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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라 (04.27.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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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5회 작성일 Ap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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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4월 27일
본문: 마가복음 16:14-20
제목: 복음을 전파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과학 이전 시대에 인간의 필요에서 비롯된 산물로 여깁니다. 자연재해나 재앙이 사회, 국가, 가정, 개인에게 찾아올 때 인간은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력함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렇게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과학과 학문이 발전하여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고, 재난을 어느 정도 예측하여 통제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의 필요성과 역할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가르침 역시 점점 더 평가절하되거나 무시되기 쉬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특히 현대 과학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과학의 성과에 대해 우리는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탐구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나 도덕적 가치, 그리고 영적 실재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랑, 정의, 아름다움, 의미, 그리고 신앙을 과학적 실험이나 공식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이나 실험 결과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경청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절대화하여 성경적 진리마저 부정하는 것은 인간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유한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제한적이고, 또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감정, 자기 논리를 절대화하여,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인 양, 모든 세계와 실재를 꿰뚫어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모순투성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큰소릴 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 몸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이 우주의 비밀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한계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복음을 조롱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초기 기독교인들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부활은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부활의 증거에 대해 진지하게 조사해 본 적도 없이 미리 결론부터 내려 버린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 증언 문헌, 복음서를 한 번도 정직하게 연구하거나, 초대 교회의 목숨 건 신앙 고백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입니다.

1.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를 드러내 주는 시금석과도 같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알고자하는 구도자인지, 아니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할 때 물었던 것처럼,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밥 먹여 주냐?”는 식으로, 경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에게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 사건에 대해 아무 질문 없이 수용하거나, 부활 사건이 주는 의미를 숙고해 본 적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할 때마다 왜 이리 강조되어야 하는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별로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무너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합니다.

(고전 15:5-8)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사도 바울은 단호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 헛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14절)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으니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15절)
-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7절)
- 이미 죽은 자들은 그대로 망하였을 것이고 (18절)
-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절)

즉,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도, 우리의 신앙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활 신앙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고난을 견디는 실제적 힘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잔혹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신 때문에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불에 타 죽고, 사자의 밥이 되고, 검에 베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력 앞에 무릎을 꿇고, 밀라노 칙령(AD 313)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됩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을 이긴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디게 하고,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줍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줍니다. 부활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심장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2. 부활을 부정하는 제자들

참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놀라운 부활 사건이 처음에 제자들 조차 믿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 “내가 죽은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고하신 것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누구보다 더 열광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랐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들은 즉각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자리에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7)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할 정도로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의학적 상식으로는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럴지라도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일을 목격했던 자들입니다. 금방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주님이 살리셨어요. 죽어서 상여에 실려 나가는 나인성 과부 아들을 살리셨어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어요. 이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은 한사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신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그들을 일깨우셨습니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3.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제자들이 완강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을 믿지 못하게 하는 뭔가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제자들이 부활을 한사코 믿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출발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데 왜 그토록 참혹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 했는지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전제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아는 승리자여야 하고, 고난 받아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던 생각은 메시아가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 로마 군대를 이겨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압제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고, 부요하고, 정의로운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왕국에서 자기들이 크게 한자리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그들은 서로 ‘누가 큰 자냐’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미 ‘메시아는 이래야 된다’는, 자신들만의 메시아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속에는 메시아가 무력하게 체포되어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고정관념과 생각에 꽉 붙잡혀 있으니까, 주님이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받고 죽는다. 그리고 3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예고하셔도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말의 의미를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그 길을 가로막기 까지 했습니다. “주여, 그러시면 안됩니다” “메시아이신 주님이 왜 고난 당하셔야 합니까?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눈 앞에서 예수님은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을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철저한 패배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절망입니다. ‘결국 예수님도 우리처럼 별다른 게 없구나. 그래서 힘없이 당하셨구나!’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한 무슨 기대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이것을 예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주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진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구약성경이 예고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무력하게 붙잡혀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제자들은 이런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릴 수도 없었기에, 부활 또한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내게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까? 어디에서 문제가 있을까요?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는 우리 인생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죄를 범하면 죄 값을 치뤄야 하는데, 그 죄 값이 사망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모든 인생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화려한 세상의 뒷면에는 죽음의 증상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어느 시대보다 풍성하고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좀 더 가까이 들여보면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해서 좋은 줄 알았는데 대기오염, 물 오염, 오존층 파괴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AI 로봇이 우리 인류 문명 자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 도덕적 타락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온갖 더럽고 추한 일들이 공공연한 장소에서 벌어지고, 거짓말이 진실을 덮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덕적 기준이 무너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은 갈수록 식어가고 난폭해져가고 있습니다. 곳곳에 폭력과 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종교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이 세상이 그만큼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상들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고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고 기침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질병, 악, 미움과 증오, 악한 사회 제도로부터 시작해서 가난과 굶주림, 악한 권력으로부터 압제, 전쟁과 미움과 증오, 이런 모든 비참함은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상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왕 노릇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죽음의 권세가 깨졌어요. 그래서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며 종노릇하고 있었던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 아래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4.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또한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함을 받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생명을 확실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예수의 생명을 힘 있게 나타내고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그토록 사랑했는데도 다 도망갔던,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해도 한사코 믿지 않으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확신한 후에는 온 세계에 흩어져서 끝까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다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이 증거를 위해 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어요. 온몸의 껍질이 벗겨지거나, 불 속에 던져져서 죽었습니다. 혹은 사자의 입에 물려서 죽어갔어요. 그러면서도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비록 갈릴리의 단순한 어부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역사적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는 결코 어떤 사상이나 철학에 의한 것이 아니예요. 이들을 변화시킨 것은 오직 한 가지 ‘부활의 사실’ ‘예수님이 진실로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그들의 삶을 뒤집었습니다.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온 생애를 바쳐 이 소식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복된 소식이 전파되었어요.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제자 됨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심판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표적’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입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이는 단지 상징적인 언어가 아니라, 실제로 구체적으로 성취된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귀신을 내쫓았고(행 8:7),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해방시켰습니다(행 16:18).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으며(행 2:4), 고넬료 집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임했습니다(행 10:46).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은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 해도 입지 않은 사건으로 성취됩니다(행 28:3–6).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사례입니다.
마지막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는 일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계속됩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고쳤고(행 3:6–8), 바울은 병든 자들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행 28:8–9). 이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치유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나타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할 때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이 능력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좌절과 낙심에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미움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마음속의 정죄의식에서 해방되고 죄의 유혹과 충동을 이겨낼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현재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가정과 사회,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러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됩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동료 중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고, 담대함을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둘째, 삶으로 증거하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힘을 가지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생명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대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의 향기가 흘러가게 하십시오.

셋째, 간증을 나누십시오. 거창한 말이나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를 짧고, 솔직하게 나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진심 어린 고백이 가장 강력한 복음의 통로입니다.

넷째, 복음 초청을 하십시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신도 예수님을 믿어 보시겠습니까?" "함께 교회에 가보지 않겠습니까?"라고 초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순종입니다.

다섯째, 포기하지 마십시오.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의 씨앗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전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오늘, 그리고 이번 주에 꼭 한 사람에게라도 전해 보십시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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