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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이란 (03.05.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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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17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3월 5일
*제목: 복음이란 (로마서강해 1)
*본문: 로마서 1: 1-7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1:1-7

서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상전 밑에서 종노릇하며 살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돈 때문에 그렇지 직장에서도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 심리가 그렇습니다. 모처럼 무얼해 보려고 마음 먹었는데 누가 그거 하라고 시키면 괜히 심술이 나서 하기 싫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주도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만만치 않아서 그걸 다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얻어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제한을 그만큼 많이 받습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 되면 내가 주도해서 더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억만장자는 보통 사람들의 희망사항에 해당되는 것을 쉽사리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휴양지로 몰디브나 보라보라 섬을 최고로 꼽지만 여행비가 비싸고, 시간을 내지 못해서 실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억만장자는 자가비행기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즉각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만큼 자기주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주도로 산다고 하면 다 행복이 보장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가 누린 부귀영화는 끝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쪽 방면에서는 솔로몬 그러면 알아주지 않습니까? 그는 토목공사를 많이 해보았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7년, 자기를 위해서 궁을 짓는데 13년, 그 정원에는 진기한 화초,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방패를 전부 금으로 만들고, 그의 보좌는 상아로 만든 보좌는 정금을 입혔습니다. 그 보좌 앞에는 여섯 층계가 있는데 그 좌우편에는 사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칠백 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들을 거느렸습니다. 화려함의 극치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그가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전 1:2-3)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아무리 자기주도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결국 모든 인생은 허무와 절망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결말에 이르기 전에도 우리 마음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가지 법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7장21절입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여기서 바울이 득도를 했습니다. 그 도가 무엇입니까? 선과 악이 자기 속에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을 그렇게 구분합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그런데 겉모습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마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착하고 선한줄 알았는데 시커먼 죄 문제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두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도 착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 안에 무서운 미움과 증오심, 혈기와 정욕, 거짓과 위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에 스스로도 놀라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던가!

바울도 7장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롬 7:22-23)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누가 이깁니까? 죄가 이깁니다.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강한지 나를 꽁꽁 묶어서 악의 수렁으로 밀쳐 넣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얼마나 끈질지고 집요한지 모릅니다. 옛날 시골에서 모 심을 때 보면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습니다. 그 거머리를 아무리 잡아 뜯어도 또 달라붙고 또 달라 붙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그렇게 강합니다. 우리는 이 거머리와 같은 죄성과 싸워 봅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바울은 번번이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바라볼 때에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 자신이 얼마나 죄의 소욕 앞에 연약한 자인가? 유혹 앞에 무력한 존재인가? 처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의지가 없습니다. 내 안에는 거룩하게 살 힘도 경건하게 살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본다면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가? 나는 얼마나 탐욕스런 죄인인가? 나는 얼마나 거짓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철학과 종교는 결국 짙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배경으로 체념 내지는 금욕주의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오늘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인간의 온갖 불의와 부정, 추악과 비열함, 악독과 저주, 호색과 음란, 거짓과 사기, 누추함과 더러움, 살인과 폭력의 뉴스입니다. 천재지변과 인재로 인한 재난 소식입니다. 그런데 좋은 뉴스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로마서 1장 서두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복된 소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나쁜 소식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복음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이란 신분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1세기 전 조선시대 만해도 양반, 중인, 상인, 천민 4계급으로 분류되었고, 천민의 대부분은 노비를 말하는 것으로, 노비는 보통 재산으로 취급되어서 매매나 상속 그리고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는 고등 짐승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성장했던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종의 신분으로 내려갔다는 것 자체만 해도 로마서신서를 받아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스스로 자유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기꺼이 종이 되었을까?”라고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자랑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그의 말대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왕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존경받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열심으로는 이단으로 여겨진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설 정도였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배신한 이단 괴수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핍박하던 예수가 실상 영광의 하나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자랑거리, 육체적인 자랑거리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그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 한 분만을 자랑하는 참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apostolos)는 ‘보내심을 받은 자’, ‘위임을 받아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사절, 대사, 특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 보냄을 받은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 이방 세계를 복음화 하라고 주님에게 신임장과 임무를 위임 받아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사도 바울이 12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기에 그의 사도권의 정통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부터가 아닌, 그리스도로 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택정함을 입었다’로 해석된 아포리조(aforizo)는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두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 스스로가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바울을 복음을 위한 사도로 따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불러주셨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로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러 다닌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먼저 주님의 자녀로서 따로 세워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르심을 무시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을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한 번은 돌로 맞았습니다. 수많은 여행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추위와 싸웠습니다. 더위와 싸웠습니다.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른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것은 하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까? 도대체 그가 전파하는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복음의 기원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정성과 가치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믿어야 하는지, 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왜 복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선지자를 통해 이미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때가 되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 복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 복음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하시는 부분에서 나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복음이기에 원시복음(Protevangelium)이라고 부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사단과 죄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종말론적 심판을 선언하시고, 이 심판의 선언 속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여인의 후손, 메시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도구로 쓰여진 뱀에게 저주하시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도 여자 후손과 원수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원수 마귀 사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의 사건은 도리어 사단의 머리를 박살해 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비유했어요. 낚시 바늘에 달린 미끼를 보고 먹으려다 그만 낚시 바늘에 꿰어서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사단도 예수만 죽이면 끝나는 줄로 알고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에 그만 박살이 났어요. 아무리 퍼득럭거리며 거려도 낚시 바늘에 꿰어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마귀도 온 세상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이미 승부는 끝난 것에요.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메시아를 약속해주셨고, 그분이 하실 일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이후 구약의 모든 초점은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로 맞춰졌습니다.

