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러운 하나님의 방식 (02.16.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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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39회 작성일 Feb 17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2월 16일
본문: 하박국 1:5-17
제목: 당혹스러운 하나님의 방식
설교자: 이강웅 목사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라는 드류신학대학교 교수이었던 분이 계십니다. 그는 2001년 인문학 분약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포드 강좌 강연자로 선정되었고, 그 해 <타임>지에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될 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 낸 신학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24년 동안 정신 질환을 앓은 아내를 돌봐야 하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신학 교수요 목사로서 교회와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조현병을 앓는 아내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오히려 갈 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갔던 그는 그의 고뇌에 찬 삶을 담아서 <한나의 아이>(Hannah’s child)라는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는 이런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정답 없는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정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가 막힌 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심어주시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해답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인생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인생을 오래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침묵 속에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또한 하나님의 무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답답하고 의심이 생기고 혼란스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불의와 악행이 만연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가? 살아계신다면 왜 방관하시는가? 왜 침묵하시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직접 개입하셔서 공의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실망하고, 때로는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품고 탄식했습니다. 선지자는 매일 온갖 불의, 부정, 간악, 패역, 겁탈, 강포가 횡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율법이 무너져 내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왜곡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하는 기도, 하나님께 대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2-3절) “여호와여, 내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주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어째서 나에게 불의를 보게 하시며 악을 목격하게 하십니까?” 선지자는 단단히 불만에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행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현실을 종식시키고,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을 호소하여도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악한 역사를 바로 잡아 주시지 않는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탄원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선지자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주신 응답은 네가 너무 놀라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서 “주변 나라들을 보고 놀라고 또 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일’을 내가 행할 터인데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아무도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한 가지 일을 ‘너희의 생전에’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100년 또는 200년 후에 행하실 것이라고 하신다면 내가 사는 동안에는 영향 받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을 생전에 그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을 고스란히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충격이 큽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당혹시킬 만큼 하나님의 방식이 파격적입니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사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대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불법이 난무하는 상태에서 악인을 징벌해 주시고, 유다를 하루속히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자신의 백성에 대해 고난의 매를 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악행에 대한 심판이지만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시켜 줍니다. 잘못했을 때 매가 날아든다면 그건 참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잘못에 대한 징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일 수록 더 민감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그들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지도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는 징계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 받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행에 대한 사랑의 매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한 가지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매가 강포한 갈대아 사람으로 부터 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데, 갈대아 사람을 그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을 채찍으로 삼아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6-10절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6-7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갈대아’는 ‘바빌로니아, 바벨론’의 별칭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갈대아 지방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사납고 성급하며,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라고 합니다.
(8절)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낢과 같으니라”
바벨론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군대는 빠르다고 합니다. 그들은 ‘표범’처럼 빠르고, 사냥 능력은 지상에 있는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그들은 ‘이리(늑대)’와 같다고 합니다. 늑대는 지구력이 좋아서 먹잇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격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또한 독수리는 창공 2000m 지점에서 들판을 지나가는 쥐가 보일 정도로 시력이 좋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발견하고 높은 창공에서 바닥까지 낙하 비행속도는 시속 250km가 넘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9절)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이 오는 목적이 ‘강포(폭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는 ‘동풍이 불어’라고도 번역할 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심한 바람이 불면 이쪽에 있던 모래가 반대편으로 몰려가서 언덕을 만들곤 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모래 언덕처럼 쌓아 놓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0-11절)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일반적으로 성 안에 있으면, 적들이 쳐들어와도 안전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벽은 해발 800m나 되는 높은 곳에 세워진 성벽이기에 함락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들이 ‘흉벽’흙으로 토담을 쌓아서 성벽을 뛰어 넘음으로써 점령할 것이라고 합니다.
