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를 통한 구원 역사 (07.06.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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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7월 6일
본문:로마서 11: 1-10
제목: 남은 자를 통한 구원 역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9장에서 11장으로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깊이 있는 가르침,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하시며,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책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불순종 때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1절에서 제기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수많은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스라엘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사도 바울은 단호히 외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1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다시 돌이키시는지, 그 신비로운 구원 계획을 펼쳐 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얼마나 심오하고 놀라운지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서 겸손해질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한때 세상의 쾌락만을 쫓던 젊은이가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 자리에서 참된 복음을 깨닫고,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헌신하여, 결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갈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구속 계획을 겸손히 배우며, 그 위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롬 11:1-4)
사도 바울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현실을 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확신에 찼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처럼 그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핵심 인물들도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이 진리를 확증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적이 없었으며, 항상 ‘남은 자(remnant)’들, 즉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남겨두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호하시며 보살펴 주십니다. 마치 농부가 다음 농사를 위해 가장 좋은 씨앗을 따로 남겨두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정 사람들을 남겨두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은 자’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다가 밤나무나 상수리나무처럼 베임을 당할지라도, 그루터기는 남아있고,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다시 큰 나무와 숲을 이룰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중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가 있었고, 이들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재건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는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 시대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아합 왕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거의 대부분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위협에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주님, 이제 제 목숨까지 찾으려 합니다.”고 절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 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엘리야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7천 명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은밀히 하나님께 충성하며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7천 명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남은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2. 남은 자의 길 (롬 11:5-6)
우리 역시 때때로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 직분을 받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열심히 전도해도 좀처럼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괜히 헛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감과 함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남겨 놓으신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래전 북한 선교를 위해 힘쓰시던 선교사님이 신분을 숨긴 채 북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어느날 평양 시내를 돌아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뭔가 그적거리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손을 빼려고 하니까 꽉 잡고 놓아주지 않더래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집중해 보니까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 큰 위험을 무릅쓰고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속한 계 모임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군대에도, 그리고 복음의 불모지와 같은 선교지에도,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남은 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얼마나 보배로운 존재들입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이들 가운데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거짓 가치관 속에서 영적인 순수함을 잃지 않고, ‘남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굳건히 서 있는 그루터기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이 속담처럼, 때로는 세상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보다,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남은 자’로 살아가는 길은 분명 외롭고 힘듭니다. 때로는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주변의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임마누엘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께서도 지극히 고독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하고 심정을 다해 도왔던 제자들이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갔고,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골고다 언덕 위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온몸이 찢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무도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마저도 잠시 동안 등을 돌리시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이요, 처절하고 처참한 고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골고다 언덕, 가장 높은 십자가 위에 홀로 남아 계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참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르는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예수님께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남은 자’의 삶은 힘들고 고독하지만,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그 ‘남은 자’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대열 속에 끼어 있음을 믿습니다. ‘남은 자’는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혼란스럽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남은 자’의 그루터기가 영광스럽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남은 자’가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보배로운 존재들인 줄 믿습니다.
5절과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남은 자’가 된 것,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훌륭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갈 데가 없어서,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남았습니다.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갈 데가 없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신 그분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가 말한 ‘오직 은혜’의 신앙 고백입니다.
3. 축복이 올무가 되다 (로마서 11:7-10)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오히려 올무가 된 안타까운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여기서 ‘남은 자’란 이전에 우리가 살펴본, 믿음을 지키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남은 자’와는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택함을 입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 즉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교만 때문에 영적으로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심령을 혼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귀가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닫혀 복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큰 축복의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과 선지자라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축복의 밥상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위한 축복의 밥상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습니다. 덫이 되어 걸려 넘어지는 함정이 되었습니다. 9절 말씀처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다윗은 시편 69편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런 저주가 임하기를 기도했는데,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적 성공과 물질 축복을 받은 뒤에 안일해져서 영적인 갈급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고 높은 자리에 세움 받은 뒤에 교만해져서 영적으로 쓸모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축복의 밥상이 올무가 됩니다. 덫이 되고 함정이 됩니다. 차라리 물질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일찍부터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밑바닥에서 겸손하게 배우고 성장하여 하나님께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축복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리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거침없이 잘 나가는 것, 만사형통이 오히려 영적인 함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자기가 잘나서 된 줄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우리는 내가 택함 받은 것도 은혜요, '남은 자' 된 것도 은혜요,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은혜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과 은혜의 고백입니까!
어느 날 성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시대의 성자이십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며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고, 가장 미련하고, 가장 죄악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셨다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바로 저 사람이다. 바로 저 사람을 통해서 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던 걸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이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교만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까지 오직 주님만 붙들고 신앙을 지켜 오신 여러분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특히 코비드 팬데믹 때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새벽마다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무릎 꿇은 기도가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품에 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우리는 ‘남은 자’로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은혜로 택함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남겨두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세상의 갖은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나이 지긋한 노년층은 마지막 순간 천국에 입성하기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새 역사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 속에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합시다. 이 외롭고 때로는 힘든 길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임을 확신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미련하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지혜롭고 보배로운 존재인 우리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끝까지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실 영광스러운 새 역사를 기대하며 나아갑시다. 아멘.