2. 복음의 내용

그래서 복음이 무엇이냐, 한 마디로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4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우리는 복음이 기쁘고 좋은 소식이니까 우리 인생의 꿈과 희망에 관한 소식으로 받아드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일차적으로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과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아들’에 대해서 말하면 육신으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약속입니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가져오리라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수에 대한 소망 또한 헛된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극적인 반전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죽으신 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복된 소식, 복음이 됩니까? 하나님 아들이신 그분이 이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그 자체로 사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죄로 부터 구속함을 받습니다.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 복음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되심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기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복음’(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좋은 전령’(good herald)입니다. 그당시 1세기 경,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전령’을 보내어 자신의 승리와 통치권, 그리고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마디로 선언이자 선포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소식, 그것도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복음’이라는 단어를 가져와서 진짜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며 진정한 주가 되심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거짓 왕들은 왕 되신 예수님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리스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그분을 “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즉 바울은 내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로마교회 성도들이 믿는 예수님이며,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교회 성도들과 오늘 우리 모두에게 그분이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복음의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요청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순종입니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는 NIV성경으로는 ‘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로 번역했습니다. 순종은 믿음으로부터 파생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 곧 믿음에서 순종이 나옵니다. 순종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한 또 다른 조건으로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자연히 그분께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상황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한다면 올바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세상적인 방법에 더 의지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거부한다면 올바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믿는 사람의 계속적인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순종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의 열매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별개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 되시기에 그분을 향한 믿음과 그분이 원하시는 순종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곧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최종적 목적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는데 있을까요? 아닙니다. 복음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5절,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그분의 영광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도록 돕는 일, 복음을 가르치는 일, 내 삶에 복음을 적용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일, 이 모든 일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하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충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6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그들도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처럼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이름을 위해, 그분을 높이기 위해, 그 영광을 위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도전은 또한 우리를 향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너희도”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복음을 위해 삽니다. 복음을 받은 자로서, 복음을 믿는 자로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입술로, 나의 삶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에게 주어진 축복은 7절에도 나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드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립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별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결론: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다시 복음으로 나오십시오. 다시 복음으로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복음으로 내 삶을 점검하시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다시 복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다시 복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십시오. 다시 복음으로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사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 영광을 위하여, 다시 복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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