성공한 인생’이라 말해주는 광고와 SNS의 끝없는 메시지들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메시지를 들여다보면, 결국 끊임없는 자기 자랑과 비교의 굴레에 불과합니다.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나만 빠지면 뒤쳐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체면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그 흐름을 따라갑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형틀에 나를 끼워 넣는 것이죠.
이러한 세상의 속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옵니다.
톰이 이모인 폴리 아주머니에게 벌로 담장 페인트칠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톰은 무료한 주말 아침, 드넓은 담장을 칠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신나게 놀고 있는데 자신만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그때 톰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바로 친구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벤 로저스가 나타나자 시큰둥한 표정으로 페인트칠에 몰두하는 척합니다. 벤이 “너 붙잡혀서 일하고 있냐?”고 놀리자, 톰은 오히려 “이건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허풍을 칩니다.
톰의 연기에 넘어간 벤은 점점 호기심을 느끼고, 톰에게 페인트칠을 한 번만 해보게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합니다. 톰은 처음에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며 거절하지만, 결국 벤이 가진 사과를 받는 대가로 붓을 넘겨줍니다.
이후 다른 친구들이 차례로 찾아오자, 톰은 똑같은 방식으로 담장 칠하는 일을 마치 ‘특권’처럼 포장합니다. 친구들은 구슬, 연, 심지어 죽은 쥐와 끈 조각 같은 자신들의 보물을 톰에게 바치고는 기꺼이 담장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톰은 힘들이지 않고 담장 전체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온갖 보물까지 얻게 됩니다.
이 유쾌한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줍니다. 세상은 본질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것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허상에 맞추도록 유혹하고 압박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포장된 페인트칠이라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의 형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고, 다르게 살아라!”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훨씬 더 크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세상의 틀에 맞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제국 한복판에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단 1:8). 그들은 단순히 바벨론 문화를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과 순결함이라는 더 깊은 가치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거룩한 대안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로 결단합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넣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고백 위에 주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영광이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산 제물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사도 바울은 부정적 권면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에 이어 긍정적 방향 전환을 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너희가 변화를 받아…”(2절)
여기서 ‘변화’는 마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마음의 새로움”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판단, 세계관 전체를 의미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 말씀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엡 4:23), 매일 말씀으로 우리의 의식구조, 사고체계를 갱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한때 복음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의 사고체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어느날 옥상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늘로 부터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보자기 안에는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이라고 명시하여,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라는 음성을 듣고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께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고, 마침내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이 새로워졌을 때, 그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새로움이 없었다면 행동의 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까지도 하나님 말씀으로 치유받고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무가치해’라는 세상의 거짓된 평가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라는 복음의 시선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받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즉, 우리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고 (선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기뻐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합니다 (온전하신). 이 분별력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과 거룩과 영광이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부끄러운 죄의 열매만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 의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갈 수록 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로마서 1-11장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었고, 이제 12장에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단순한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에 기초한,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 1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삶은 다시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 직장에서의 정직과 성실로,
• 가정에서의 섬김과 사랑으로,
• SNS에서의 말 한마디까지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 시간, 재정, 관계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산 제물로 내어 드리십시오. 그럴 때, 그 삶을 통해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날짜: 2025년 8월 3일
본문: 로마서 12:1-2
제목: 삶으로 드리는 예배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배는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만을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이 다소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1-2절은 어쩌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서 가운데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착하게 살아라'는 윤리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로 초대하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만나는 다음 주일까지,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선택과 결정,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긴 여정은 마치 죄와 구원, 은혜와 반응이 치밀하게 얽힌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율법으로 망하고, 이방사람들은 율법없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 11장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12장으로 넘어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이렇게 해라”라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순종하는 모든 동기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해서도 아니고, 어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을 몰랐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세상 모든 종교들과 구별됩니다. 세상 종교는 구원 받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내어 종교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받은 은혜로 부터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기꺼이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가 어떻게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세 가지 방향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바울 사도는 “마음을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헬라 철학의 영과 육의 이원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표현입니다. 