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죄 사함 (04.06.2025)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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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와 죄 사함 (04.06.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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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36회 작성일 Apr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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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4월 6일
본문: 마태복음 26:26-28
제목: 십자가와 죄 사함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묻고 또 물어왔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부터, 무엇 때문에 인생의 불행이 시작되고 고통을 겪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동서양의 주요 종교들은 이 고통의 문제를 각기 다르게 바라봅니다.

먼저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집착’에서 찾습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말합니다. “삶은 고해(苦海)와 같다." 인생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뿌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그것을 가지려 하다가 실망하고, 잃으면 슬퍼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 모순이 바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 욕망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수행을 통해 해탈과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교는 인간의 불행을 인간 관계의 어그러짐에서 온다고 봅니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친구와 친구 사이의 도리가 깨지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그 혼란 속에서 개인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의예지’는 단지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기 위한 삶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로 보되,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한 인간적 성숙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그 순서대로 불행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 수신(修身): 개인이 스스로를 수양하여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 제가(齊家): 가정을 바르게 세우고 윤리적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 치국(治國): 국가가 도덕과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 평천하(平天下): 사회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즉,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조화가 고통의 해결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알라 신에 대한 무지 혹은 불순종’이라고 봅니다. 고통이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신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훈련의 장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때때로 알라를 잊고, 교만하고,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결과로 삶이 어그러지고, 사회는 병들며,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에 있습니다. 이슬람은 ‘복종’을 의미합니다. 전적인 복종, 즉 알라의 뜻에 순복하여 따르는 삶을 통해서 인간은 평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인간은 고통이라는 현실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창조된 에덴에는 고통과 비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기를 원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죄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에서 맛보고 있는 불행과 고통의 원인은 외적인 조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인간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착하게 양심적으로 살아도, 아무리 수양하며 노력해도 죄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위해 길을 여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한, 여러분을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방식입니다. 여기에 기쁨과 감사, 평안과 만족, 영생과 구원과 천국의 복을 누리는 길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진 죄 사함의 은총에 대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 두 가지 죄책감

죄는 종종 외부로 부터 오는 종종 달콤한 유혹으로 시작됩니다. 찰라의 쾌락과 이익을 약속하며 조용히 다가옵니다. 이에 대한 죄의 충동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여서 부지불식간에 죄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죄가 마음에 남기는 얼룩이며,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입니다.

죄책감은 마치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형벌과도 같습니다. 아무도 꾸짖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듭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며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서 죄책감은 우리를 내면의 감옥에 가둡니다. 겉으론 웃고 살아가도, 마음속엔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죄책감은 관계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자각은 자책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게 됩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점점 고립감을 키우고, 이는 우울과 절망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죄책감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숨었던 것처럼, 사람은 죄를 지은 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교회에 가기 꺼려지고, 성경을 펼치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부르시는데, 죄책감은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죄와 죄책감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비참하게 만드는 깊은 영적 문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양심을 심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마치 자동차의 운전석 앞에 있는 계기판과도 같습니다. 자동차의 기계 작동에 문제가 생기면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켜집니다. 지금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죠. 위험 신호로 경고판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지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속히 문제를 대처해서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책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이것을 올바르게 다루면 영적으로 큰 유익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죄책감을 근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을 대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건강한 죄책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로 인도합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고 맹세하며 호언장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 당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자 다른 제자들처럼 그도 도망치고 맙니다. 가까스로 용기를 되찾아 대제사장 뜰 안까지 들어갔지만 세 번이나‘나는 그를 모른다’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합니다. 이렇게 실패했던 베드로이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은 사도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그의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은 그를 회개와 용서와 구원과 성숙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반면에 세상 근심은 병든 죄책감입니다. 병든 죄책감은 우리를 정죄의식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병든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로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자기의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은전 30을 받고 관원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께서 심문 당하시는 것을 보고 그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습니다. 받았던 돈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하였습니다. 유다는 그 돈을 성소 안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형벌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집착했습니다. 자신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후회와 죄책감과 절망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가면 용서하고, 받아주실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앞에 회개와 용서와 소망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멸망에 던졌습니다. 병든 죄책감은 이렇게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려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 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스스로 정죄하고 자학합니다. 그래서 삶의 활력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무력감과 무기력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병든 죄책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 정죄의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세인들이 정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세계는 온갖 탐욕과 정욕과 악독으로 가득했습니다. 이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회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었야 하는데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인정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는 아주 경건한 척했습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기둥은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참지 못하여 정죄했습니다. 사랑에 근거한 용서와 용납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고집합니다. ㅇ런 정죄의식은 자신과 이웃을 괴롭게 합니다.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결국 자신도 이웃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든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십자가의 복음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받아 누려야 합니다.

