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2) (06.15.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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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18회 작성일 Jun 16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6월 15일
본문: 로마서 9:19–33
제목: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2)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크신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진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셨다면,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긍휼히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에게 죄를 묻는 것이 정당한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물음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관통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신다는데 만약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건가요? 그게 공정한가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건 내가 결심해서 그런 건데, 하나님이 나를 미리 선택하셨기에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나의 자유 의지는 어디로 갔죠?”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신다는 말이 너무 차갑고 불공평해 보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심과 사랑의 본체이시며,
• 동시에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보다 더 크신 분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내 이성과 판단보다 더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서운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주권자입니다. 그분의 계획 안에는 실수도 없고, 편견도 없으며, 오직 의로움과 깊은 자비만이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신발을 벗듯이,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크심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진리 안에서 더 충만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도공이신 하나님 (롬 9:20–21)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기에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실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이 선택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 어떤 행위와 자격이 개입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잘못을 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롬 9:19)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표현합니다(21절).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이라도 어떤 것은 장식으로 쓰일 멋진 화병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일상에서 편하게 쓸 물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항의하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하고 따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의 진술이 매우 권위적이고 공격적이어서 현대인들의 귀에 거칠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문화는 “내가 주인이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는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 자신이 내 인생과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중심성, 즉 죄의 본질이자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대적합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 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물질이나 조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전능성을 보여줍니다.
•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십니다.
•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 호엡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출 3:14)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외부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최근 인공지능이나 ChatGPT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존하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램화 된 결과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와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빚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지 꼭두각시에 불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함께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두 진리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함께 조화롭게 역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주권 아래에서 인간의 책임이 유효하게 작동합니다.
• 요셉의 이야기: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악한 의도로 이집트에 팔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마저도 선으로 바꾸셔서 훗날 야곱 가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창 50:20).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된 책임과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봅니다.
• 사울과 다윗의 연단: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다윗을 극심하게 미워하고 핍박했지만,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해서 다윗을 연단하시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선택과 책임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마치 커다란 강물이 흐르지만, 그 강물 속에서 작은 배들이 자신의 노를 저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2. 진노와 긍휼의 그릇 (롬 9:22–24)
이어서 사도 바울은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22-23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해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권능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진노를 받아 멸망해야 할 사람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왕의 예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려 봅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바로 자신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완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이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출 9:16). 바로는 분명 진노의 그릇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을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바로에게 더 기회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의 고집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인지, 그리고 사랑으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마치 밤하늘에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더 밝게 빛나듯이, 바로의 완고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다고 말씀합니다(23절). 여기서 '긍휼의 그릇'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수없이 원망하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지난 인생 중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수가 많았습니까? 하나님 보다 세상을 선택하고,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을 좇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기다려 주셨지요. 오늘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도 그분의 자비하심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못마땅해서 ‘왜 나를 구원하여 주셨냐’고 하나님께 항의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가슴 벅찬 감격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재난, 그리고 온갖 불의와 불공평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며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복잡한 논쟁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단순하고 위대한 말씀 앞에 ‘아멘’라고 응답하면 됩니다.
3. 걸림돌과 반석 (롬 9:25–33)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구약 예언자 호세아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은 25절, “내 백성이 아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시고, 사랑하지 않던 자를 사랑한 자라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모든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모두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27절).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원은 자격 있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일지라도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자격, 성과, 경쟁 중심 사회입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가 의에 이르는 계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거침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십니다. 그 반석 위에 서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33절).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주권과 따뜻한 긍휼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거대한 신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큰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모든 삶이 나의 연약한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완전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고, 세상의 불공정함 속에서 좌절할 때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시며, 그 반석 위에 선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 됩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평안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날짜: 2025년 6월 15일
본문: 로마서 9:19–33
제목: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2)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크신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진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셨다면,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긍휼히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에게 죄를 묻는 것이 정당한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물음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관통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신다는데 만약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건가요? 그게 공정한가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건 내가 결심해서 그런 건데, 하나님이 나를 미리 선택하셨기에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나의 자유 의지는 어디로 갔죠?”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신다는 말이 너무 차갑고 불공평해 보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심과 사랑의 본체이시며,
• 동시에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보다 더 크신 분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내 이성과 판단보다 더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서운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주권자입니다. 그분의 계획 안에는 실수도 없고, 편견도 없으며, 오직 의로움과 깊은 자비만이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신발을 벗듯이,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크심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진리 안에서 더 충만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도공이신 하나님 (롬 9:20–21)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기에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실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이 선택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 어떤 행위와 자격이 개입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잘못을 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롬 9:19)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표현합니다(21절).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이라도 어떤 것은 장식으로 쓰일 멋진 화병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일상에서 편하게 쓸 물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항의하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하고 따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의 진술이 매우 권위적이고 공격적이어서 현대인들의 귀에 거칠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문화는 “내가 주인이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는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 자신이 내 인생과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중심성, 즉 죄의 본질이자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대적합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 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물질이나 조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전능성을 보여줍니다.
•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십니다.
•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 호엡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출 3:14)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외부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최근 인공지능이나 ChatGPT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존하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램화 된 결과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존재와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빚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지 꼭두각시에 불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함께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두 진리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함께 조화롭게 역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주권 아래에서 인간의 책임이 유효하게 작동합니다.
• 요셉의 이야기: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악한 의도로 이집트에 팔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마저도 선으로 바꾸셔서 훗날 야곱 가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창 50:20).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된 책임과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봅니다.
• 사울과 다윗의 연단: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다윗을 극심하게 미워하고 핍박했지만,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해서 다윗을 연단하시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선택과 책임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마치 커다란 강물이 흐르지만, 그 강물 속에서 작은 배들이 자신의 노를 저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2. 진노와 긍휼의 그릇 (롬 9:22–24)
이어서 사도 바울은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22-23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해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권능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진노를 받아 멸망해야 할 사람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왕의 예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려 봅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바로 자신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완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이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출 9:16). 바로는 분명 진노의 그릇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을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바로에게 더 기회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의 고집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인지, 그리고 사랑으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마치 밤하늘에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더 밝게 빛나듯이, 바로의 완고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다고 말씀합니다(23절). 여기서 '긍휼의 그릇'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수없이 원망하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지난 인생 중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수가 많았습니까? 하나님 보다 세상을 선택하고,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을 좇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기다려 주셨지요. 오늘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도 그분의 자비하심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못마땅해서 ‘왜 나를 구원하여 주셨냐’고 하나님께 항의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가슴 벅찬 감격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재난, 그리고 온갖 불의와 불공평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며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복잡한 논쟁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단순하고 위대한 말씀 앞에 ‘아멘’라고 응답하면 됩니다.
3. 걸림돌과 반석 (롬 9:25–33)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구약 예언자 호세아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은 25절, “내 백성이 아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시고, 사랑하지 않던 자를 사랑한 자라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모든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모두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27절).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원은 자격 있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일지라도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자격, 성과, 경쟁 중심 사회입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가 의에 이르는 계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거침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십니다. 그 반석 위에 서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33절).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주권과 따뜻한 긍휼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거대한 신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큰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모든 삶이 나의 연약한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완전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고, 세상의 불공정함 속에서 좌절할 때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시며, 그 반석 위에 선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 됩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평안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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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iY8hM68lWs 280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