헬라 철학은 영은 선하며 고귀하고, 물질에 속한 몸은 악하고 천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와 우리의 일상까지 포함하는 전인격적 예배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 에너지, 말, 행동, 가족 관계, 돈을 쓰는 방식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일 교회에 앉아 있는 1시간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모든 삶에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산 제물, 살아 있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 반드시 제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죄인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고, 그 피로 속죄받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히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죽어서 제물이 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제물이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맞춰 순종하는 삶입니다. 직장생활을 성실과 정직으로 하고, 가족 안에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도 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젊은 시절의 열정과 힘은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살아오며 얻은 지혜와 경험은 젊은 세대에게 귀한 조언이 되고,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힘든 육체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자녀와 손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 순간들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입니다. 여기서 ‘영적’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에 근거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충동이나 종교적 관습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에 대한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복음을 참되게 이해한 사람은 반드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가려면,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로마서 12:2)는 경고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구성된 세상의 가치관, 문화, 그리고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말합니다. “성공이 곧 존재의 이유다.” “쾌락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다.” “네가 먼저 잘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구호 아래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본받다’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틀에 맞추다’, ‘형틀에 끼워 넣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틀 속에 우리 삶 전체를 욱여 넣으라는 강요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틀은 곧, 무엇을 입어야 하고, 어디에 살아야 하며, 무엇을 가져야만 ‘성공한 인생’이라 말해주는 광고와 SNS의 끝없는 메시지들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메시지를 들여다보면, 결국 끊임없는 자기 자랑과 비교의 굴레에 불과합니다.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나만 빠지면 뒤쳐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체면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그 흐름을 따라갑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형틀에 나를 끼워 넣는 것이죠.
이러한 세상의 속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옵니다.
톰이 이모인 폴리 아주머니에게 벌로 담장 페인트칠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톰은 무료한 주말 아침, 드넓은 담장을 칠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신나게 놀고 있는데 자신만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그때 톰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바로 친구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벤 로저스가 나타나자 시큰둥한 표정으로 페인트칠에 몰두하는 척합니다. 벤이 “너 붙잡혀서 일하고 있냐?”고 놀리자, 톰은 오히려 “이건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허풍을 칩니다.
톰의 연기에 넘어간 벤은 점점 호기심을 느끼고, 톰에게 페인트칠을 한 번만 해보게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합니다. 톰은 처음에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며 거절하지만, 결국 벤이 가진 사과를 받는 대가로 붓을 넘겨줍니다.
이후 다른 친구들이 차례로 찾아오자, 톰은 똑같은 방식으로 담장 칠하는 일을 마치 ‘특권’처럼 포장합니다. 친구들은 구슬, 연, 심지어 죽은 쥐와 끈 조각 같은 자신들의 보물을 톰에게 바치고는 기꺼이 담장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톰은 힘들이지 않고 담장 전체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온갖 보물까지 얻게 됩니다.
이 유쾌한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줍니다. 세상은 본질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것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허상에 맞추도록 유혹하고 압박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포장된 페인트칠이라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의 형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고, 다르게 살아라!”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훨씬 더 크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세상의 틀에 맞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제국 한복판에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단 1:8). 그들은 단순히 바벨론 문화를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과 순결함이라는 더 깊은 가치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거룩한 대안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로 결단합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넣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고백 위에 주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영광이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산 제물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사도 바울은 부정적 권면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에 이어 긍정적 방향 전환을 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너희가 변화를 받아…”(2절)
여기서 ‘변화’는 마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마음의 새로움”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판단, 세계관 전체를 의미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 말씀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엡 4:23), 매일 말씀으로 우리의 의식구조, 사고체계를 갱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한때 복음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의 사고체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어느날 옥상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늘로 부터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보자기 안에는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이라고 명시하여,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라는 음성을 듣고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께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고, 마침내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이 새로워졌을 때, 그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새로움이 없었다면 행동의 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까지도 하나님 말씀으로 치유받고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무가치해’라는 세상의 거짓된 평가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라는 복음의 시선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받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즉, 우리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고 (선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기뻐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합니다 (온전하신). 이 분별력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과 거룩과 영광이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부끄러운 죄의 열매만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 의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갈 수록 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로마서 1-11장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었고, 이제 12장에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단순한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에 기초한,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 1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삶은 다시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 직장에서의 정직과 성실로,
• 가정에서의 섬김과 사랑으로,
• SNS에서의 말 한마디까지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 시간, 재정, 관계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산 제물로 내어 드리십시오. 그럴 때, 그 삶을 통해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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