날짜: 2025년 7월 6일
본문:로마서 11: 1-10
제목: 남은 자를 통한 구원 역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9장에서 11장으로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깊이 있는 가르침,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하시며,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책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불순종 때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1절에서 제기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수많은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스라엘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사도 바울은 단호히 외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1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다시 돌이키시는지, 그 신비로운 구원 계획을 펼쳐 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얼마나 심오하고 놀라운지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서 겸손해질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한때 세상의 쾌락만을 쫓던 젊은이가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 자리에서 참된 복음을 깨닫고,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헌신하여, 결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갈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구속 계획을 겸손히 배우며, 그 위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롬 11:1-4)
사도 바울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현실을 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확신에 찼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처럼 그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핵심 인물들도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이 진리를 확증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적이 없었으며, 항상 ‘남은 자(remnant)’들, 즉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남겨두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호하시며 보살펴 주십니다. 마치 농부가 다음 농사를 위해 가장 좋은 씨앗을 따로 남겨두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정 사람들을 남겨두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은 자’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다가 밤나무나 상수리나무처럼 베임을 당할지라도, 그루터기는 남아있고,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다시 큰 나무와 숲을 이룰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중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가 있었고, 이들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재건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는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 시대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아합 왕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거의 대부분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위협에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주님, 이제 제 목숨까지 찾으려 합니다.”고 절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 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엘리야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7천 명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은밀히 하나님께 충성하며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7천 명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남은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2. 남은 자의 길 (롬 11:5-6)
우리 역시 때때로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 직분을 받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열심히 전도해도 좀처럼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괜히 헛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감과 함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남겨 놓으신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래전 북한 선교를 위해 힘쓰시던 선교사님이 신분을 숨긴 채 북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어느날 평양 시내를 돌아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뭔가 그적거리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손을 빼려고 하니까 꽉 잡고 놓아주지 않더래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집중해 보니까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 큰 위험을 무릅쓰고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속한 계 모임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군대에도, 그리고 복음의 불모지와 같은 선교지에도,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남은 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얼마나 보배로운 존재들입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이들 가운데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거짓 가치관 속에서 영적인 순수함을 잃지 않고, ‘남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굳건히 서 있는 그루터기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이 속담처럼, 때로는 세상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보다,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남은 자’로 살아가는 길은 분명 외롭고 힘듭니다. 때로는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주변의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임마누엘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께서도 지극히 고독하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하고 심정을 다해 도왔던 제자들이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갔고,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골고다 언덕 위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온몸이 찢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무도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마저도 잠시 동안 등을 돌리시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이요, 처절하고 처참한 고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골고다 언덕, 가장 높은 십자가 위에 홀로 남아 계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참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르는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예수님께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남은 자’의 삶은 힘들고 고독하지만,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그 ‘남은 자’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대열 속에 끼어 있음을 믿습니다. ‘남은 자’는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혼란스럽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남은 자’의 그루터기가 영광스럽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남은 자’가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보배로운 존재들인 줄 믿습니다.
5절과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남은 자’가 된 것,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훌륭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갈 데가 없어서,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남았습니다.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갈 데가 없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신 그분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가 말한 ‘오직 은혜’의 신앙 고백입니다.
3. 축복이 올무가 되다 (로마서 11:7-10)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오히려 올무가 된 안타까운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여기서 ‘남은 자’란 이전에 우리가 살펴본, 믿음을 지키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남은 자’와는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택함을 입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 즉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교만 때문에 영적으로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심령을 혼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귀가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닫혀 복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큰 축복의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과 선지자라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축복의 밥상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위한 축복의 밥상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습니다. 덫이 되어 걸려 넘어지는 함정이 되었습니다. 9절 말씀처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다윗은 시편 69편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런 저주가 임하기를 기도했는데,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적 성공과 물질 축복을 받은 뒤에 안일해져서 영적인 갈급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고 높은 자리에 세움 받은 뒤에 교만해져서 영적으로 쓸모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축복의 밥상이 올무가 됩니다. 덫이 되고 함정이 됩니다. 차라리 물질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일찍부터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밑바닥에서 겸손하게 배우고 성장하여 하나님께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축복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리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거침없이 잘 나가는 것, 만사형통이 오히려 영적인 함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자기가 잘나서 된 줄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우리는 내가 택함 받은 것도 은혜요, '남은 자' 된 것도 은혜요,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은혜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과 은혜의 고백입니까!
어느 날 성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시대의 성자이십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며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고, 가장 미련하고, 가장 죄악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셨다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바로 저 사람이다. 바로 저 사람을 통해서 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던 걸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이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교만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까지 오직 주님만 붙들고 신앙을 지켜 오신 여러분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특히 코비드 팬데믹 때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새벽마다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무릎 꿇은 기도가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품에 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우리는 ‘남은 자’로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은혜로 택함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남겨두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세상의 갖은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나이 지긋한 노년층은 마지막 순간 천국에 입성하기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새 역사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 속에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합시다. 이 외롭고 때로는 힘든 길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임을 확신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미련하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지혜롭고 보배로운 존재인 우리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끝까지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실 영광스러운 새 역사를 기대하며 나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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