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02.09.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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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88회 작성일 Feb 10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2월 9일
본문: 하박국 1:1-4
제목: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한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오복’을 지고의 복으로 알았습니다. ‘오복’ 첫째 ‘수’,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강녕’,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호덕’, 덕을 갖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종명’, 명대로 살다가 보기 좋게 죽는 것입니다. 이 ‘오복’은 사람들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할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지도해야 할 터인데 종교가 타락하면 오히려 인간의 이런 본성을 이용해서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신앙의 기복화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복을 약속하며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종교의 자리매김을 한 것입니다. 신앙이 기복화가 되면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합니다. 예수 믿어도 나와 내 집만 잘 되면 그만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나도 오래 살고, 잘 먹고, 잘 살면 최고입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그래서 윤리의식이 무너집니다. 성공만 하면 됩니다. 공부만 잘하면 됩니다. 돈만 많이 벌면 됩니다.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 과정을 무시합니다. 신앙의 기복화는 또한 요행주의를 불러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굴러 들어오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미명 아래서 땀 흘리지 않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를 빕니다. 무속신앙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역사적입니다. 그리고 요행주의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복을 약속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오직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신실할 때 주어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시 1:3)하기를 소원하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덴 동산이 아니라 에덴 동산의 동편에 살고 있습니다. 죄와 악이 강하게 역사하는 세상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언제나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형통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습니다.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삼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악을 토하고, 그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남을 조롱하며 악한 말을 하고 교만을 부리며 은근히 남을 위협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혀로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담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으신 분이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갑니다(시 73:5-12).
그런데 의인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자 죄를 짓지 않고자 노력하는데 이것 또한 허사입니다. 오히려 종일 악행을 경험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은 기분으로 살아갑니다(시 73:13-14). 성경의 복에 대한 약속과 현실과의 괴리감,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큰 시험이자 고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 성공적인 삶, 행복한 삶에 대하여 설교나 테잎, 그리고 책들을 통하여 많이 듣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결국 위대한 승리를 하게 하셨다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신은 이런 간증과 거리가 있어 보이고, 심지어 한심하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체험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스럽고, 문제가 나에게 있는 듯하고, 스스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는 솔직히 이런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난 정말 모르겠어요. 하나님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그분을 느끼지도 못했어요. 이런 제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에요. 제가 틀렸나요? 아니면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안고 씨름하는 분은 없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했음에도 고통스러운 질병이 낫지 않는다, 비즈니스가 영 말이 아니다, 자녀는 말썽만 피운다. 여전히 배우자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왜 불의의 사고가 그 때 하필이면 내게 일어났을까? 하나님께 매달렸음에도 왜 사랑하는 이를 데려갔을까? 하나님은 왜 그 비극을 막아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솔직히 하나님께 실망했다’든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부터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설령 이를 솔직히 드러낸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을 잘 믿어야지’하는 천편일률적인 말로 충고하려 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입을 닫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문제들을 마음 속 깊이 담아 둔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편 기자들은 이런 감정들을 거침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고통스러워 하고, 슬퍼하고, 실망하고, 탄식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는 시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시들이 하나님 말씀 성경책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부정적 감정들 마저 다 이해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시편 기자들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대로 토로합니다.
(시 13:1-2)“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22:1-2)“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69:1-3)“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왔나이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지니 설 곳이 없고 깊은 물에 빠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어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며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주 정직하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실망하여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문제를 안고 나아가 씨름하며 정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런 후 마지막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생생히 경험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내 기도를 더 이상 듣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과연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은 곧 나의 믿음의 부족,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 아침 이런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소위 “영혼의 어둔 밤”을 걷고 있는 분이시라면 이번 주일 부터 시작될 하바국서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의 해답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바국 선지자는 누구인가
하박국 선지자에 대한 정보는 하박국서 밖에서 찾을 수 없기에 그의 정체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바국서 3:19절 맨 마지막 구절에 “이 노래는 영장(지휘자)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3:3,9,13절에 ‘셀라’가 자주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본래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요즘 말로 찬양 사역을 하던 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노래하던 찬양대의 대원으로서, 레위 자손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다른 선지자와 달리 아주 특이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설교하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며 백성들에게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대놓고 불평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잠잠하시니이까?”라는 불평 섞인 말을 거듭거듭합니다(1:2,3,13,14).
