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복음 전도자의 발 (06.22.2025)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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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복음 전도자의 발 (06.22.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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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93회 작성일 Jun 23 2025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6월 22일
본문: 로마서 10:1-21
제목: 아름다운 복음 전도자의 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언가를 위해 열심을 냅니다. 미물조차 생존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를 보세요. 작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기 위해 숨소리마저 죽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금살금 접근합니다. 사정권 안에 들어서는 순간, 전력을 다해 질주하여 사슴을 쓰러뜨리고,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지 않습니까? 그들의 열심은 오직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선 다른 것을 위해 열심을 냅니다. 직업과 사업을 통한 재물 축적, 자녀 교육,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 취미 생활, 예술, 학문, 혹은 세상의 재미와 쾌락 등등 사람마다 열정을 쏟는 방향이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의 열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발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같은 발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발이 향하는 곳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와 쾌락을 향해 바삐 움직입니다. 유흥업소를 드나들고, 도박장에 가고, 나이트클럽에서 스텝을 밟을 때 그 발을 사용합니다. 이런 발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발들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발이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물질을 희생하며,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발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은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인가에 대해 심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의 열심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 (로마서 10:1-8)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선택을 명확히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무한한 긍휼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진술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에 달려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 10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앞에서 우리 인간의 책임 있는 응답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본문 10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애썼어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에 따라 불을 켜거나 끄지 않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호텔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가 각 층마다 멈추고, 자동적으로 문이 열리고 닫힙니다. 사람이 버튼을 누르면 노동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런 열심이 참된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유전(遺傳)을 좇은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의미 없는 열심, 즉 자기 의(自己義)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 볼까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그 율법의 마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율법의 결정체가 되시기에,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그 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열심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계명을 좀 잘 지켰다고, 신앙생활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고, 교회 봉사에 좀 더 헌신한다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교만을 떨겠습니까?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독선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에서 실패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에 관해 6절과 7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고 했고, 또 음부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고 한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구원자를 만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늘과 땅속을 탐험하며 찾고, 온갖 수양과 고행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종교심이 가득하여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수로 하늘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수 있으며, 땅 속 깊은 곳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먼저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우리가 수고할 것은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예수께서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구원 (로마서 10:9-13)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입술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우리의 마음에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9-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은 아주 쉽고 분명합니다. 13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쉽고 단순해서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갖가지 고행과 수행을 거치거나, 종교적 행위와 선행을 많이 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만큼 노력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런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고백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를 믿고, 그분을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외모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 행적이 심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이었다 할지라도 마음에서 부터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누구나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입술로 이를 고백하게 됩니다(9절). 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어떤 분은 자신은 마음으로 믿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를 쓰기 때문에, 기도도 할 필요가 없고, 신앙고백이나 찬송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제자들에게 분명한 신앙고백을 시키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때 베드로가 힘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셔서 이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천국의 문을 열고 영원한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총기를 난사하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사단 숭배자들인 그들은 여학생 케시 버넬에게 총기를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을 믿느냐?” 그때 케시는 주저 없이 “Yes!”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이 땅에서의 삶은 마감하였지만,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 세상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행위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의 증표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3. 아름다운 발 (로마서 10:14-22)

로마서 10장 14절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에게 중요한 책임을 일깨워줍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어서 바울은 복음 전파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구약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될 유다 백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포로 생활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오는 전령을 가리킵니다. 오랜 압제와 절망 속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는 그 발걸음은, 그 소식 자체가 너무나 감격적이고 희망적이기에 비유적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가 가져오는 소식의 영광과 그로 인한 해방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사역을 이사야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로 해석합니다. 구약의 전령이 육체적인 포로 해방의 소식을 가져왔다면, 신약의 복음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구원이라는 최고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인류에게 달려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망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소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생명의 복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들은 너무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열왕기하 7장 3-16절에 기록된 놀라운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둘기 똥을 비싼 값에 사고, 심지어 자녀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성문 밖에 사회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성 안에서도 굶어 죽는 판이니, 이들의 상황은 더 말할 나위 없었지요. 이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우리가 여기서 죽을 바에야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자”하며 아람 진영으로 향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절망적인 선택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람 군대에 병거와 말소리, 큰 군대 소리를 들리게 하셨습니다.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 왕이 헷 사람의 왕들과 이집트 왕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을 치러 온 것으로 착각하여 혼비백산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남긴 진영에는 음식, 물자, 은금, 의복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문둥병자들은 먹고 마시며 전리품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놀라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우리가 내일까지 지체하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열왕기하 7:9)

이 말은 단순히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이 죄악임을 깨닫는 고백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경험하고, 그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자발적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이들은 제사장도, 왕도, 선지자도 아닌 무명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그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처럼 예수님도 아름다운 발로 우리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 물든 발걸음이었습니다. 물질과 세상 잔재미를 좇아 살려 했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영생의 삶을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며, 죄의 종이 되어 죽음으로 향하던 우리의 발걸음을,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사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음을 들은 우리는 어떤 발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합니다. 과거 누군가의 아름다운 발걸음 덕분에,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이웃들 중에는 여전히 죄와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창한 선교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현재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입술로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요즘은 발로 걷기보다 손끝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카톡이나 메시지로 말씀이, 누군가에겐 복음을 향한 아름다운 발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시지, 혹은 매일 묵상하는 짧은 말씀 구절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  직장 동료의 어려움을 함께 공감하고 기도해 주는 것,
•  이웃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며 복음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  목장 모임에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는 것,
•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위해 정기적으로 후원하거나 중보 기도하는 것,

이 모든 작은 발걸음들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복음 전도자의 발이 되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들려져야 합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통해 여러분은 복음을 들었고, 이제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누군가에게 복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발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과 죄와 쾌락을 좇는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의 발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여러분의 발걸음을 옮겨 보십시오. 여러분의 발이 닿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발걸음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발걸음을 내딛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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