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 (01.26.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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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50회 작성일 Jan 27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월 26일
본문: 요한복음 17:18-19
제목: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서론: 2025년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 역할하신 것이 주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두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를 위한 대제사적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적 기도문에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 17:1)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자신이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 사셨고, 그리고 이를 위해 33세 나이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가질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이 뚜렷해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기가 부여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믿음과 정신력을 갖게 됩니다. 또 그 목적대로 우리가 살아갈 때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고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행동이 가치 있게 느껴지고, 이로써 삶 자체가 더욱더 보람차게 더욱더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문의 두 번째 기도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가 세상 가운데 하나로 보전 되고,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로 거룩히 보전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구별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의식과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우리가 어떤 정신과 태도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지난 주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 정체성을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되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정신과 삶의 스타일을 추종하거나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주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모습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네 가지 유형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유형은 격리주의입니다. 세상을 죄악시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자는 주의입니다. 악과 죄가 범람한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순결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세상 죄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산 속으로, 광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이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경건주의적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와 반대로 타협주의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 정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에 동화되거나 타협해 버렸기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구별됨 또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삽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을 상실하여 그들의 실제 삶은 세상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셋째 유형은 이원론주의입니다. 교회의 삶과 세상의 삶을 이분화시켜 교회생활에서는 신앙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세상에서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행동합니다. 교회와 개인의 영적 삶에서는 신령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 밖 일상생활에서는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라 삽니다. 보수적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발견되는 유형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교회 일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 세상적인 야망과 욕심으로 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서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을 종합한 유형인데 ‘변혁주의’라고 부르겠습니다. 'transformation' 세상을 변혁시키는 창조적 삶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세상에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을 거부하거나 피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힘씁니다. 그 비결은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변혁주의의 삶은 우리 주님이 강조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개념과 일치합니다. 먼저 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빛이 빛으로써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 빛은 어두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 빛이 어두움 속에 있지 않다면 그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빛은 어두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지만 거기서 함께 동화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빛은 빛으로써의 독특성이 있어야지 어두움에 삼켜져 버리면 그 존재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금 역시 부패한 현장에 있어야 소금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도 그 부패성에 동화되어 소금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부패 가운데 있으되 부패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소금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해 버릴 때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성도들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짓밟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정신을 추종하지 않으며 살아가려면 늘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2. 보냄 받은 의식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 18절이 ‘보냄 받은 의식’에 관한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이 구절에서‘세상에 보내었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는데 영어성경에는 전치사 ‘into’가 사용되어서 ‘into the world’라는 어구를 사용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은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왔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성부 하나님의 보내신 뜻에 따른 것임을 말씀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하신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 또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냄 받은 의식으로 가장 충일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 표현했고,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곳이 바로 ‘세상’이었습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과,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 이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기에 비록 세상이란 단어는 빠져 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보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헬라말 ‘사도’(아포스톨로소)는 문자적으로 ‘사명을 띠고 보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제자로 뽑을 때 ‘보냄’과 연관시키며 선택하셨습니다.
(막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들에게 임무를 주어 사명을 수행하도록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냄은 열두 사도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납니다.
(행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6:17-18)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 외에도 우리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보냄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이 짧은 역사 가운데 오늘날처럼 교회가 번성하게 된 것은 서구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부터 파송을 받아 성경책을 우리 언어로 번역해 주며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1885년에 조선에 도착한 장로교 선교사 호래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기도문에는 조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염원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보냄 받은 의식을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여 각 처소 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스파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다만, 이 미션에는 '임파서블'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3. ‘보냄 받은 의식’의 적용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실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또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속으로 보내시려는 대상은 궁극적으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2) 세상 속에 보냄 받은 존재임을 의식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전 생애 걸쳐 매 순간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의식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늘 세상 가운데 보냄 받은 의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자로 사셨기에, 우리 또한 세상 속에서 그런 의식 속에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파송자가 되십니다. 그러기에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매일 매순간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앞으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그날 까지 계속해서 세상 속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리고 보냄을 받고 나가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흔히‘가는 선교사가 있고 보내는 선교사가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맞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타문화권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맞습니다만 일반적 의미에서 우리 모두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님만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문화권으로 선교사님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가정의 주부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직장인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시민운동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업가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목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런 보냄 받은 의식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보냄 받은 의식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단순히 직장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보냄 받은 의식’을 가지고 직장 일에 정직과 성실의 태도로 수행합니다.
