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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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061회 작성일 Dec 30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2월 29일
본문: 이사야 5: 1-7
제목: 포도원의 노래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2024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 한 해 동안에도 우리 교회는 많은 도전과 은혜 속에서 걸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고, 믿음의 길을 더욱 굳건히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며,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농사를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땅을 갈아엎고 갈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파종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잡초를 뽑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여 알곡을 곡간에 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수확의 계절이 농부에게 있어서 제일 큰 기쁨의 시간일 것입니다.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이 들어 수확하게 될 때 그 기쁨은 대단한 것입니다. 마을에서는 농악을 앞세우고 축제가 벌어집니다. 흐뭇함과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그런데 병충해나 태풍의 피해를 입어서 농사를 완전히 실패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낙담과 좌절, 그리고 실망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농가에 깊게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한 해 농사가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데 하물며 우리 한 평생을 두고 맺는 인생의 열매는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열매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 열매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평생을 통해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는가? 지금 내 영혼의 창고에는 어떤 알곡이 쌓여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농사는 다시 지으면 됩니다. 태풍으로 병충해로 피해를 보았어도 내년에 다시 밭을 갈고 파종하고 수확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 농사는 오직 한 번입니다.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열매를 맺어 오셨습니까? 육체의 열매, 죄의 열매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열매, 거룩의 열매입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부터입니다. 지금 부터 나는 올바른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꿈과 기대
오늘 말씀 ‘포도원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껏 준비를 해 주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심히 기름진 산을 선택하셨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였습니다.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외부의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망대를 세웠습니다. 포도즙을 잘 짤 수 있도록 술틀까지 갖추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환경입니까? 4절에 보면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별 볼일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좋은 품종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거친 들판에 있는 들포도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방적인 은혜로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 주셨습니다(출19:6).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질 낮은 들포도나무를 극상품 포도나무로 품종개량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시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이를 시편 80:8절에서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가나안에 심으시고 장차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1, 2년이나, 10년, 20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인내하시면서 수 백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충분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대감 속에서 소망 가운데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엡 2:12). 모두 돌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롬 11:17).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시고,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된 인생으로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다가 생명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에 옮겨 심어 주셨습니다. 주위 성도들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섬세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통해 적절히 훈련도 시켜 주셨습니다. 최상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잔가지를 잘라 주고, 자극과 도전을 주는, 수준높은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함께 교제하며 봉사할 수 있는 동료들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포도원 입니까?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수고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포도나무의 열매
그렇다면 은혜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백성 답게 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엡 4:22-3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의 생명, 기쁨, 평강, 거룩, 사랑, 공의, 오래참음, 너그러우심, 용서…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이게 웬일입니까? 좋은 포도 맺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당연히 좋은 포도가 맺힐지 알았는데,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들포도’는 ‘시고 떫은 포도’ ‘맛이 없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포도’를 가리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썩은 포도, 악취 나는 포도”를 의미합니다.
좋은 포도를 맺도록 모든 조건을 다 배려해 주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악한 들포도를 맺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무나 실망스럽고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의 포도는 무엇입니까? 또 들포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열매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나라, 공평한 나라, 공법이 강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암 5:24).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폭력과 포학이 가득하고 부르짖음이 가득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의 남은 재산마저 탐하여 폭력으로 강탈하였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여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사라지고 불법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꾸었던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8절 이후에는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이 6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까지 분노하시겠습니까?
3. 본질적 문제
이렇게 된 이스라엘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5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6-9) “너는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신명기 28장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자녀의 복, 토지소산의 복, 가축의 복, 광주리에 복, 떡반죽 그릇에도 복, 들어와도 복 나가도 복,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1-13).
이렇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다윗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시편 1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이 주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고,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또 이것이 모든 인생의 문제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고통의 시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등장하는 둘째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자신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붙어있는 것이 너무 지겹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재미없고, 너무 얽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지면 훨씬 자유롭고, 훨씬 재미있고, 훨씬 능력 있고, 훨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자신했어요. 물론 처음에는 돈이 있어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 수록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질이 고갈되었어요. 가치관이 무너졌어요. 삶의 규모도, 질서도 없어지고 엉망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불어 닥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알거지가 되었어요. 몸과 마음이 황폐한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정 사정 없는 돼지주인까지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에...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로 가면 좋을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허랑 방탕하였고,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흉년이 들었고, 궁핍하게 되었고,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면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굴레를 벗어나면 자유롭고 재미있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나 홀로 잘 먹고 잘 살고, 남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낭비하는 인생이 되어 후회와 수치만이 남게 됩니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후에 드디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거기서 회군하여 그후 40여년을 광야에서 배회해야 했습니다. 출애굽할 때 세대의 장정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목적없이 유리방랑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40년 동안 허비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 말씀을 저버린 인생은 허비하고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그들에게 이제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담을 헐어버린다고 하십니다. 들짐승과 외적들이 와서 포도원을 다 짓밟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 보호하시지 않습니다. 더 이상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도 안 해 주시고, 북 돋아 주시지 않습니다. 찔레와 가시가 자라서 가시밭이 되게 하십니다. 비도 내리지 않아서 포도원이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립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현대인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하나님 없이도 유토피아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교만했습니다. 불과 몇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가자 선진국이요 강대국이라 불리던 나라들도 쩔쩔 매었습니다. 이제 까맣게 잊고서 다시 교만해졌습니다. 현재도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이나, 인재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동안 전세계에 상품을 팔아 돈을 쓸어 담던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이제는 불경기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황폐함이 심화되어 갑니다.
