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01.12.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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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33회 작성일 Jan 13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월 12일
본문: 요한복음 17: 6-19
제목: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문이라고 일컫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세 대상,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시작하시며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는 말은 교회는 사도들의 전통과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의 전통과 가르침을 교회가 승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내용은 바로 교회를 위한 것이고, 오늘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어머니가 분만의 고통을 겪은 후에 낳은 아기를 생명처럼 사랑하듯이 우리 주님도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에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과 열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한 마디로 설명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이, 이 한 마디로 족합니다. 둘 사이에 사랑의 끈이 없다면 둘 사이는 거짓과 위선의 관계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교회 사이도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둘 관계를 묶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기에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본래 그 분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제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 영광의 옷을 보좌에 벗어 놓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천한 종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저 음부,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간 사랑, 그 사랑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결과 신부인 교회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모든 더러운 냄새 나는 죄와 불의의 옷을 다 벗기시고, 자신의 의로운 옷으로 교회에 입혀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신부로 치장해 주셨어요.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이토록 사랑하시기에 우리 주님은 신부인 교회를 향한 꿈과 소원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하시려는 것입니다. 티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어요. 눈에 걸리는 것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거룩하게 만들어서 흠이 없는 신부로 세워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그런 꿈과 소원을 우리 주님은 갖고 계십니다.
혼인예식 때 신부가 입장하면 모든 하객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드디어 그동안 아름답게 가꾸고 치장한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 아름다운 신부를 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합니다. 이처럼 장차 교회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 영광의 주님 앞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신부인 교회를 위해서 무슨 내용의 기도를 드리고 계실까요?
오늘 말씀은 한 두 시간 후에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치는 안타까운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며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이기도 합니다.
1. 하나 되게 하소서
제자들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11절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12절에서도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앞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아주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의 안전과 보전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보전될 수 없어요. 그런데 무엇을 위한 보전입니까? 하나 되기를 위한 보전입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와 같이’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나 됨과 같이 교회도 하나가 되도록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본질에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려면 우선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상대방을 위한 희생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연합,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어요. 어디서 이런 하나 됨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벽한 지식, 완전한 사랑, 절대적인 헌신을 가지고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사랑을 품고 돌보십니다.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하나 됨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교회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 단절된 사귐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고 두터운 벽들이 무너지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연합과 일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가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틀린 것을 옳게 하시고, 그른 것을 바르게 하시며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분열의 영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싸움을 만들뿐 아니라 교회마저 다투게 합니다.
오늘 제직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교회를 섬기면서 분열과 다툼의 영이 역사하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화해의 영으로 섬기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교회를 하나로 보전케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 됨을 지켜 나갈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엡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함.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흔들리거나 깨질 때,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하고, 거칠게 대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으로 피차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갈라지고 쪼개져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여러분들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항상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의 옷을 입고,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교회의 하나 됨을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을 함께 데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자들은 각자 사명 받은 대로 계속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 살되 '악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이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도 있을 겁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데... 얼마든지 신나게 놀 수 있지 않는가?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을 왜 악하다고 말하는가?’
그런데 성경은 세상이 영적 흑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영적 감각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 실존 상태를 이렇게 말해 줍니다.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래서 그 결과 어떤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엡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들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 신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짐승처럼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16절 아버지께 속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녀로 살려고 하면 세상의 강한 유혹이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속삭임으로,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온갖 함정을 파놓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의 공격이 있기에 구해 달라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시험에 빠지기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람과 물질로 인하여, 어떤 상황으로 인해 시험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기도 합니다. 제직들에게 가장 쉽게 찾아오는 시험이‘섭섭함’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수고한 후 괜히 섭섭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에 빠지면 곧 마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는 자들을 집어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과 영적 무장을 갖추어 잘 싸워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오늘도 기도하십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여 주옵소서”
3.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하나되게 하소서, 악에 빠지 않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쾌락적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죄의 충동에 빠져 거룩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거룩성을 훼손하게 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도 같습니다(마 10: 16).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험하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19:9절은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의 말씀으로 내면을 무장하고 나가면 우리는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이며 기준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절대 기준을 갖지 않겠다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 기준이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너는 네 좋은 것을 하고 나는 내 좋은 것을 하면 그만이지, 왜 네 좋은 것을 나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삶의 어떤 기준이 있고,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까? 디모데후서 3:1-5에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고, 남을 헐뜯고, 자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싫어하고, 배반하고, 조급하며, 거만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신앙심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능력은 거부할 것입니다”
절대 가치와 기준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본능과 충동에 이끌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일들을 매일 겪고 보고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부정해도 하나님 말씀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인생에게 절대 기준이 되고, 그 진리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갈릴리 해변 주변에 살던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부이고서도 갈릴리 바다의 거센 폭풍우를 무서워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을 때에도 졸음을 견디지 못해 잠들었을 만큼 의지가 굳세지도 못했습니다. 또 우리처럼 잊기도 잘해서 한번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떡을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적어 책망을 받기도 했고, 가르침을 빨리 깨닫지 못해 더디 깨닫는 자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경쟁하느라 서로 시기하고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셔서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핍박과 환란을 잘 이겨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이었지만, 예수님의 기도로 하나가 되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특색이 없었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오히려 때로는 부족한 듯 보이는 무리처럼 보였지만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하나로 보전되었습니다. 악에서 보전되었습니다. 진리로 거룩했습니다. 주님의 중보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처럼 거룩하게 살다 간 것입니다. 이 희생 위에 교회는 굳게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로 보존되게 하소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주님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에도 주님의 기도 열매가 풍성히 맺혀 지기를 기원합니다.
