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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들어야 할 복음 (03.12.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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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59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3월 12일
*제목: 다시 들어야 할 복음
*본문: 로마서 1: 8-17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1:8-17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칠십 평생 이 소원을 위해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 소원을 달성하려고 사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얼마나 숙연해집니까! 얼마나 간절한 소원입니까? 이 소원을 위해서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기까지 혼신의 다해 싸웠고, 온갖 고초를 감내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소원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갈망하며 소원하는 한 가지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어떻게 하든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로마에 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고 노력했지만 이 로마서를 쓸 때까지 여러가지 이유로 로마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에 가려는 그의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로마에 가려는 열망이 강렬했을까요? 물론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 수도라서 인생의 기회를 삼으려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곳에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목회자의 야망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복음에 대해서 문외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이미 복음을 믿은 성도들을 통해서 로마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로마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행 2:10), 그들이 로마에 돌아와 교회를 세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은 사도 바울의 귀에 까지 들려왔습니다. (8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라’ 그들의 신앙적 열심과 열정은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그들이 이해하는 복음의 수준은 그리 깊거나 넓지 못했을 것입니다. 체계적으로 복음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로마서에 기록된 내용처럼 하나님의 복음의 부요함과 장엄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갈 위험성이 있었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서 외부로 부터 핍박에 대해 대단히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에게도 다시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로마서를 다시 공부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받고서 뜨거웠던 흥분과 감격은 이제 많이 식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습관화되었고, 형식적인 종교적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얼마나 매혹적이고 화려합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고, 타협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거룩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점점 지루하고, 귀찮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집니다. 어느덧 영생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복음에 대한 열정도 식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생기와 활력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도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해 줍니다.

1.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 첫째는 견고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세워 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열하고, 그리고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서 나열하는 성령의 ‘은사’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성령님의 주권적 권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나눠 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교회는 견고하게 서기는 커녕 분쟁과 분란을 비롯해서 많은 문제점이 돌출했던 교회였던 점을 감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단어를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줄 가르침과 권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한 경륜이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밝혀졌는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런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에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복음의 내용을 요약해서 로마서, 즉 로마에 보낸 편지에 담아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넷풀릭스의 다큐 “나는 신이다(In the Name of God)”를 보고 공분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교주들의 막무가내 행태에 분통이 터지고, 이런 자들이 이렇게 활개치도록 방치한 사회 조직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그리고 이미 듣고 보아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쉬쉬하며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지금도 피해자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며 합리화 시키는 동조자들의 더럽고 구역질나는 작태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런데 이 다큐를 보면서 복음이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 인생을 완전히 망가지게 만들고, 가정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줍니다. 이제 이단 교주들의 악함을 본 세상 사람들은 아예 종교자체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서슴치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방송으로 이단들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런데 이로 인해서 복음 전파 또한 크게 타격을 받고 위축될 것이라서 염려가 됩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이 복되고, 그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거짓 복음은 사람들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삶 자체가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눈물이 많은 사랑의 사도이었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주 강경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말합니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온갖 이단의 거짓 가르침들이 횡행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부터 오는 환란과 시련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복음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의 신앙은 견고하게 섰습니다. (살전 1:5-6)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비록 신앙이 어리고 약했지만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환란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진정성 있게 전파할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능력과 확신으로 크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었고, 그들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환란을 만났을 때 복음으로 인해 견고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 견고하게 하다는 헬라어로 ‘스테리조’인데 우리말로 ‘강하게 하다’ ‘확고부동하게 고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견고하게 하다’ 이 말을 영어로 ‘be strong’으로 번역이 되지만 또 ‘be established(설립하다)’로도 번역됩니다. 이것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담고 있는 단어로써 로마교회 한 성도 성도가 견고히 서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로마교회 공동체가 견고히 서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한 개인 그리스도인이 견고하게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견고하게 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으로 견고히 서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견고하게 서도록 잡아주고 있습니까? 또 우리 공동체 교회는 어떻습니까?

초대 교회는 단순하고 평범하고 학식이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을 지켜 줄 힘이나 군대도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박해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음에는 강력한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그들 중 다수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3세기 동안에 발생한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곳저곳으로 내몰렸으며 대규모의 학살을 당했습니다. 교회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갖가지 방법과 힘으로, 때로는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지난날 교회 역사의 기록을 읽어본다면 성도들이 원형극장에 던져져 짐승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 화형에 처해지고, 동굴과 바위 틈으로 쫓겨다닌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 철학과 동방 종교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잠입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질식시키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타락한 로마 카톨릭의 교황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근세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뿌리채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속주의, 물신주의, 쾌락주의가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이 노골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복음이 교회에 의해서 여전히 순수한 형태로 계승되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왜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까요? 복음으로 인해 견고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 또한 복음의 역사로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2.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안위함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12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 나오는 ‘안위함’을 영어 성경에는 ‘comforted’로 ‘위로하다’ ‘격려하다’으로 되어있는데 지금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가 필요하기에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피차”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이 격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앞절에서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내가 사도로서 너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준다’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다”라고 바로 잡아줍니다. 사도인 바울도 너희 믿음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믿음 있는 교회였습니다. 로마교회의 믿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멀리서 전해 듣고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대한 소문으로 사도 바울도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아,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 정말 역사하는구나, 이 일이 결코 헛되지 않는구나, 역시 복음이 변화를 일으키는구나’라는 생각에 그는 힘을 얻습니다. 사실 그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주님으로 인해 심한 고난을 받았는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고백을 할까요? 그런데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위로하셨을까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속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기 때문입니다.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결국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인해 우리가 확신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확신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위로를 받고, 이제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됩니다(고후 1:4).

우리 모두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복음의 안위자, 복음의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성도들 간에 서로 복음으로 격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열매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왜 그럴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한 삶 것입니다. 농부의 얼굴이 죽을 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수할 때 거둘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신령한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괜히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 신경질내고 짜증내지 마십시오. 열매 맺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복음이 열매를 맺게 합니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극상품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기름진 가나안땅에 흙을 파서 돌을 제하고 품질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파서 좋은 포도열매 맺기를 바라셨습니다(사 5:2). 그런데 그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예레미야 2: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타락을 다음과 같이 책망합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즉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들 포도나무, 병든 포도나무, 실패한 포도나무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인생을 창조하실 때도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거룩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포도나무들로 지으셔서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병든 나무, 쓸모 없는 나무, 타락한 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극상품의 열매들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가 없으시고, 이 세상 죄악된 것들로 오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로 좋은 열매들을 맺게 하실 수 있는 참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그러면 이미 죄로 오염되고 병들고 타락한 우리들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가지인 우리가 접붙인바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열매는 내가 열심히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갈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이 열매 맺는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은 나찌의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36년 나찌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 집시, 반체제인사들, 전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용소에는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도 있었습니다. 반체제인사들도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비좁은 독방의 창문에는 나무 가리개가 덮여 있어 수감자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감방 창문 바로 옆에는 고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동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똑같은 아픔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지금도 그 독방에는 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246;ller) 목사의 초상화도 걸려 있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찌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가 나찌 친위대의 감방에 유폐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독방에 걸린 그의 사진을 보면 귀에 익숙한 한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듯 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여러분, 이렇게 복음을 위해 산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찬송가의 가사에 은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도록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견고하게 서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위안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열매를 맺도록 할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이 다시금 성령의 불방망이가 되어서 우리 시대에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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