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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 (01.19.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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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25회 작성일 Jan 20 2025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월 19일
본문: 요한복음 17:14-16
제목: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최근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출시된 오징어 게임2가 많은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전 세계 톱10에서 1위로 이름을 올렸고, 지금도 폭발적인 인기가 계속 진행 중입니다.

오징어 게임1에 이어서 게임2 또한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놀던 게임들을 통해 흥미와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진실을 선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큰 빚을 져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우승자에게 몇백억원을 상금으로 받게 된다는 것에 현혹되어 자기 생명을 걸고 벌이는 생존게임을 벌입니다. 자신의 배당 금액을 올리기 위해서 한 명이라도 더 죽기를 바라고, 또 죽이는 아주 잔인하고 비정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이 드러나고, 인간성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징어 게임2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드라마 속에서 참가자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경제적 위기와 절박함에서 비롯된 이유로 게임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돈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상실해 가게 됩니다. 그들은 타인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육강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이 목표가 되고, 사람은 단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성과 모순을 고발합니다.

그렇다고 사회 체제와 조직만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스스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변질되어 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돈을 얻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배신하며, 인간적인 관계와 연대를 위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은 참가자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원인입니다. 그들은 점차 도덕적 기준을 포기하고, 자신의 잔인한 행동을 정당화시킵니다.

도박하다 큰 빚을 진 아들과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엄마가 함께 생존하기 위해 애쓰지만 숫자에 따라 짝짓기하는 게임에서 서로 갈라집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선택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 게임이 끝난 후 간신히 생존한 엄마는 자기를 포기한 아들을 애써 이해하면서 아들을 껴안아 줍니다.

이렇듯 오징어 게임2는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인 면과 탐욕스러운 인간성만을 다루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 드라마에서 강조 되는 부분은 공동체 연대의 중요성입니다.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일부 참가자들은 서로 협력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 합니다. 특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공동의 선한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과정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는 이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면이 있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함께 생존을 위한 공동체의 필요성입니다. 물질화로 인한 인간 소외, 이기주의로 인한 관계의 단절로 인해 사람들은 갈 수록 고립되고, 그래서 더욱 공동체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대단히 혼란스럽고 불안정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계속 존속할 것이고, 그 가치와 필요성은 입증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세상이 교회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세상은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교회를 박해하거나 적대시 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아니, 평화로운 시기에도 세상은 교회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 항상 어느 정도의 긴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어야 할까요? 세상에서 교회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1.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아버지의 것으로 우리를 구별시키시고,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왜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느냐? 그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6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똑같은 내용을 말씀해 줍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우리는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여 택한 백성이예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그랬어요. 그들과 소속과 신분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했고, 마귀의 것이기에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영광스럽지만 동시에 많은 갈등과 고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런데 세상에서 갈등과 고난을 예고하시면서도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두고 가셨습니다.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 땅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남겨 두셨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과 등지고 살라는 것일까요? 세상에 오염 되지 않도록 높은 담을 쌓고 세상과 절연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살지 않은 깊은 산 속이나 고도 섬으로 가야할까요? 아니면 세상과 적당히 섞여서 살라는 것일까요?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2. 세상의 두 가지 의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근하려면 먼저 세상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세상’이란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구절이죠?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에서의 세상은 우리가 가능한 멀리하고 버려야할 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거든요. 여기서 세상이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모두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 있습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양립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할 수 없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약간 혼란스럽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이 모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성경은 둘 다 ‘세상’이라고 번역했으나 첫 번째는 ‘kosmos'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 만물과 세상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두 번째 '세상'은 'aion'인데 세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만 한 마디로 세상 정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5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정신을 추종해서 세속적인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이 세상 정신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줍니다.

첫째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우리‘신체’를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추구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뜻합니다. 또 ‘정욕’도 남녀 간의 성적 욕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죄 된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품고 드러내는 죄의 욕망과 욕심’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치닫는 죄인의 욕망을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둘째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죄의 욕망은 주로 우리의 눈을 통해 자극되고 촉발되기 때문에‘안목’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시각 자체가 죄라는 말은 아니지요. 창세기에 최초의 여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장면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어요.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본즉’자연스럽게 그냥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바라보았는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멀리서 아리따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보고.’ 보긴 보았는데 그 시선을 돌이키지 못해서 죄악의 길로 치달았어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이 죄의 욕망을 충동질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정신을 떠받들고 있어요. 사람들이 즐겨 보는 연속극 내용이 모두 안목의 정욕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셋째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자신의 재능, 명예, 업적, 경력, 학력, 재산, 가문 등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생의 자랑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기도 하고, 내가 봉사한 것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교회 직분과 직책에 연연합니다. 이 모든 게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정신을 사랑해서도, 따라가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되, 세상 정신,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나타나는 세상을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정신으로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3. 세상과 세상 정신을 구별하기

이렇게  ‘세상’이란 단어를 둘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많은 혼란과 혼동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할 세상을 사랑하지 않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반대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시대정신)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타협하여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강한 어조로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약 4:4-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여기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정신을 따라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분열하고, 살인하고, 사랑이 없고, 돈과 쾌락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세속적인 정신과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없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 정신으로 꽉 차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원수 될 수밖에 없습니다.

4. 피해야 할 이원론적인 사고

여기서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이원론적 사고 방식이란 헬라철학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들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어렸을 때 강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올라가더라도 신발을 벗고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예배당이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인데 그중에서도 강단은 더욱더 신성하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원론적 사고 방식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교회의 일은 다 하나님 일이어서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반면에 세상 일, 가정이나 직장 일은 세속적이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교회와 연관된 모든 신앙행위는 신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그 당시 소위 신앙생활을 가장 잘한다고 자부심이 가득하던 바리새인들에게 계속 경고하셨겠습니까?

(마 6:1-2)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신앙행위를 본받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당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던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점에서 아주 잘하고 있었어요. 그럼 왜 책망을 받습니까?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2절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16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들의 문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런 고상한 신앙적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쇼로 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어요.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신앙행위는 있지만 그 신앙정신은 지극히 세속적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도 지극히 세상적일 수 있고, 세상 일을 하면서도 지극히 거룩한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났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3:1-2)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히 나타나는 교회였어요. 예언과 방언과 병 고침 은사가 풍성했어요. 그런데 이것이 그들을 신령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대 갓난아이에 불과했어요. 왜냐구요? (고전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인데 이를 통해 자기 의를 나타내고, 자기 영광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전히 시기와 분쟁의 모습, 즉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즉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배척해야 합니다. 교회 일만 거룩한 하나님 일이 아닙니다. 세상 정신으로 하면 하나님과 상관 없는 일이 됩니다. 반면에 세상 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하면 신령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처럼 죄가 아닌 이상, 세상 모든 일,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삶이 소극적이고, 후퇴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 밖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가정을 막론하고 모든 영역에서 신령한 것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 정신을 추종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려면 먼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 삶의 주가 되심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기도로 깨어 있어서 영적 분별력으로 세상 정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신앙생활에서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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