이러한 하박국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의심에 찬 하박국’, 심지어 ‘믿음을 버린 회의주의자 하박국’이란 표현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할 점은 하박국의 이러한 질문은 그의 애절한 기도요 탄식이지,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바국과 같은 탄식은 시편에도, 욥기에서도,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불 붙는 심령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토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남의 탄식의 기도를 듣고서, 감히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2장 20절 “오직 여호와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찌니라”에서 우리는 하바국 선지자의 신앙 고백의 진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혹독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즉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2. 시대적 배경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하바국이 살았던 그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시대는 갈대아(신 바벨로니아 제국)가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아직 앗수르 제국은 건재했지만 바벨론 제국은 느브갓네살 왕이 즉위하자 파죽지세로 전 바벨론 지역을 휩쓸어 갑니다. 그러자 그 당시 또 다른 강국이었던 애굽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으며 신흥 바벨론을 견제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남쪽 유다 왕국의 요시아 왕은 반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앗수르와 바벨론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주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는 세계 역사에서도 큰 분수령을 짓는 전투 중 하나로 손꼽습니다.
이 때 앗수르를 돕기 위해 애굽의 군대가 남쪽으로 부터 북상하였는데, 요시아 왕이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르엘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므깃도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유다 군대는 애굽 왕 느고에게 크게 패하였고, 요시야 왕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맙니다. 이로써 유다의 국력이 급속히 기울어지는 쇠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탄식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시아 왕이 죽은 ‘므깃도의 슬픔’은 단순히 왕을 잃어버린 슬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케 하는 슬픔입니다. 우리도 재앙을 만나거나, 극한 슬픔을 대할 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그것은 ‘요시야같은 선한 왕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3:25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런 요시야 왕이 죽자 그 이후의 왕들은 우상을 대대적으로 섬기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중에 여호야김 왕이 가장 악랄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 채울 만큼,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상실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가증한 일들과 악행을 보여 주는 한 일화가 역대하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부친 요시아 왕은 성전을 보수하다가 발견된 율법책이 왕 앞에서 낭독하자(아마도 신명기 28장 축복과 저주의 말씀 부분을 읽었을 것)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습니다(대하 34:18-19).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이 여호야김 왕 앞에서 낭송되자 읽었던 부분을 칼로 베어 화로 불에 던집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 책 전부를 불살랐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령된 행동입니다.
3. 하바국 선지자의 고뇌
이러한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1:3절,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선지자가 목도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악은 이전 요시야 왕 시대와 대비 되어서 더욱 괴롭습니다. 요시아 왕이 일으킨 부흥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아 왕은 전사했고, 그 부흥의 불길을 순식간에 꺼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 왕국은 바벨론 제국의 침공 앞에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습니다. ‘과연 부흥의 결과가 이것인가’ 하바국 선지자는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는데,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질문하며 하소연하였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해 왔음을 의미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와 같은 기도는 오랫동안 드렸던 기도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끼? “하나님, 이제 제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정도까지 추락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얼마나 더 추락해야 하겠습니까?”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강포’는 ‘폭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 국가의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권력과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많이 가진 자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자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상대에게 갑질을 하는 것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3-4절)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율법이 해이해졌다’라고 합니다. ‘해이하다’는 ‘긴장이나 규율 따위가 풀려 마음이 느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의미는 ‘마비되다’입니다.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은 뇌가 내리는 명령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뇌가 내리는 명령에 손발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이 마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국가의 상태가 마비 상태인 것처럼 율법(말씀)이 전혀 전달이 되지 않거나 들어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니, 그들은 마치 이방인과도 같습니다. 불의와 악행이 횡행합니다. 파괴와 폭력이 만연하고, 다툼과 분쟁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거나, 시행되어도 왜곡된 형태로 행해졌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는 대부분 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올바르게 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역사(행하심)를 세상에 보여주는 통로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재판은 정의와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비롯하여 ‘뇌물무죄’ ‘무뇌물유죄’, ‘악인무죄 의인유죄’, ‘권력무죄 무권력유죄’ 등 하나님의 공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힘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몸부림 쳤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은 그만큼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4. 하나님의 침묵과 그 신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인생도 정답을 알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도, 우리 인생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소원하는 것처럼 진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망스럽고 낙심도 큽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세상이 굴러간다면 이 세상은 지상천국을 이루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될까요?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될까요? 우리 모두 샬롬을 누릴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서를 보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던 대로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 하늘로 부터 내려온 만나를 공급 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두 눈으로 두 귀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받습니다. 