4. 문제 해결의 열쇠
여러분은 어디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과학기술입니까? 경제회복입니까? 정치력입니까? 군사력입니까? 문제 해결은 우리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이 현재도, 그리고 영원히 온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통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도모하는 일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 아니하시면 모든 노력도 무위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면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4절)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겠는가?!’라는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분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아기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으로 사셨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공유하셨고, 죄 많은 세상과 죄인들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일들을 겪으셨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과 수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가리키시며 온 세상에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의 모든 죄를 사해 줄 것이다. 나와 화목하게 될 것이다. 새 성품과 새 출발과 새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성령도 너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너희를 온전케 할 것이고, 결국 영원한 영광 가운데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줄 것이다.”
여기에 세상의 모든 종교과 기독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그래 이제 부터 더 열심히 정성을 보이자. 지성이면 감천하겠지’하면서 자기 의로써 가득 채우도록 독려합니다. 마치 내 노력과 열심에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리가 자극을 받고 열심을 내려고 다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전격적으로 구원하셨고, 그 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뜬 우리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극상품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 위해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사랑하며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요 15:11,1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기쁨이 충만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이거나 억지가 아니라 그 안에 자유가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풍성한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탕자처럼 하나님을 오해해서 그 품을 떠나는 것이 자유요 행복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독재자처럼 일방적으로 우리를 못살게 굴고, 행복과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으로 우리를 부리며 착취하고 약탈해 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많이 맺어야만 한다”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품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풍성한 인생, 형통한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시 1:3).
날짜: 2024년 12월 29일
본문: 이사야 5: 1-7
제목: 포도원의 노래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2024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 한 해 동안에도 우리 교회는 많은 도전과 은혜 속에서 걸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고, 믿음의 길을 더욱 굳건히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며,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농사를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땅을 갈아엎고 갈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파종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잡초를 뽑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여 알곡을 곡간에 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수확의 계절이 농부에게 있어서 제일 큰 기쁨의 시간일 것입니다.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이 들어 수확하게 될 때 그 기쁨은 대단한 것입니다. 마을에서는 농악을 앞세우고 축제가 벌어집니다. 흐뭇함과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그런데 병충해나 태풍의 피해를 입어서 농사를 완전히 실패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낙담과 좌절, 그리고 실망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농가에 깊게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한 해 농사가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데 하물며 우리 한 평생을 두고 맺는 인생의 열매는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열매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 열매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평생을 통해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는가? 지금 내 영혼의 창고에는 어떤 알곡이 쌓여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농사는 다시 지으면 됩니다. 태풍으로 병충해로 피해를 보았어도 내년에 다시 밭을 갈고 파종하고 수확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 농사는 오직 한 번입니다.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열매를 맺어 오셨습니까? 육체의 열매, 죄의 열매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열매, 거룩의 열매입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부터입니다. 지금 부터 나는 올바른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꿈과 기대
오늘 말씀 ‘포도원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껏 준비를 해 주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심히 기름진 산을 선택하셨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였습니다.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외부의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망대를 세웠습니다. 포도즙을 잘 짤 수 있도록 술틀까지 갖추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환경입니까? 4절에 보면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별 볼일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좋은 품종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거친 들판에 있는 들포도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방적인 은혜로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 주셨습니다(출19:6).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질 낮은 들포도나무를 극상품 포도나무로 품종개량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시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이를 시편 80:8절에서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가나안에 심으시고 장차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1, 2년이나, 10년, 20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인내하시면서 수 백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충분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대감 속에서 소망 가운데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엡 2:12). 모두 돌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롬 11:17).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시고,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된 인생으로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다가 생명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에 옮겨 심어 주셨습니다. 주위 성도들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섬세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통해 적절히 훈련도 시켜 주셨습니다. 최상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잔가지를 잘라 주고, 자극과 도전을 주는, 수준높은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함께 교제하며 봉사할 수 있는 동료들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포도원 입니까?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수고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포도나무의 열매
그렇다면 은혜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백성 답게 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엡 4:22-3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의 생명, 기쁨, 평강, 거룩, 사랑, 공의, 오래참음, 너그러우심, 용서…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이게 웬일입니까? 좋은 포도 맺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당연히 좋은 포도가 맺힐지 알았는데,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들포도’는 ‘시고 떫은 포도’ ‘맛이 없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포도’를 가리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썩은 포도, 악취 나는 포도”를 의미합니다.
