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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03.19.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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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39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3월 19일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본문: 로마서 1: 16-17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1:16-17

서론: 고대로 부터 근대까지는 ‘신분의 시대’라고 한다면 오늘날 현대를 가리켜서 ‘실력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분의 시대’에는 한 개인의 역량이나 실력 보다도 그의 가문과 집안 배경, 즉 신분이 더 중요시 되고, 그 역할이 컸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출신배경 보다도 그 사람의 실력이 더 중요시 됩니다. 요즘은 마치 돈을 많이 벌어서 호화롭게 사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인 양 그 의미가 변질되었지만 본래 ‘아메리칸 드림’이란 과거 구대륙,즉 유럽 사회에서의 모든 신분과 배경을 배제하고,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오로지 한 개인의 능력과 실력, 그리고 열정과 노력으로 성취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실력이란 능력, 힘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먼저 ‘무력’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현대식 무기, 우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전쟁에서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최첨단 과학과 기술을 사용하여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사일과 드론이 날아가서 정확하게 목표지점에서 터집니다. 무력의 힘, 과학과 기술의 힘, 이 모든 것이 실력입니다.

또 ‘경제’라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무력보다도 더 큰 힘이 경제력입니다. 돈이 있어야 최첨단 무기를 개발시킬 수 있어요. 군사력도 경제적으로 뒤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제력만 가지고도 않됩니다. ‘도덕’의 힘이 필요해요. 도덕성이 없이는 경제나 기술이나 무력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왜 공산세계가 무너졌습니까? 근본 원인은 인간성이 무너지고, 도덕성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공산체제가 결국 게으른 백성을 만들어 냈고, 거짓말하는 백성을 만들어 냈고, 무책임한 백성을 만들어 냈어요. 그래서 외부의 침공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로 무너진 것입니다. 대부분 독재국가는 권력자의 부정부패가 심하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견고한 나라를 건설하려면 도덕성이 건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외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이렇게 외칠 때 로마는 참으로 당당한 위풍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자랑할 것이 많은 도시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건축, 학문 등 모든 것이 집중되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그 당시에 로마는 오늘날 민주국가처럼 나름대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는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어떤 나라도 맞싸울 수 없는 무적의 군대였습니다. 자연히 정복한 국가로부터 온갖 물품들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전세계의 엄청난 부가 이 도시국가에 집중된 것입니다. 그 부로 콜로세움과 같은 큰 건축물들을 세웠습니다. 학문과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세계 최초 성문법을 만들어 법률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로마는 그대로 세계의 축도”라고 말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을 종횡으로 달리는 300개의 주요 도로가 다 로마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로마제국 앞에 한 초라한 사람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전하려고 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제국의 변방, 이름조차도 생소한 팔레스타인의 촌구석에서 학자나 철학자도 아닌, 일개 무명의 목수, 그것도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한 한 죄수를 전하는 이 복음은 화려하고 웅장한 로마제국 앞에서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까?

원래 십자가란 예수님 이전에는 로마사람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자들을 처형하던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진 십자가는 고통과 치욕의 상징이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3을 보세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표적을 찾고, 지혜를 찾고, 지식을 찾고, 학문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놀라운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이 보다 더 귀한 보배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가장 처절한 패배와 무능력의 상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자를,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에 의해 처형된 '죄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우리들의 구원자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철인이나 영웅호걸이기는 커녕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 받은 구원자에게서 마땅히 기상천외의 이적이나 경천동지의 기적을 기대하는 종교인들(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 또는 구원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모순을 넘어서 '걸림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구약 신명기 21:23에 기록된 것처럼 나무에 달려 죽는 십자가형을 하나님의 저주의 표징으로 이해하였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걸림돌'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십자가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고 걸림돌이 됩니다. 2,000년 전 로마에 의해 처형 당한 죄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처형 당한 십자가가 무슨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겠습니까? 그들이게 복음은 수치요 무능이요 실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복음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에게는 위대한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올바른 인생길에 대하여 좋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가르침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석가는 “네 구원은 네가 이루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묻는 제자에게 “이 세상의 일도 다 알지 모르거든 저 세상의 일을 어떻게 알랴”하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담대히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 떡을 먹고, 이 음료는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바울이 살았던 시대 이전에 이미 그 나름대로 위대한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늘날 철학은 그때 그들의 세운 심오한 사상과 철학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상과 철학의 종국은 미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공부할 수록 더 오리무중인 게 철학입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독일 철학자 헤겔이란 사람이 모든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철학가가 꼬집어 말하기를 ‘그가 화려한 집을 지어놓았지만 정작 본인 자신도 들어가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내 존재 전부를 던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알고 있어요. 그것이 내 영혼을 구원해 주는 진리가 아니다는 걸.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상과 철학과 종교는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조차 20세기 최대의 실험을 했지만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시도가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은 이 모든 난제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방편은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방식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 아들이 우리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 부터 마지막 까지 믿음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함이나 의로움, 수행이나 고행 등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 자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입니다. 왜 다른 길은 안 됩니까? 그만큼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대야에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죄에 무죄하다’고 말했지만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하고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아무리 손을 뽀득뽀득 문질러도 그 손에는 여전히 무죄한 자의 흘린 피가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 몸을 괴롭히며 고행을 해도 우리의 양심은 여전히 우리를 고발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한 번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 일생 동안 죄의 종노릇하다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구원함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용서함이 있습니다. 구원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방편입니다.

