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 같이 (02.02.2025)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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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 같이 (02.02.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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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17회 작성일 Feb 03 2025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2월 2일
본문: 요한복음 17:20-26
제목: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 같이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발전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대립, 경제적 불평등, 종교적 갈등, 문화 충돌, 인종차별, 그리고 사회적 이념 충돌과 세대 간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오늘날의 분열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서로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미움과 증오심은 갈 수록 불 타오르고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주요 원인은 다양하지만,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보화 시대의 역설입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동시에 알고리즘에 의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만 교류하게 되는 소위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필터 버블’이란 인터넷(유튜브) 사용자가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는 정보만을 접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특별한 음식점에 갔다고 상상해보죠. 이 음식점은 손님이 과거에 주문했던 음식을 기반으로 메뉴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피자를 자주 주문했다면, 이 음식점 메뉴에는 다양한 종류의 피자만 보이고 다른 음식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손님은 다른 음식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며, 계속해서 피자만 먹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인터넷 포털이나 소셜 미디어는 이런 음식점과 같습니다. 이들 매체는 우리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 무엇을 자주 찾는지 알아내서 우리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처음엔 이런 알고리즘이 편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들을 좁은 시야에 가둬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다양한 시각을 접하는 기회를 그만큼 제한하고, 특정한 입장만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주로 진보적인 정보를 접하게 되고,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보수적인 정보를 주로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이해와 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이로 인해 더욱 큰 사회적 분열을 초래합니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2023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상위 1%는 38조 7000억 달러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모든 중산층 합친 것보다도 재산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하위 20%는 미국 부의 3%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사회적 계층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양극화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셋째, 정치적 이념의 대립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신념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개인의 정체성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 사이에 극심한 반목과 대립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이러한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경우, 사회적 분열은 더욱 심화됩니다.

넷째, 문화적, 종교적 차이도 분열의 주요 원인입니다. 세계화로 인해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게 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이 갈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특정 종교나 문화가 배척당하거나 차별받을 때, 이로 인한 반발과 대립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분열과 갈등의 역사는 인류 최초 조상 아담의 가정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범하고 나서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었습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사랑 고백했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신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아내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형제 가인과 아벨은 하나 되지 못하고 형이 시기하여 동생을 쳐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도 하나 되지 못하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다투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도 하나 되지 못하고, 형들이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파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만큼 인간의 역사 속에 시기심과 경쟁심과 탐심으로 인한 분열과 갈등의 뿌리가 깊습니다.

오늘날에도 분열과 갈등이 일상화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교회 안에서도 분열과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상처 받은 분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시험에 드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의 문화와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 가족, 한 부부, 한 형제도 하나 되기 힘든데 생판 모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이후에 여러 번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 됨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 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이 예수님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연합의 신적 기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아들은 자신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을 좇지 않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아버지의 뜻을 좇았으며,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나도 그대로 행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위임 받은 권세로 생명을 주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대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자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께 나아오면 알 수 있어요.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아들의 뜻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어요. 아들의 치유하시는 행위에서 아버지의 구원의 행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요 17:3)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고 우리는 땅에 속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까?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를 들어 원숭이를 보고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봐야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설령 원숭이가 동물학적으로 사람과 99% 같다고 해도, 다른 1% 때문에 원숭이를 통해 사람이란 존재를 설명할 수 없어요.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계시해 줄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계시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과 같은 분이세요. 하나님 아버지와 같기에 하나님을 고스란히 계시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는 같습니다. 예수님이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주장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성도와 성도의 연합, 교회의 하나 됨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완벽한 하나 됨이 있었습니다. 진리와 사랑에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하나 됨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연합과 하나 됨을 가장 잘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연합의 신비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도 혼자 잘났다고 자기만 내세우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배려해 주지 못했어요.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꾸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죄의 가해자이기도 하고 죄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죄가 역사하는 한 우리는 하나 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기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는 아예 벽을 쌓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교류와 교제가 전혀 없었어요. 함께 밥 먹는 것을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뜰과 이방인들에게 허락된 뜰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 담이 있었습니다. 이 담은 대략 1.5m 높이로 돌로 쌓은 벽입니다. 최근에 고고학자에 의해 이 벽에 부착되었던 경고문이 발견되었는데 헬라어와 라틴어로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벽을 넘어가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이토록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은 높았습니다. 서로 교제할 수 없는 완전한 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 짓던 그 담이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어떻게 이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까?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화목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서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여 주셨습니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막혔던 교제가 회복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것을 각 개인에게 적용시켜서 구현시키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주인과 노예, 상전과 일꾼, 귀족과 평민, 이렇게 신분계급이 뚜렷하던 로마제국 시대에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한 가족임을 선언합니다. 이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룹니다. 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신앙 고백하는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산돌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 모두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맘에 안 든다고 나를 빼서 다른 곳에 쑤셔 박아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깨닫게 되면 신앙생활은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에 눈이 떠집니다.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생활을 잘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혼자 있어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장을 통해서 나보다 더 연약한 목원 식구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장모임을 통해서 나의 모난 성격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3. 연합의 열매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이방사람들과도 하나 될 것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됨같이,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 과거 모든 성도들과 장래 모든 성도들이 하나 됨을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증거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됨을 실천할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 아들이신 것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갖 잡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서 온갖 방탕한 삶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씨저를 주라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투옥 당하거나 사회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죽이면 죽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환란과 고통 가운데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서로 돕고 섬겼습니다. 로마 정부는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과 질서가 그들을 하나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로마 황제보다 더 강력한 권세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권세를 도전해서 깨부수려고 작정했습니다. 300여년 동안 교회에 무서운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를 낼수록 교회는 더욱 순결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로마제국은 보이지 않는 이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리고 세상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을! 교회의 하나 됨을 통하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외롭습니다. 어디에 가도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사람들 마음에 외로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가정과 마을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분열과 다툼으로 사회의 많은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성씨도 다르고, 출신 배경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기호도 다르고,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주일 점심에 간편하게 빵 먹자고 하는 사람이 있고, 김밥을 먹자는 사람이 있고, 아니다 국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침묵 기도하기 원하고, 어떤 사람은 뜨겁게 통성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 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 됨을 위한 기도는 마침내 열매를 맺어 신약 교회가 태동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전에는 제자들이 각기 앞서려는 경쟁심에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을 섬기며 복음전파에 힘씁니다.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며 도와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합니다. 이로 인해 온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며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습니다(행 2:42-46). 하나 됨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실제로 열매를 맺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판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서로 하나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깨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감당해주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안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기를! 우리 교회가 마음으로 하나 되어 합심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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