2. 당혹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이렇게 포악하고 강포한 갈대아 사람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박국 선지자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죄악을 심판하셔야 하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유다는 죄악으로 인해 징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들이 더 악한 자들이 아닙니까? 유다를 심판해야 한다면 바벨론은 백 배 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들이 더 의로운 유다를 삼키는데도 가만히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라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에 대해서 우리는 2장에서 살펴 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전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회개치 않던 남쪽 유다 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국의 등불을 끄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켜 멸망을 면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선한 왕 히스기야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극도의 악행과 함께 대대적으로 우상 숭배를 합니다. 심지어 성전 안까지 단들을 쌓아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을 듣지 않았던 시드기야 왕은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밤중에 도망치는데 추격하는 갈대아 마병에게 사로잡혀 바벨론 왕으로 끌려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신문을 당합니다. 신문 받은 후 그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은 뽑힘을 당하고, 쇠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어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혔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불살라졌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 갔으며, 모든 재물들은 약탈 당했습니다(왕하 25:7-17).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 보면 너무도 분명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여 그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거절하며 패역의 길로 나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들을 일으켜 채찍으로 사용하십니다. 징계의 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단련하십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이방 민족을 일시적으로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방 민족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들어 채찍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일단 매를 드실 때는 맹렬하게 진노를 쏟아 붓습니다.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역사 한 가운데 뛰어들어 행동하실 때에는 누구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로 휘몰아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이 아주 당혹스럽습니다.
5절 하반절,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바국 선지자가 갈대아를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당시 갈대아 나라가 그렇게 강대국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그미스 전투에서 앗수르와 애굽을 무찌르고 초강대국이 되어 유다를 점령하고 맙니다.
이렇게 바벨론이라는 악한 제국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 또한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세상의 현상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역사의 진행을 살펴 보면, 그리고 성경을 읽어 보면, 국가와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예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것도 우연히 돌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악이 번성하는 것도 우연히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이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묵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신속히 성취됩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3.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역사 운행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 길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가히 우리 생각으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하는 방식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상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방식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만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파악조차 못하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신앙생활이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 복음을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해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낮고 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건을 넘어서는 전 우주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흔히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 법을 어긴 정도 수준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대한 죄,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 하기 이전에 이미 전 우주적인 반역과 배도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혜롭게 지음을 받은 천사장 루시퍼, 사단의 타락입니다. 그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반역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침을 당했습니다. 그 사단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에 사단의 말을 들었어요. 이것은 사단의 전 우주적인 반란과 반역에 함께 가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성격상,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전 우주적인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사단의 권세가 결박 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 피로 말미암아 만물이 다시 하나님과의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죄로 인해서 전 우주가 반역과 분열과 파괴에 빠졌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전 우주가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 1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1:7-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것이 장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요, 온 우주를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영원 전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었는데 그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까지 하나님의 이 구원의 경륜을 알게 하려는 것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하면 지금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자들과 세력들까지도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수종을 들던 천사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던 하나님의 신비로운 지혜였습니다. 그들도 심히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비밀이 교회를 통해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지혜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자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한 이 땅에 유약한 아기로 태어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가운데 고난을 겪으실 줄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신 그분을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로써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삼 일 만에 위대한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사단의 죄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지고, 우리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방식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역사의 모순과 역설, 문명과 국가와 나라들의 흥망성쇠, 인생의 좌절과 눈물, 죄와 사망의 결말 등, 이 모든 것들의 해답과 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 역사의 난제와 인생의 문제가 다 해소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방식, 그분의 의지와 열심을 깨닫고 믿기에, 비록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하기 어렵고, 당혹스럽고, 때로는 받아드리기 힘들지만, 이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현실 속에 살아갈 때 갈등을 많이 합니다. 악이 번성하고 타락하고 패역한 세대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바벨론 제국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저는 돈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돈의 논리로 모든 것이 통하고, 지배 되고 있는, 그래서 불법이 성행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말씀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고, 우리 기대와는 다른 일이 전개되어 당혹스럽기도합니다. 그리고 거센 악의 힘의 기세에 눌려 자칫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그러다 세상에 동화되어서 세속화 되고, 마침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포악한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에 빠지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백성 답게, 그리스도인 답게 살게 해 달라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밝아져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과 세상의 현상을 분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거대한 악과 불의와 부패와 음란의 타락한 시대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날짜: 2025년 2월 16일
