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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접붙임을 통한 구원 역사 (07.13.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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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88회 작성일 Jul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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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7월 13일
본문: 로마서 11:11-24
제목: 접붙임을 통한 구원 역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1장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크고 광대하신 계획을 깨닫게 하는 위대한 본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축복이 도리어 방해가 되거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오늘 로마서 말씀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설과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졌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정말 버리신 것인가?” 아마도 이러한 질문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폐기되지 않으며, 그분의 구속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그분의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마치 나무가 베임을 당할지라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고, 그 죽은 듯 보이는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다시금 거대한 나무를 이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복과 소생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실상은 교만으로 인해 영적으로 우둔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심령을 혼미케 하셨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으며, 그들의 귀를 닫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에게 차려진 풍성한 축복의 밥상은 오히려 그들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었습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그 엄청난 축복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데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비극적인 역설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신 축복이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되었다니 말입니다. 마치 고가의 보석이나 자동차, 최신 스마트폰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적인 축복 역시 올바른 태도 없이는 오히려 영적 교만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모든 것의 끝이란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통해서, 구원의 문이 이방인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역설적인 은혜입니다. 어릴 적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래, 먹기 싫으면 관둬라. 이 밥은 앞집 철수에게 줘야겠다”라고 말하면, 아이는 시기가 나서 황급히 숟가락을 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을 허락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심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던 우리 이방인들이 바로 그 ‘앞집 철수’와 같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교만하여 그 축복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 축복이 우리에게로 넘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구원을 당연히  여기거나, 가볍게 여길 위험성이 있습니다. 은혜로 주어졌다고 싸구려 취급하는 위험성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은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겸손하지 않고 어찌 교만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이제 로마서 11장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절의 질문은 1절에서 제기했던 질문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거부로 인해 하나님의 보응을 받아 ‘넘어지기까지 실족했는가?’”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넘어져 실족하고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믿게 하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16절까지에서 유대인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겪는 세 가지 단계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1) 첫 번째 단계: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옴
이스라엘은 넘어졌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대다수는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습니다. 만약 그들 모두가 믿었다면, 초대교회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으로 쉽게 단정 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열심을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십시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 소아시아, 유럽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순환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 회당에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바울 일행은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 그러면 복음을 들은 유대인 회중은 둘로 나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소수와 적대적인 다수로 분열됩니다.
• 그 결과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다민족 교회가 됩니다.
만일 회당의 모든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다면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 내의 새로운 종파 정도로 치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 유대인들의 거부를 통해서 복음은 모든 민족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오히려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2) 두 번째 단계: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만듦
바울은 자신의 사역 목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14절). 이 ‘시기심’에 대해 존 스토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기술했습니다.

“본래 시기심은 ‘다른 사람이 소유한 어떤 것을 자신도 갖고 싶은 욕망’을 말합니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욕망하는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악하거나 다른 사람의 소유라서 가질 권리가 없다면 시기심은 죄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욕망하는 것이 선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복이라면 그것을 ‘탐내고’, 나아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시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방인들 때문에 시기심이 일어난 유대인들이 믿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약속들이 이방인들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시기하는 유대인들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3) 세 번째 단계: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올 것임
두 번째 단계에서 이스라엘의 시기심으로 그들 중 일부가 믿는 데 그쳤다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스라엘이 더 충만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12절의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는 말씀은, 이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확실하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범죄와 실패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는 더욱더 넘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25-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까지 구원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삶에서 겪는 실패나 좌절,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고 계실 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현재 내가 겪는 어려움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복의 디딤돌이 되거나, 나를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은 아닐까요? 그래서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을 신뢰하고, 나의 생각과 시야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 접붙여진 가지: 겸손과 경외함

이제 17,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우리 이방인들은 본래 돌감람나무 출신들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교만하여 그 자리를 내어줌으로 인해, 우리가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참 감람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액을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짐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들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뿌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힘써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20,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교만한 이스라엘을 꺾으신 하나님이시라면, 이방인인 우리도 얼마든지 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을 때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이방인들인 우리도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때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히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유럽이 복음을 일찍 받아들여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해져서 복음을 등한시했을 때, 축복의 촛대는 신대륙 미국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물줄기는 이제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도 보십시오. 본래 복음이 북한 땅에 먼저 들어왔고, 평양이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으로 북한의 신자들이 월남하면서 대한민국이 엄청난 영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교회가 교만해져서 흥청망청 죄를 짓고 축복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중국이나 북한으로 옮기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핍박 속에서 연단된 북한의 지하 교회 성도들이 마지막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항상 기존의 모임들이 느슨해지고 생명력을 상실할 때, 원 가지를 꺾으시고 돌감람나무들을 택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항상 깨어 기도하며, 겸손하게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 내적 태도: 나의 믿음, 은사, 봉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경건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교만의 덫에 걸린 것입니다.
• 언어 생활: 은혜를 받았음을 간증할 때조차도 내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언어를 사용합시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렇게 일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관계 속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격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섬기고 세우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20절 ‘도리어 두려워하라’는 것은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심과 권위를 인정하며 경외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나의 영적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혹시라도 안일함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집시다.

3.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2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인자하심’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인자하심과 더불어 준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준엄하심의 칼을 빼시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목이 곧아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며 복음을 영접하지 않자, 2차 세계대전 때 60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이스라엘은 중동의 화약고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은 결코 가볍게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 철저히 헌신했으니 말년에는 좀 여유 있게 지내도 될 것 같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도와서 구원해 놓고 자신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내적인 투쟁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4, 5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은 우리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이 정도쯤이야’하는 안일한 생각이나,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나약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습관이나 관계가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하고 돌이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육신과 옛 자아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 영적 투쟁은 게으름, 나태함, 육신의 정욕, 교만 등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모든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세워줌으로써 이 싸움을 지속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은혜를 붙들고 감사하며 영적 투쟁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되, 그분의 준엄하심을 기억하며 늘 깨어 기도합시다. 우리는 이 은혜를 영원히 누릴 자격이 없는 돌감람나무 가지였음을 잊지 말고, 우리를 접붙여 주신 참 감람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 시간 함께 잠시 눈을 감고 다음의 내용을 놓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 하나님, 저를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게 하소서.
• 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교만의 뿌리를 뽑아 주시고,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게 행하게 하소서.
• 주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동시에 기억하며, 거룩하고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소서.
• 초심을 잃지 않고, 처음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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