날짜: 2025년 1월 12일
본문: 요한복음 17: 6-19
제목: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문이라고 일컫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세 대상,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시작하시며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는 말은 교회는 사도들의 전통과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의 전통과 가르침을 교회가 승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내용은 바로 교회를 위한 것이고, 오늘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어머니가 분만의 고통을 겪은 후에 낳은 아기를 생명처럼 사랑하듯이 우리 주님도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에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과 열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한 마디로 설명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이, 이 한 마디로 족합니다. 둘 사이에 사랑의 끈이 없다면 둘 사이는 거짓과 위선의 관계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교회 사이도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둘 관계를 묶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기에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본래 그 분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제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 영광의 옷을 보좌에 벗어 놓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천한 종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저 음부,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간 사랑, 그 사랑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결과 신부인 교회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모든 더러운 냄새 나는 죄와 불의의 옷을 다 벗기시고, 자신의 의로운 옷으로 교회에 입혀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신부로 치장해 주셨어요.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이토록 사랑하시기에 우리 주님은 신부인 교회를 향한 꿈과 소원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하시려는 것입니다. 티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어요. 눈에 걸리는 것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거룩하게 만들어서 흠이 없는 신부로 세워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그런 꿈과 소원을 우리 주님은 갖고 계십니다.
혼인예식 때 신부가 입장하면 모든 하객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드디어 그동안 아름답게 가꾸고 치장한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 아름다운 신부를 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합니다. 이처럼 장차 교회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 영광의 주님 앞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신부인 교회를 위해서 무슨 내용의 기도를 드리고 계실까요?
오늘 말씀은 한 두 시간 후에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치는 안타까운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며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이기도 합니다.
1. 하나 되게 하소서
제자들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11절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12절에서도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앞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아주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의 안전과 보전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보전될 수 없어요. 그런데 무엇을 위한 보전입니까? 하나 되기를 위한 보전입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와 같이’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나 됨과 같이 교회도 하나가 되도록 보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본질에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려면 우선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상대방을 위한 희생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연합,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어요. 어디서 이런 하나 됨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벽한 지식, 완전한 사랑, 절대적인 헌신을 가지고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사랑을 품고 돌보십니다.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하나 됨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교회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 단절된 사귐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고 두터운 벽들이 무너지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연합과 일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가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틀린 것을 옳게 하시고, 그른 것을 바르게 하시며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분열의 영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싸움을 만들뿐 아니라 교회마저 다투게 합니다.
오늘 제직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교회를 섬기면서 분열과 다툼의 영이 역사하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화해의 영으로 섬기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교회를 하나로 보전케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 됨을 지켜 나갈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엡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함.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흔들리거나 깨질 때,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하고, 거칠게 대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으로 피차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갈라지고 쪼개져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여러분들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항상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의 옷을 입고,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교회의 하나 됨을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을 함께 데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자들은 각자 사명 받은 대로 계속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 살되 '악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이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도 있을 겁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데... 얼마든지 신나게 놀 수 있지 않는가?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을 왜 악하다고 말하는가?’
그런데 성경은 세상이 영적 흑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영적 감각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 실존 상태를 이렇게 말해 줍니다.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래서 그 결과 어떤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엡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들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 신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짐승처럼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16절 아버지께 속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녀로 살려고 하면 세상의 강한 유혹이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속삭임으로,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온갖 함정을 파놓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의 공격이 있기에 구해 달라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시험에 빠지기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람과 물질로 인하여, 어떤 상황으로 인해 시험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기도 합니다. 제직들에게 가장 쉽게 찾아오는 시험이‘섭섭함’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수고한 후 괜히 섭섭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에 빠지면 곧 마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는 자들을 집어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과 영적 무장을 갖추어 잘 싸워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오늘도 기도하십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여 주옵소서”
3.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하나되게 하소서, 악에 빠지 않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쾌락적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죄의 충동에 빠져 거룩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거룩성을 훼손하게 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도 같습니다(마 10: 16).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험하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19:9절은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의 말씀으로 내면을 무장하고 나가면 우리는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이며 기준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절대 기준을 갖지 않겠다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 기준이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너는 네 좋은 것을 하고 나는 내 좋은 것을 하면 그만이지, 왜 네 좋은 것을 나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삶의 어떤 기준이 있고,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까? 디모데후서 3:1-5에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고, 남을 헐뜯고, 자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싫어하고, 배반하고, 조급하며, 거만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신앙심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능력은 거부할 것입니다”
절대 가치와 기준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본능과 충동에 이끌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일들을 매일 겪고 보고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부정해도 하나님 말씀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인생에게 절대 기준이 되고, 그 진리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갈릴리 해변 주변에 살던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부이고서도 갈릴리 바다의 거센 폭풍우를 무서워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을 때에도 졸음을 견디지 못해 잠들었을 만큼 의지가 굳세지도 못했습니다. 또 우리처럼 잊기도 잘해서 한번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떡을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적어 책망을 받기도 했고, 가르침을 빨리 깨닫지 못해 더디 깨닫는 자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경쟁하느라 서로 시기하고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셔서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핍박과 환란을 잘 이겨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이었지만, 예수님의 기도로 하나가 되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특색이 없었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오히려 때로는 부족한 듯 보이는 무리처럼 보였지만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하나로 보전되었습니다. 악에서 보전되었습니다. 진리로 거룩했습니다. 주님의 중보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처럼 거룩하게 살다 간 것입니다. 이 희생 위에 교회는 굳게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로 보존되게 하소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주님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에도 주님의 기도 열매가 풍성히 맺혀 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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