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옛사람 (04.13.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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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8회 작성일 Apr 14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4월 13일
본문: 로마서 6: 3-11
제목: 십자가와 옛사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강남 서초동의 어느 고급 주택가에서,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주위를 살피더니 집 담장을 넘어 사다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는 CCTV의 각도까지 미리 돌려놓고, 불 꺼진 빈집으로 들어갑니다. 다행히 이웃의 신고로 현장 출동한 경찰은 그를 체포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한 때 ‘대도 홍길동’이라 불리던 조세형이었습니다.
그는 1970-1980년대 부유층과 유력인사의 집만 골라 털렀던 전설적인 도둑이었습니다. 그는 절도 중에도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철칙이 있었죠.
15년간 수감생활한 후에 출소한 그는 회심했다고 알려졌고, 크리스천이 되어 여러 교회에서 이곳저곳 많이 초청 받아 간증하는 인기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일본에서 또다시 빈집을 털다 경찰에 붙잡히는 아주 충격적인 뉴스를 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75살. 30년간 절도 행각을 벌인 그는 이미 전과 10범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심하신 것인지, 아닌지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과 깊이 뿌리내린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생긴 것이겠지요. 성경에도 “ 표범이 그 반점을 없앨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져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의 결심을 번번히 무산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복음은 이런 인간의 내면의 현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복음은 단지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그치는가? 아니면, 그 죄를 이기고 변화되는 능력까지 약속하는가?”
지난 시간 우리는 ‘십자가와 죄 사함'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가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았습니다(벧전 1:18–19). 이는 우리가 믿든지 거부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죄의 권능과 싸워야 합니다. 죄의 형벌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세력, 죄의 권세,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옛사람’의 정체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의 절반만 적용하는 셈이 됩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에서 신음합니다. 고쳐지지 않는 성격, 끊어지지 않는 습관, 부정한 생각과 감정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분명 우리의 죄를 용서하였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죄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묶인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로마서 6장 3-11절에서 말하는 ‘옛사람’의 실체와,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 삶 속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단번에 처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복음의 전인적 능력을 다시 한번 붙드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죄의 권능과 옛사람
죄가 단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대처하며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권능이 작용합니다. 때로는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세상 유혹과 마귀의 궤계와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치열하고 끈질긴 싸움은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바로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기에 더 어렵고 더 오래 지속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의 본성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죄는 바로 이 부패한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유혹이 오면, 우리 안의 죄성이 자동으로 반응하여 순식간에 죄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교만이 있을 때, 외부에서 교만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은 곧 입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질투가 있을 때, 어느날 우리보다 더 잘나가는 동료나 친구를 보게 되면 질투의 감정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입술로 시기 질투의 말이 쏟아집니다. 또 우리 안에 혈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때 혈기가 끓어올라 포악스럽게 성깔을 드러내며 행패를 부립니다. 탐욕, 음욕, 자랑,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자극은 단지 기폭제일 뿐, 본질은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타락한 본성을 ‘육신’(flesh) 또는 ‘옛사람’(old self)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며, ‘옛사람’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을 뜻합니다.” 때로는 ‘자아’(self)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옛사람은 결코 고쳐지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교정하거나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 옛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자기중심적입니다. 옛사람은 늘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자유하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부패와 거짓과 허위 위에 삶의 기반을 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성향이 우리 영적 생활에 최고의 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입니다. (롬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요. 무슨 뜻일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죄를 짓게 만들고, 결국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 자아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자아는 단순한 결심이나 수행과 고행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금욕적으로 고행을 해도, 아무로 고달픈 수행을 단행해도 이 자아라는 것은 비가 오면 다시 무성해 지는 잡초처럼 불쑥 불쑥 솟구쳐 오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입니다. 뿌리채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나 중심적으로, 내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옛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속을 만큼 우리 안에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자기 의와 탐욕, 그리고 정욕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위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학자,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상 자기들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을 처형하고 있는 유대 군중 속에 우리들도 함께 공범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2. 옛사람을 처리하는 십자가
성경은 우리의 옛사람이 보혈로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옛사람은 고칠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든지 육입니다(요 3:6).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다룰 수 있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로마서 6장6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옛사람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로마서 6:4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세례가 상징하는 깊은 영적 실재를 보여줍니다. 세례는 우리가 옛사람으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도구였던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지시나 명령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죄가 유혹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죄를 용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 속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삽니다. 자아가 죽어야 예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3. 믿음으로 죽고, 믿음으로 사는 삶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로 누릴 수 있을까요? 그 길은 바로 ‘믿음’입니다.