남편과 갈등을 빚던 주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정에 보내신 것은 화평을 이루고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배우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며 인내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출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에 보내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보냄의 의식’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와 미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보냄 받은 의식’은 의욕적이고 활동적인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들고 병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삶을 해석하고, 이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오 보겠습니다. 80세의 김 권사님은 5년 전 뇌졸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 봉사하거나 공동체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비록 몸이 아프고 움직일 수 없지만, 그녀는 기도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께 보냄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날 이후 김 권사님은 교회의 기도 제목을 받아 중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 주일학교와 청소년들, 그리고 병약한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며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김 권사님의 기도는 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고, 그녀 자신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90세의 이 집사님은 노환과 만성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병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간호사와 동료 환자들은 그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자신의 고통이 단순히 육체적 약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렇듯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활동적이지 않을지라도, 기도, 지혜와 신앙과 경험을 나눔, 그리고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전히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삶은 단지 한 시기의 활동이 아니라, 삶의 끝까지 지속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날짜: 2025년 1월 26일
본문: 요한복음 17:18-19
제목: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서론: 2025년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 역할하신 것이 주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두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를 위한 대제사적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적 기도문에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 17:1)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자신이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 사셨고, 그리고 이를 위해 33세 나이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가질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이 뚜렷해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기가 부여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믿음과 정신력을 갖게 됩니다. 또 그 목적대로 우리가 살아갈 때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고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행동이 가치 있게 느껴지고, 이로써 삶 자체가 더욱더 보람차게 더욱더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문의 두 번째 기도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가 세상 가운데 하나로 보전 되고,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로 거룩히 보전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구별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의식과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우리가 어떤 정신과 태도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지난 주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 정체성을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되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정신과 삶의 스타일을 추종하거나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주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모습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네 가지 유형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유형은 격리주의입니다. 세상을 죄악시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자는 주의입니다. 악과 죄가 범람한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순결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세상 죄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산 속으로, 광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이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경건주의적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와 반대로 타협주의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 정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에 동화되거나 타협해 버렸기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구별됨 또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삽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을 상실하여 그들의 실제 삶은 세상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셋째 유형은 이원론주의입니다. 교회의 삶과 세상의 삶을 이분화시켜 교회생활에서는 신앙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세상에서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행동합니다. 교회와 개인의 영적 삶에서는 신령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 밖 일상생활에서는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라 삽니다. 보수적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발견되는 유형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교회 일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 세상적인 야망과 욕심으로 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서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을 종합한 유형인데 ‘변혁주의’라고 부르겠습니다. 'transformation' 세상을 변혁시키는 창조적 삶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세상에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을 거부하거나 피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힘씁니다. 그 비결은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변혁주의의 삶은 우리 주님이 강조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개념과 일치합니다. 먼저 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빛이 빛으로써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 빛은 어두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 빛이 어두움 속에 있지 않다면 그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빛은 어두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지만 거기서 함께 동화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빛은 빛으로써의 독특성이 있어야지 어두움에 삼켜져 버리면 그 존재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금 역시 부패한 현장에 있어야 소금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도 그 부패성에 동화되어 소금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부패 가운데 있으되 부패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소금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해 버릴 때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성도들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짓밟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정신을 추종하지 않으며 살아가려면 늘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2. 보냄 받은 의식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 18절이 ‘보냄 받은 의식’에 관한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이 구절에서‘세상에 보내었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는데 영어성경에는 전치사 ‘into’가 사용되어서 ‘into the world’라는 어구를 사용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은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왔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성부 하나님의 보내신 뜻에 따른 것임을 말씀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하신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 또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냄 받은 의식으로 가장 충일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 표현했고,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곳이 바로 ‘세상’이었습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과,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 이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기에 비록 세상이란 단어는 빠져 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보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헬라말 ‘사도’(아포스톨로소)는 문자적으로 ‘사명을 띠고 보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제자로 뽑을 때 ‘보냄’과 연관시키며 선택하셨습니다.
(막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들에게 임무를 주어 사명을 수행하도록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냄은 열두 사도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납니다.
(행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6:17-18)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 외에도 우리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보냄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이 짧은 역사 가운데 오늘날처럼 교회가 번성하게 된 것은 서구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부터 파송을 받아 성경책을 우리 언어로 번역해 주며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1885년에 조선에 도착한 장로교 선교사 호래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기도문에는 조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염원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보냄 받은 의식을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여 각 처소 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스파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다만, 이 미션에는 '임파서블'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3. ‘보냄 받은 의식’의 적용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실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또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속으로 보내시려는 대상은 궁극적으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2) 세상 속에 보냄 받은 존재임을 의식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전 생애 걸쳐 매 순간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의식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늘 세상 가운데 보냄 받은 의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자로 사셨기에, 우리 또한 세상 속에서 그런 의식 속에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파송자가 되십니다. 그러기에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매일 매순간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앞으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그날 까지 계속해서 세상 속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리고 보냄을 받고 나가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흔히‘가는 선교사가 있고 보내는 선교사가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맞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타문화권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맞습니다만 일반적 의미에서 우리 모두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님만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문화권으로 선교사님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가정의 주부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직장인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시민운동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업가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목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런 보냄 받은 의식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보냄 받은 의식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단순히 직장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보냄 받은 의식’을 가지고 직장 일에 정직과 성실의 태도로 수행합니다.
남편과 갈등을 빚던 주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정에 보내신 것은 화평을 이루고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배우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며 인내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출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에 보내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보냄의 의식’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와 미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보냄 받은 의식’은 의욕적이고 활동적인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들고 병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삶을 해석하고, 이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오 보겠습니다. 80세의 김 권사님은 5년 전 뇌졸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 봉사하거나 공동체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비록 몸이 아프고 움직일 수 없지만, 그녀는 기도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께 보냄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날 이후 김 권사님은 교회의 기도 제목을 받아 중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 주일학교와 청소년들, 그리고 병약한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며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김 권사님의 기도는 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고, 그녀 자신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90세의 이 집사님은 노환과 만성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병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간호사와 동료 환자들은 그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자신의 고통이 단순히 육체적 약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렇듯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활동적이지 않을지라도, 기도, 지혜와 신앙과 경험을 나눔, 그리고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전히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삶은 단지 한 시기의 활동이 아니라, 삶의 끝까지 지속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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