본문: 하박국 1:5-17
제목: 당혹스러운 하나님의 방식
설교자: 이강웅 목사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라는 드류신학대학교 교수이었던 분이 계십니다. 그는 2001년 인문학 분약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포드 강좌 강연자로 선정되었고, 그 해 <타임>지에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될 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 낸 신학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24년 동안 정신 질환을 앓은 아내를 돌봐야 하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신학 교수요 목사로서 교회와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조현병을 앓는 아내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오히려 갈 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갔던 그는 그의 고뇌에 찬 삶을 담아서 <한나의 아이>(Hannah’s child)라는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는 이런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정답 없는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정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가 막힌 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심어주시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해답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인생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인생을 오래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침묵 속에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또한 하나님의 무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답답하고 의심이 생기고 혼란스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불의와 악행이 만연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가? 살아계신다면 왜 방관하시는가? 왜 침묵하시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직접 개입하셔서 공의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실망하고, 때로는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품고 탄식했습니다. 선지자는 매일 온갖 불의, 부정, 간악, 패역, 겁탈, 강포가 횡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율법이 무너져 내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왜곡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하는 기도, 하나님께 대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2-3절) “여호와여, 내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주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어째서 나에게 불의를 보게 하시며 악을 목격하게 하십니까?” 선지자는 단단히 불만에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행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현실을 종식시키고,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을 호소하여도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악한 역사를 바로 잡아 주시지 않는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탄원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드디어 선지자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주신 응답은 네가 너무 놀라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서 “주변 나라들을 보고 놀라고 또 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일’을 내가 행할 터인데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아무도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한 가지 일을 ‘너희의 생전에’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100년 또는 200년 후에 행하실 것이라고 하신다면 내가 사는 동안에는 영향 받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을 생전에 그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을 고스란히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충격이 큽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당혹시킬 만큼 하나님의 방식이 파격적입니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사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대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불법이 난무하는 상태에서 악인을 징벌해 주시고, 유다를 하루속히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자신의 백성에 대해 고난의 매를 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악행에 대한 심판이지만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시켜 줍니다. 잘못했을 때 매가 날아든다면 그건 참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잘못에 대한 징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일 수록 더 민감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그들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지도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는 징계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 받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행에 대한 사랑의 매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한 가지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매가 강포한 갈대아 사람으로 부터 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데, 갈대아 사람을 그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을 채찍으로 삼아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6-10절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6-7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갈대아’는 ‘바빌로니아, 바벨론’의 별칭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갈대아 지방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사납고 성급하며,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라고 합니다.
(8절)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낢과 같으니라”
바벨론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군대는 빠르다고 합니다. 그들은 ‘표범’처럼 빠르고, 사냥 능력은 지상에 있는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그들은 ‘이리(늑대)’와 같다고 합니다. 늑대는 지구력이 좋아서 먹잇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격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또한 독수리는 창공 2000m 지점에서 들판을 지나가는 쥐가 보일 정도로 시력이 좋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발견하고 높은 창공에서 바닥까지 낙하 비행속도는 시속 250km가 넘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9절)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이 오는 목적이 ‘강포(폭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는 ‘동풍이 불어’라고도 번역할 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심한 바람이 불면 이쪽에 있던 모래가 반대편으로 몰려가서 언덕을 만들곤 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모래 언덕처럼 쌓아 놓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0-11절)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일반적으로 성 안에 있으면, 적들이 쳐들어와도 안전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벽은 해발 800m나 되는 높은 곳에 세워진 성벽이기에 함락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들이 ‘흉벽’흙으로 토담을 쌓아서 성벽을 뛰어 넘음으로써 점령할 것이라고 합니다.