2. 옛 언약과 새 언약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26절)고 하십니다. 또 잔을 주시며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7,28절)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의 피”는 구약 시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 곧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 제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사장이 흠 없는 짐승의 피를 흘려서 백성의 죄를 사하게 했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하는데 피를 흘림으로써 죄의 댓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새 언약을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과 대조적인 언약이 모세를 통해서 세운 옛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역사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에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 피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지만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사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을 믿고 순종하자 그 피는 죽음에서 구원해 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그들을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율법을 주시며 이를 준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말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니라.”(출 24:8)

이로써 율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지켜지는 한 그 언약은 유효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면 그 언약의 효력이 중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계명,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불법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 제사 제도입니다.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거할 처소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빽빽한 구름으로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함을 보여주는 임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꼭 필요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은 피 흘리는 제사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제물로 바쳐 질 짐승의 머리에 손을 내밀어 안수합니다. 이것은 내 죄를 그에게 전가시킨다는 의식입니다. 이렇게 안수한 후에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합니다. 내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해서 대신 죄 값을 치루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런데 이것이 우리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항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바뀌고, 해마다 제사를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준비한 제물,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이 오실 때까지 잠정적으로 허락한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장차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할 것을 예고해 주는 그림자요, 모형(typology)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대신 담당할 하나님의 어린 양, 즉 속죄제물이라고 세상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3. 십자가와 죄 사함

본래 우리 인간은 의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깨끗하게 살고 싶고, 의에 이르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 3:23)고 말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인간의 실존 상태라는 것입니다. 고행과 선행과 율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선하게 살려고 애 쓸수록,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 할수록, 율법을 지키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실감하게 됩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이 죄를 어떻게 용서 받습니까?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이전에 짐승의 피로 인 친 언약과 다릅니다. 짐승의 피는 해마다 반복해서 드려야 하는 일시적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으로서의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능력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예수님이 드린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피로 드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드렸어요.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입니다. 한번 드림으로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를 속하는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어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가난해도 들어갈 수 있고, 장애가 있어도 들어갈 수 있고, 세상적인 신분이 낮고, 천해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죄만은 안 됩니다. 죄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구원의 치명적인 장애는 죄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씻어 줍니다.

4. 죄 사함의 복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저주와 불행과 죽음 불러온 죄를 짓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가 없으니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시 32: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자신의 죄 사함의 경험을 통해서 다윗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사죄의 은총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시편 2편에 그가 범죄 한 후에 겪은 심경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 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종일토록 신음하였다고 말할까요? 신음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뼈가 다 쇠하였다고 했을까요? 양심가책이 얼마나 심했으면 자기 몸의 진액이 마치 여름에 가물어서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진 논밭과 같이 되었다고 했을까요?

그런 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노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물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죄를 짓고, 용서 받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편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몰라서 죄를 짓고, 연약해서 짓고, 유혹에 넘어가서 짓고,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범죄 하였을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근거한 용서입니다.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정죄의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결론:
왜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를 좋아하시는 줄을 아십니까? 술을 먹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자기의 가슴속에 맺힌 고민과 슬픔과 고뇌들을 다 쏟아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없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말이 많아집니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할 말 못할 말 다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다 쏟아놓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 털어놓아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다음날 술이 깨고 나면 어젯밤의 자신의 말과 행동들이 생각나서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여전히 수치스럽고, 여전히 답답하고, 여전히 찜찜하고,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어떻습니까?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깨끗함을 받습니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처럼 기쁘고 즐거운 일을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였을지라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박수를 쳐준다고 할지라도, 세상 즐거움과 편안함을 누릴지라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죄의식과 죄책감이 있다면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기쁘고 감사합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만족함이 있고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19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고민과 괴로움과 남모르는 슬픔과 숨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 사함의 기쁨이 임하고, 우리의 영혼이 유쾌하게 됩니다. 상쾌하게 됩니다. 통쾌하게 됩니다. Repent하게 되면 Refresh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죄 사함이 은총이 베풀어 집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새언약의 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나를 의롭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겠는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을 수 있겠는가?”우리 모두 이 놀라운 복락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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