실로 인간의 오감으로 매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와! 얼마나 멋진 세상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실망도, 방황도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당마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찰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데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해 줍니까?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적을 체험하고, 말씀의 증거를 가졌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여호수아와 갈렘 단 두 명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불신앙으로 다 실패하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두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내 두 귀로 듣고, 하나님이 즉각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가 하는 일 마다 다 형통하여 잘되면 과연 우리 믿음이 좋아지며, 신앙생활을 잘하게 될까요? 한 번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편안했을 때 신앙생활을 잘했습니까? 아니면 힘들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 신앙생활을 잘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인생 길이 평탄할 때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졌습니까? 평탄치 못해서 고통스러울 때 우리 믿음이 강해지고 단단해졌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서 물러가시며 침묵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영글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여기에 우리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체험이 없지만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비록 극적인 간증거리가 없었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들은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하바국처럼 인생의 난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씨름했습니다. 애원했습니다. 탄원했습니다.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응답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해가 되지 않고,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의외로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씨름하며 질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또 국가와 역사를 통제하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도다”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불같은 고난 속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로 인하여 행복했고 기뻐했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결론:
하나님은 내 마음의 고통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실망을 아십니다. 나의 상처를 아십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모든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비판을 받으셨습니다.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극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실망이 무엇인지, 배신감이 무엇인지, 상처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아픈 것이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한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연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돌아보십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응답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히 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은 영어로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즉 '예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매우 강력한 권면입니다. 경주를 하는 자가 곁눈질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쳐다보며 눈요기를 하면서 달린다면 우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야말로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입니다. 믿음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보혈을 쏟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사죄의 은혜를 받고,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얻습니다. 우리가 낙심중에 빠질 때 주님을 바라보면 위로를 얻습니다. 사단이 심어주는 두려움과 염려에 빠질 때 주님을 바라보면 주께서 믿음을 주시고, 새 힘을 부어 주십니다. 미움이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면 사랑을 주시고,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면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부으시고 싸매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2월 9일
본문: 하박국 1:1-4
제목: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한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오복’을 지고의 복으로 알았습니다. ‘오복’ 첫째 ‘수’,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강녕’,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호덕’, 덕을 갖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종명’, 명대로 살다가 보기 좋게 죽는 것입니다. 이 ‘오복’은 사람들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할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지도해야 할 터인데 종교가 타락하면 오히려 인간의 이런 본성을 이용해서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신앙의 기복화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복을 약속하며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종교의 자리매김을 한 것입니다. 신앙이 기복화가 되면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합니다. 예수 믿어도 나와 내 집만 잘 되면 그만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나도 오래 살고, 잘 먹고, 잘 살면 최고입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그래서 윤리의식이 무너집니다. 성공만 하면 됩니다. 공부만 잘하면 됩니다. 돈만 많이 벌면 됩니다.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 과정을 무시합니다. 신앙의 기복화는 또한 요행주의를 불러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굴러 들어오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미명 아래서 땀 흘리지 않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를 빕니다. 무속신앙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역사적입니다. 그리고 요행주의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복을 약속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오직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신실할 때 주어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시 1:3)하기를 소원하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덴 동산이 아니라 에덴 동산의 동편에 살고 있습니다. 죄와 악이 강하게 역사하는 세상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언제나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형통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습니다.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삼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악을 토하고, 그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남을 조롱하며 악한 말을 하고 교만을 부리며 은근히 남을 위협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혀로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담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으신 분이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갑니다(시 73:5-12).