좋은 포도를 맺도록 모든 조건을 다 배려해 주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악한 들포도를 맺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무나 실망스럽고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의 포도는 무엇입니까? 또 들포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열매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나라, 공평한 나라, 공법이 강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암 5:24).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폭력과 포학이 가득하고 부르짖음이 가득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의 남은 재산마저 탐하여 폭력으로 강탈하였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압제하여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사라지고 불법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꾸었던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8절 이후에는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이 6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까지 분노하시겠습니까?
3. 본질적 문제
이렇게 된 이스라엘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5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을 멸시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6-9) “너는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신명기 28장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자녀의 복, 토지소산의 복, 가축의 복, 광주리에 복, 떡반죽 그릇에도 복, 들어와도 복 나가도 복,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1-13).
이렇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다윗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시편 1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이 주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고,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또 이것이 모든 인생의 문제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고통의 시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등장하는 둘째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자신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붙어있는 것이 너무 지겹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재미없고, 너무 얽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지면 훨씬 자유롭고, 훨씬 재미있고, 훨씬 능력 있고, 훨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자신했어요. 물론 처음에는 돈이 있어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 수록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질이 고갈되었어요. 가치관이 무너졌어요. 삶의 규모도, 질서도 없어지고 엉망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불어 닥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알거지가 되었어요. 몸과 마음이 황폐한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정 사정 없는 돼지주인까지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에...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로 가면 좋을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허랑 방탕하였고,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흉년이 들었고, 궁핍하게 되었고,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면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굴레를 벗어나면 자유롭고 재미있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나 홀로 잘 먹고 잘 살고, 남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낭비하는 인생이 되어 후회와 수치만이 남게 됩니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후에 드디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거기서 회군하여 그후 40여년을 광야에서 배회해야 했습니다. 출애굽할 때 세대의 장정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목적없이 유리방랑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40년 동안 허비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 말씀을 저버린 인생은 허비하고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그들에게 이제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담을 헐어버린다고 하십니다. 들짐승과 외적들이 와서 포도원을 다 짓밟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 보호하시지 않습니다. 더 이상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도 안 해 주시고, 북 돋아 주시지 않습니다. 찔레와 가시가 자라서 가시밭이 되게 하십니다. 비도 내리지 않아서 포도원이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립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현대인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하나님 없이도 유토피아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교만했습니다. 불과 몇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가자 선진국이요 강대국이라 불리던 나라들도 쩔쩔 매었습니다. 이제 까맣게 잊고서 다시 교만해졌습니다. 현재도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이나, 인재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동안 전세계에 상품을 팔아 돈을 쓸어 담던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이제는 불경기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황폐함이 심화되어 갑니다.
4. 문제 해결의 열쇠
여러분은 어디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과학기술입니까? 경제회복입니까? 정치력입니까? 군사력입니까? 문제 해결은 우리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이 현재도, 그리고 영원히 온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통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도모하는 일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 아니하시면 모든 노력도 무위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면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4절)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겠는가?!’라는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분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아기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으로 사셨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공유하셨고, 죄 많은 세상과 죄인들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일들을 겪으셨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과 수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가리키시며 온 세상에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의 모든 죄를 사해 줄 것이다. 나와 화목하게 될 것이다. 새 성품과 새 출발과 새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성령도 너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너희를 온전케 할 것이고, 결국 영원한 영광 가운데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줄 것이다.”
여기에 세상의 모든 종교과 기독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그래 이제 부터 더 열심히 정성을 보이자. 지성이면 감천하겠지’하면서 자기 의로써 가득 채우도록 독려합니다. 마치 내 노력과 열심에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리가 자극을 받고 열심을 내려고 다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전격적으로 구원하셨고, 그 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뜬 우리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극상품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 위해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사랑하며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요 15:11,1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기쁨이 충만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이거나 억지가 아니라 그 안에 자유가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풍성한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탕자처럼 하나님을 오해해서 그 품을 떠나는 것이 자유요 행복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독재자처럼 일방적으로 우리를 못살게 굴고, 행복과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으로 우리를 부리며 착취하고 약탈해 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많이 맺어야만 한다”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 안에 거하라”고 초청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품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풍성한 인생, 형통한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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