로마서 6:11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고 번역된 이 헬라어 ‘로기조마이’는 회계 용어로 ‘계산하다’, ‘간주하다’, ‘확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 나는 안 바뀌어, 나는 늘 이 모양이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옛사람은 죽었고, 하나님 앞에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자다.” 이 믿음의 고백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경험은 종종 이 진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죄가 솟구치고, 감정은 흔들리고, 실패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상심하고 좌절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체념합니다. 더 이상 믿음의 싸움을 싸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은 내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믿음으로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더 정확한 고백은 이렇습니다. “나는 본래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여김받은 자이며,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죄를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내가 죄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는 삶입니다.
결론:
오늘 이 예배에 나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죄 된 마음이 권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선포하십시오. “나의 옛 사람은 죽었다! 나의 옛 성품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 매일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이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마귀는 계속 여러분을 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에 대해 죽고, 죄의 세력으로 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십시오. 이전에는 죄가 왕노릇하였으나, 이제는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용서, 섬김, 겸손, 선한 행실 등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크게 한 방에 하려고 하지 마시고, 오늘 이 시간 부터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실천하십시오. 인생이 씁쓸하다고 인상 쓰지 말고 표정을 밝게 바꾸십시오. 따듯한 미소로 사람을 맞이하십시오. 모든 이에게 친절을 베풀되, 특히 나이 많아 거동이 불편한 분에게는 더욱 인내하며 친철하십시오.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에게 도울 일이 있는지 살피십시오.
십자가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초대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의 종으로 살라고.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라고.
성도 여러분은 이 부르심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날짜: 2025년 4월 13일
본문: 로마서 6: 3-11
제목: 십자가와 옛사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강남 서초동의 어느 고급 주택가에서,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주위를 살피더니 집 담장을 넘어 사다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는 CCTV의 각도까지 미리 돌려놓고, 불 꺼진 빈집으로 들어갑니다. 다행히 이웃의 신고로 현장 출동한 경찰은 그를 체포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한 때 ‘대도 홍길동’이라 불리던 조세형이었습니다.
그는 1970-1980년대 부유층과 유력인사의 집만 골라 털렀던 전설적인 도둑이었습니다. 그는 절도 중에도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철칙이 있었죠.
15년간 수감생활한 후에 출소한 그는 회심했다고 알려졌고, 크리스천이 되어 여러 교회에서 이곳저곳 많이 초청 받아 간증하는 인기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일본에서 또다시 빈집을 털다 경찰에 붙잡히는 아주 충격적인 뉴스를 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75살. 30년간 절도 행각을 벌인 그는 이미 전과 10범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심하신 것인지, 아닌지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과 깊이 뿌리내린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생긴 것이겠지요. 성경에도 “ 표범이 그 반점을 없앨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져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의 결심을 번번히 무산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복음은 이런 인간의 내면의 현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복음은 단지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그치는가? 아니면, 그 죄를 이기고 변화되는 능력까지 약속하는가?”