그런데 의인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자 죄를 짓지 않고자 노력하는데 이것 또한 허사입니다. 오히려 종일 악행을 경험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은 기분으로 살아갑니다(시 73:13-14). 성경의 복에 대한 약속과 현실과의 괴리감,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큰 시험이자 고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 성공적인 삶, 행복한 삶에 대하여 설교나 테잎, 그리고 책들을 통하여 많이 듣습니다. 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결국 위대한 승리를 하게 하셨다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신은 이런 간증과 거리가 있어 보이고, 심지어 한심하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체험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스럽고, 문제가 나에게 있는 듯하고, 스스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는 솔직히 이런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난 정말 모르겠어요. 하나님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그분을 느끼지도 못했어요. 이런 제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에요. 제가 틀렸나요? 아니면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안고 씨름하는 분은 없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했음에도 고통스러운 질병이 낫지 않는다, 비즈니스가 영 말이 아니다, 자녀는 말썽만 피운다. 여전히 배우자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왜 불의의 사고가 그 때 하필이면 내게 일어났을까? 하나님께 매달렸음에도 왜 사랑하는 이를 데려갔을까? 하나님은 왜 그 비극을 막아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솔직히 하나님께 실망했다’든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부터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설령 이를 솔직히 드러낸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을 잘 믿어야지’하는 천편일률적인 말로 충고하려 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입을 닫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문제들을 마음 속 깊이 담아 둔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편 기자들은 이런 감정들을 거침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고통스러워 하고, 슬퍼하고, 실망하고, 탄식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는 시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시들이 하나님 말씀 성경책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부정적 감정들 마저 다 이해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시편 기자들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대로 토로합니다.
(시 13:1-2)“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22:1-2)“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69:1-3)“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왔나이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지니 설 곳이 없고 깊은 물에 빠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어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며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주 정직하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실망하여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문제를 안고 나아가 씨름하며 정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런 후 마지막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생생히 경험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내 기도를 더 이상 듣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과연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은 곧 나의 믿음의 부족,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 아침 이런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소위 “영혼의 어둔 밤”을 걷고 있는 분이시라면 이번 주일 부터 시작될 하바국서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의 해답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바국 선지자는 누구인가
하박국 선지자에 대한 정보는 하박국서 밖에서 찾을 수 없기에 그의 정체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바국서 3:19절 맨 마지막 구절에 “이 노래는 영장(지휘자)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3:3,9,13절에 ‘셀라’가 자주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본래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요즘 말로 찬양 사역을 하던 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노래하던 찬양대의 대원으로서, 레위 자손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다른 선지자와 달리 아주 특이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설교하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며 백성들에게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대놓고 불평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잠잠하시니이까?”라는 불평 섞인 말을 거듭거듭합니다(1:2,3,13,14).
이러한 하박국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의심에 찬 하박국’, 심지어 ‘믿음을 버린 회의주의자 하박국’이란 표현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할 점은 하박국의 이러한 질문은 그의 애절한 기도요 탄식이지,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바국과 같은 탄식은 시편에도, 욥기에서도,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불 붙는 심령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토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남의 탄식의 기도를 듣고서, 감히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2장 20절 “오직 여호와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찌니라”에서 우리는 하바국 선지자의 신앙 고백의 진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혹독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즉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2. 시대적 배경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하바국이 살았던 그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시대는 갈대아(신 바벨로니아 제국)가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아직 앗수르 제국은 건재했지만 바벨론 제국은 느브갓네살 왕이 즉위하자 파죽지세로 전 바벨론 지역을 휩쓸어 갑니다. 그러자 그 당시 또 다른 강국이었던 애굽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으며 신흥 바벨론을 견제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남쪽 유다 왕국의 요시아 왕은 반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앗수르와 바벨론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주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는 세계 역사에서도 큰 분수령을 짓는 전투 중 하나로 손꼽습니다.
이 때 앗수르를 돕기 위해 애굽의 군대가 남쪽으로 부터 북상하였는데, 요시아 왕이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르엘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므깃도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유다 군대는 애굽 왕 느고에게 크게 패하였고, 요시야 왕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맙니다. 이로써 유다의 국력이 급속히 기울어지는 쇠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탄식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시아 왕이 죽은 ‘므깃도의 슬픔’은 단순히 왕을 잃어버린 슬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케 하는 슬픔입니다. 우리도 재앙을 만나거나, 극한 슬픔을 대할 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그것은 ‘요시야같은 선한 왕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3:25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런 요시야 왕이 죽자 그 이후의 왕들은 우상을 대대적으로 섬기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중에 여호야김 왕이 가장 악랄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 채울 만큼,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상실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가증한 일들과 악행을 보여 주는 한 일화가 역대하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부친 요시아 왕은 성전을 보수하다가 발견된 율법책이 왕 앞에서 낭독하자(아마도 신명기 28장 축복과 저주의 말씀 부분을 읽었을 것)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습니다(대하 34:18-19).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이 여호야김 왕 앞에서 낭송되자 읽었던 부분을 칼로 베어 화로 불에 던집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 책 전부를 불살랐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령된 행동입니다.