2. 당혹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이렇게 포악하고 강포한 갈대아 사람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박국 선지자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죄악을 심판하셔야 하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유다는 죄악으로 인해 징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들이 더 악한 자들이 아닙니까? 유다를 심판해야 한다면 바벨론은 백 배 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들이 더 의로운 유다를 삼키는데도 가만히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라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에 대해서 우리는 2장에서 살펴 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전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회개치 않던 남쪽 유다 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국의 등불을 끄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켜 멸망을 면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선한 왕 히스기야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극도의 악행과 함께 대대적으로 우상 숭배를 합니다. 심지어 성전 안까지 단들을 쌓아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을 듣지 않았던 시드기야 왕은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밤중에 도망치는데 추격하는 갈대아 마병에게 사로잡혀 바벨론 왕으로 끌려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신문을 당합니다. 신문 받은 후 그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은 뽑힘을 당하고, 쇠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어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혔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불살라졌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 갔으며, 모든 재물들은 약탈 당했습니다(왕하 25:7-17).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 보면 너무도 분명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여 그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거절하며 패역의 길로 나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들을 일으켜 채찍으로 사용하십니다. 징계의 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단련하십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이방 민족을 일시적으로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방 민족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들어 채찍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일단 매를 드실 때는 맹렬하게 진노를 쏟아 붓습니다.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역사 한 가운데 뛰어들어 행동하실 때에는 누구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로 휘몰아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이 아주 당혹스럽습니다.
5절 하반절,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바국 선지자가 갈대아를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당시 갈대아 나라가 그렇게 강대국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그미스 전투에서 앗수르와 애굽을 무찌르고 초강대국이 되어 유다를 점령하고 맙니다.
이렇게 바벨론이라는 악한 제국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 또한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세상의 현상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역사의 진행을 살펴 보면, 그리고 성경을 읽어 보면, 국가와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예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것도 우연히 돌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악이 번성하는 것도 우연히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이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묵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신속히 성취됩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3.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역사 운행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 길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가히 우리 생각으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하는 방식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상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방식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만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파악조차 못하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신앙생활이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 복음을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해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낮고 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건을 넘어서는 전 우주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흔히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 법을 어긴 정도 수준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대한 죄,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범죄 하기 이전에 이미 전 우주적인 반역과 배도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혜롭게 지음을 받은 천사장 루시퍼, 사단의 타락입니다. 그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반역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침을 당했습니다. 그 사단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에 사단의 말을 들었어요. 이것은 사단의 전 우주적인 반란과 반역에 함께 가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성격상,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전 우주적인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사단의 권세가 결박 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 피로 말미암아 만물이 다시 하나님과의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죄로 인해서 전 우주가 반역과 분열과 파괴에 빠졌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전 우주가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 1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1:7-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것이 장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요, 온 우주를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영원 전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었는데 그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까지 하나님의 이 구원의 경륜을 알게 하려는 것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하면 지금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자들과 세력들까지도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수종을 들던 천사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던 하나님의 신비로운 지혜였습니다. 그들도 심히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비밀이 교회를 통해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지혜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자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한 이 땅에 유약한 아기로 태어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가운데 고난을 겪으실 줄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신 그분을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로써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삼 일 만에 위대한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사단의 죄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지고, 우리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방식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역사의 모순과 역설, 문명과 국가와 나라들의 흥망성쇠, 인생의 좌절과 눈물, 죄와 사망의 결말 등, 이 모든 것들의 해답과 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 역사의 난제와 인생의 문제가 다 해소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방식, 그분의 의지와 열심을 깨닫고 믿기에, 비록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하기 어렵고, 당혹스럽고, 때로는 받아드리기 힘들지만, 이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현실 속에 살아갈 때 갈등을 많이 합니다. 악이 번성하고 타락하고 패역한 세대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바벨론 제국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저는 돈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돈의 논리로 모든 것이 통하고, 지배 되고 있는, 그래서 불법이 성행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말씀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고, 우리 기대와는 다른 일이 전개되어 당혹스럽기도합니다. 그리고 거센 악의 힘의 기세에 눌려 자칫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그러다 세상에 동화되어서 세속화 되고, 마침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포악한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에 빠지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백성 답게, 그리스도인 답게 살게 해 달라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밝아져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과 세상의 현상을 분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거대한 악과 불의와 부패와 음란의 타락한 시대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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