지난 시간 우리는 ‘십자가와 죄 사함'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죄 사함의 유일한 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가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았습니다(벧전 1:18–19). 이는 우리가 믿든지 거부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죄의 권능과 싸워야 합니다. 죄의 형벌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세력, 죄의 권세,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옛사람’의 정체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의 절반만 적용하는 셈이 됩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굴레 속에서 신음합니다. 고쳐지지 않는 성격, 끊어지지 않는 습관, 부정한 생각과 감정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분명 우리의 죄를 용서하였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죄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묶인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로마서 6장 3-11절에서 말하는 ‘옛사람’의 실체와,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 삶 속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단번에 처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복음의 전인적 능력을 다시 한번 붙드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죄의 권능과 옛사람
죄가 단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대처하며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권능이 작용합니다. 때로는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세상 유혹과 마귀의 궤계와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치열하고 끈질긴 싸움은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바로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기에 더 어렵고 더 오래 지속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의 본성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죄는 바로 이 부패한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유혹이 오면, 우리 안의 죄성이 자동으로 반응하여 순식간에 죄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교만이 있을 때, 외부에서 교만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은 곧 입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질투가 있을 때, 어느날 우리보다 더 잘나가는 동료나 친구를 보게 되면 질투의 감정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입술로 시기 질투의 말이 쏟아집니다. 또 우리 안에 혈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때 혈기가 끓어올라 포악스럽게 성깔을 드러내며 행패를 부립니다. 탐욕, 음욕, 자랑,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자극은 단지 기폭제일 뿐, 본질은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타락한 본성을 ‘육신’(flesh) 또는 ‘옛사람’(old self)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며, ‘옛사람’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을 뜻합니다.” 때로는 ‘자아’(self)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옛사람은 결코 고쳐지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교정하거나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 옛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자기중심적입니다. 옛사람은 늘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자유하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부패와 거짓과 허위 위에 삶의 기반을 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패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성향이 우리 영적 생활에 최고의 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입니다. (롬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요. 무슨 뜻일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죄를 짓게 만들고, 결국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 자아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자아는 단순한 결심이나 수행과 고행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금욕적으로 고행을 해도, 아무로 고달픈 수행을 단행해도 이 자아라는 것은 비가 오면 다시 무성해 지는 잡초처럼 불쑥 불쑥 솟구쳐 오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입니다. 뿌리채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나 중심적으로, 내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옛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속을 만큼 우리 안에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자기 의와 탐욕, 그리고 정욕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위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학자,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상 자기들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을 처형하고 있는 유대 군중 속에 우리들도 함께 공범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2. 옛사람을 처리하는 십자가
성경은 우리의 옛사람이 보혈로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옛사람은 고칠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든지 육입니다(요 3:6).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다룰 수 있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로마서 6장6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옛사람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로마서 6:4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세례가 상징하는 깊은 영적 실재를 보여줍니다. 세례는 우리가 옛사람으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도구였던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지시나 명령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죄가 유혹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죄를 용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 속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삽니다. 자아가 죽어야 예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3. 믿음으로 죽고, 믿음으로 사는 삶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로 누릴 수 있을까요? 그 길은 바로 ‘믿음’입니다.
로마서 6:11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고 번역된 이 헬라어 ‘로기조마이’는 회계 용어로 ‘계산하다’, ‘간주하다’, ‘확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 나는 안 바뀌어, 나는 늘 이 모양이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옛사람은 죽었고, 하나님 앞에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자다.” 이 믿음의 고백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경험은 종종 이 진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죄가 솟구치고, 감정은 흔들리고, 실패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상심하고 좌절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체념합니다. 더 이상 믿음의 싸움을 싸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은 내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믿음으로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더 정확한 고백은 이렇습니다. “나는 본래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여김받은 자이며,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죄를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내가 죄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는 삶입니다.
결론:
오늘 이 예배에 나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죄 된 마음이 권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선포하십시오. “나의 옛 사람은 죽었다! 나의 옛 성품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 매일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이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마귀는 계속 여러분을 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에 대해 죽고, 죄의 세력으로 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십시오. 이전에는 죄가 왕노릇하였으나, 이제는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용서, 섬김, 겸손, 선한 행실 등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크게 한 방에 하려고 하지 마시고, 오늘 이 시간 부터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실천하십시오. 인생이 씁쓸하다고 인상 쓰지 말고 표정을 밝게 바꾸십시오. 따듯한 미소로 사람을 맞이하십시오. 모든 이에게 친절을 베풀되, 특히 나이 많아 거동이 불편한 분에게는 더욱 인내하며 친철하십시오.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에게 도울 일이 있는지 살피십시오.
십자가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초대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의 종으로 살라고.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라고.
성도 여러분은 이 부르심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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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nyddByR0dY 31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