2.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복음만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능력이라는 말은 그 당시 로마에서 흔히 쓰던 말입니다. 고대 그리이스 도시 아테네가 지혜를 자랑하였다면 로마는 능력을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로마제국은 힘을 추구하고, 그 능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나라입니다. 그런 로마를 향하여 복음은 능력 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화와 학문, 다수의 우상들, 강력한 제국주의 힘과 군사력, 잘 닦아진 도로 길과 국가를 다스리는 법전 등은 로마가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과연 로마인들의 삶을 변화 시켰습니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들은 부유했습니다. 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교양이 있었습니다. 삶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은 어떻습니까? 칭찬할 만합니까?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그들은 저급한 동물의 수준까지 내려갔습니다. (롬 1:26-31)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온갖 추악한 죄악들이 그들의 삶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만하니까 방탕한 삶으로 줄달음쳐 버렸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인간은 늘 고상한 삶을 쟁취하고자 힘껏 노력하였지만 언제나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능력도 인간을 조금도 고상하게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알았던 복음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사울이 바울 된 것처럼 그의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곤고한 그 영혼에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에 죄를 이기는 승리가 있었고, 승리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이미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로마인들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바울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실용적인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로마인들에게 오히려 자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복음만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실용적입니다. 체면이나 명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내게 어떤 유익이 되느냐를 따집니다. 그런데 복음은 굉장히 실제적이며 실용적입니다. 우선 복음은 우리가 무슨 중한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진단합니다. 그리고 복음만이 그 치명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인생의 비참과 허무, 그리고 실패의 원인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원천적으로 죄라고 성경은 제시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죄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은 결코 성공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난 삶에는 방황과 저주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인간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어둠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빛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거절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 자신 스스로 변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더 교양을 쌓고, 더 지식을 쌓으면 달라질까요? 더 쾌적한 환경에 살도록 삶을 개선시키면 그 인생이 그만큼 깨끗해집니까? 고상한 인격과 인품이 나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가 발달하면 할수록 더 고상하게 악해지고, 더 교양 있게 추악해 질 따름입니다.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매혹적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말이 번지르르해도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해결책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을 주는 능력, 변화시키는 능력이지 구원에 관한 무슨 개념이나 교리, 혹 신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인격, 하나님의 아들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를 믿으면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웃과 원수를 맺던 삶이 변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능력이 크신 분이십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의 권세를 꺾어 버리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원수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과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세 번째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첫째로 유대인을 위하여, 둘째로 헬라인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은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하였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외칩니다. 그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행 2:38).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행 2:39). 어떤 특정의 영적 엘리트 계층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거나 고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냐는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는 지혜로운 자나 무지한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모두 다 죄에 관해서는 절망적이고도 무능하며, 꼭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나는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시인하면,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가 용서받습니다. 죄가 개입하여 뒤틀려 버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적인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십니다.

결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었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구원을 얻었다면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한 강도는 한 평생을 엉망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십자가형으로 죽음의 종말을 맞이할 만큼 그는 비참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겸손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하는 말 한 마디에 주님은 그가 낙원에 들어갈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 한마디가 저주의 인생, 실패의 인생을 축복과 성공의 인생으로 바꾸었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획득하여 인생의 목표를 다 이루었다고 해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 못하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지금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과연 그렇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은 후에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신앙의 끝이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인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내일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 부터 멸망으로 부터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어떤 사람은 늙어서, 그러나 그러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구원 문제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이 은혜 받는 날입니다. 오늘이 구원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시고 지금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내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내 심령에 모시고, 그 분께 내 인생을 다스리도록 맡겨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의심하지 마십시오. 체험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받은 증표로 성령으로 인쳐 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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