3. 하바국 선지자의 고뇌
이러한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1:3절,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선지자가 목도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악은 이전 요시야 왕 시대와 대비 되어서 더욱 괴롭습니다. 요시아 왕이 일으킨 부흥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아 왕은 전사했고, 그 부흥의 불길을 순식간에 꺼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 왕국은 바벨론 제국의 침공 앞에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습니다. ‘과연 부흥의 결과가 이것인가’ 하바국 선지자는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는데,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질문하며 하소연하였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해 왔음을 의미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와 같은 기도는 오랫동안 드렸던 기도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끼? “하나님, 이제 제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정도까지 추락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얼마나 더 추락해야 하겠습니까?”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강포’는 ‘폭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 국가의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권력과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많이 가진 자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자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상대에게 갑질을 하는 것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3-4절)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율법이 해이해졌다’라고 합니다. ‘해이하다’는 ‘긴장이나 규율 따위가 풀려 마음이 느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의미는 ‘마비되다’입니다.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은 뇌가 내리는 명령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뇌가 내리는 명령에 손발이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이 마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국가의 상태가 마비 상태인 것처럼 율법(말씀)이 전혀 전달이 되지 않거나 들어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니, 그들은 마치 이방인과도 같습니다. 불의와 악행이 횡행합니다. 파괴와 폭력이 만연하고, 다툼과 분쟁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거나, 시행되어도 왜곡된 형태로 행해졌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는 대부분 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올바르게 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역사(행하심)를 세상에 보여주는 통로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재판은 정의와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비롯하여 ‘뇌물무죄’ ‘무뇌물유죄’, ‘악인무죄 의인유죄’, ‘권력무죄 무권력유죄’ 등 하나님의 공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힘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몸부림 쳤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은 그만큼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4. 하나님의 침묵과 그 신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인생도 정답을 알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도, 우리 인생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소원하는 것처럼 진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망스럽고 낙심도 큽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세상이 굴러간다면 이 세상은 지상천국을 이루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될까요?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될까요? 우리 모두 샬롬을 누릴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서를 보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던 대로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 하늘로 부터 내려온 만나를 공급 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두 눈으로 두 귀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받습니다. 실로 인간의 오감으로 매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와! 얼마나 멋진 세상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실망도, 방황도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당마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찰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데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해 줍니까?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적을 체험하고, 말씀의 증거를 가졌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여호수아와 갈렘 단 두 명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불신앙으로 다 실패하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두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내 두 귀로 듣고, 하나님이 즉각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가 하는 일 마다 다 형통하여 잘되면 과연 우리 믿음이 좋아지며, 신앙생활을 잘하게 될까요? 한 번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편안했을 때 신앙생활을 잘했습니까? 아니면 힘들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 신앙생활을 잘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인생 길이 평탄할 때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졌습니까? 평탄치 못해서 고통스러울 때 우리 믿음이 강해지고 단단해졌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서 물러가시며 침묵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영글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여기에 우리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체험이 없지만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비록 극적인 간증거리가 없었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들은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하바국처럼 인생의 난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씨름했습니다. 애원했습니다. 탄원했습니다.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응답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해가 되지 않고,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의외로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씨름하며 질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또 국가와 역사를 통제하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도다”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불같은 고난 속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로 인하여 행복했고 기뻐했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결론:
하나님은 내 마음의 고통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실망을 아십니다. 나의 상처를 아십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모든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비판을 받으셨습니다.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극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실망이 무엇인지, 배신감이 무엇인지, 상처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아픈 것이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한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연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돌아보십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응답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히 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은 영어로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즉 '예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매우 강력한 권면입니다. 경주를 하는 자가 곁눈질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쳐다보며 눈요기를 하면서 달린다면 우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야말로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입니다. 믿음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보혈을 쏟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사죄의 은혜를 받고,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얻습니다. 우리가 낙심중에 빠질 때 주님을 바라보면 위로를 얻습니다. 사단이 심어주는 두려움과 염려에 빠질 때 주님을 바라보면 주께서 믿음을 주시고, 새 힘을 부어 주십니다. 미움이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면 사랑을 주시고,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면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부으시고 싸매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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