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소원, 교회의 소원 (01.05.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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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86회 작성일 Jan 06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월 5일
본문: 요한복음 17: 1-5
제목: 예수님의 소원, 교회의 소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서론: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과 아울러 희망을 품습니다. 소원하는 것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동기와 의욕을 갖습니다. 여러분의 새해 소원은 무엇인가요? 그 소원한 바대로 우리가 한 해를 잘 살아낸다면 과연 연말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전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약 전혀 없을 거라고 한다면 자기기만이 되겠지요. 그 누가 완벽히 소원을 성취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늘 후회와 회한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에게는 과거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생의 긴 여정을 걸으며 기쁨과 성취를 맛보았지만, 동시에 하지 못한 일들, 놓친 기회들, 그리고 지나쳐간 소중한 순간들에 대해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후회는 단순히 아쉬움이 아니라, 삶의 진리를 드러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것
노인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일입니다. 부모님께 감사의 말을 더 자주 했더라면, 배우자에게 사랑을 더 자주 고백했더라면, 자녀들에게 지지를 더 많이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큽니다. 사랑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2) 건강을 소홀히 한 것
청춘의 시절에는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면 젊을 때 돌보지 못했던 몸이 고통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들은 “그때 조금만 더 운동을 했더라면, 술과 담배를 멀리했더라면 지금의 삶이 더 나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며 건강의 소중함을 되새깁니다.
3) 꿈을 포기한 것
많은 노인들이 젊은 시절 자신의 꿈을 쫓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안정적인 직장이나 사회적 기대에 얽매여 자신의 열정과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던 시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이런 생각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용기가 내리기가 그 당시에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4) 시간을 낭비한 것
노년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나간 시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무의미한 걱정과 불필요한 감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차라리 그 순간을 더 즐겼더라면, 더 웃었더라면, 더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5) 관계의 소홀함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던 순간들도 깊은 후회를 남깁니다. 중요한 날에 함께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다툼으로 소중한 관계를 잃은 기억은 노년에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렇게 후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그것은 또한 삶의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특히 노인들이 후회 속에서 발견한 삶의 진리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당장 사랑한다고 말하라.”그래서 올해 우리 모두 후회가 아닌 감사와 희망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살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분은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후회없는 인생을 살으셨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분이 확실한 삶의 목적과 소원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을 가리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데 그 긴 기도의 첫 마디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시간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소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개봉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하얼빈>의 주인공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에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당신들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뿐이오.” 김구 선생도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다”고 절규했습니다. 그 한 가지 소원 때문에 그는 19살의 나이에 집을 나가 독립운동에 뛰어 든 이후로 70이 넘어 귀국하기까지 온갖 역경과 위험과 서러움을 다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소원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서 가장 먼저 들고 나오는 내용은 곧 예수님이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소원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하는 소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일생을 그 목적을 향하여,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살으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분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암송하는 웨스트민스터의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을 아실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인생의 첫 번째 존재 이유입니까?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이 단순히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아갈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가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쾌락과 성공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갑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사셨고 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 먼저 예수님 자신이 영화롭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1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제 자신이 먼저 영광스러워져야겠습니다’는 의미입니다. 잘난 아들을 두면 아버지가 영광을 받습니다. 아무개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냐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성취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할까요? 나의 재능, 학문, 능력, 신앙, 아름다움, 물질, 권력, 명예, 선행 등 입니까? 이런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드린들, 무슨 일을 성취한들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때가 무슨 때입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입니다. 2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결연히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그 분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증언합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예수께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이 수치와 패배가 되지 않고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해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어요.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씩 전진해 가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왜 십자가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어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이 드러났어요. 이를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보이셨어요. 십자가를 보면 아무도 이를 핑계할 수 없어요.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줄 만큼 내가 이토록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취할 영광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맡겨주신 일을 다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다 성취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했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시킨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에 영생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일이었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이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영생’(永生)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영원히 길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 즉 죽지 않는 생명은 지옥에도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도 영원히 사는데 이를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야말로 소망이 전혀 없는 가장 비참한 생명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은 영원히 산다는 뜻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질입니다.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영생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명이야말로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림자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찬양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 없는 거룩과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다. 3절에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천상천하 만물에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신입니다. 그외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신이고 우상입니다. 오직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초월자이자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아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차원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 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그 분을 알게 되니 여기에 믿음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다’와 ‘믿는다’는 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안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고(믿게 되고), 하나님을 앎으로써(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 드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일은 바로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복음을 전파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수고하며 봉사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차담당으로, 안내위원으로, 친교위원으로, 영상과 음향으로,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수고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느냐,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생은 바로 그 소원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 자태를 볼 수 있기를 앙망했습니다. 이 소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가슴에도 이러한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한 밤중에 눈을 떴을 때에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도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소원과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원을 가지고 올해도 가정에서 자녀와 손주를 기도하며 키우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여러분의 물질을 쓰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을 쓰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광이었던 것처럼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 성도에게도 영광의 자리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것은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입니다.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혈기와 악한 습관, 세속적인 욕망과 정욕,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김치는 다섯 번 죽어야 영광을 얻는다고 합니다. 땅에서 송두리째 뽑힐 때 한 번, 김치 담으려고 반으로 쪼갤 때 두 번, 소금물로 절일 때 세 번, 고춧가루로 버무릴 때 네 번, 입속에서 가루가 될 때 다섯 번, 이렇게 해야 배추가 김치가 되어 그 구실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에 비로소 성도다운 성도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것만을 소원으로 삼고 살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밝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날짜: 2025년 1월 5일
본문: 요한복음 17: 1-5
제목: 예수님의 소원, 교회의 소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서론: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과 아울러 희망을 품습니다. 소원하는 것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동기와 의욕을 갖습니다. 여러분의 새해 소원은 무엇인가요? 그 소원한 바대로 우리가 한 해를 잘 살아낸다면 과연 연말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전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약 전혀 없을 거라고 한다면 자기기만이 되겠지요. 그 누가 완벽히 소원을 성취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늘 후회와 회한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에게는 과거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생의 긴 여정을 걸으며 기쁨과 성취를 맛보았지만, 동시에 하지 못한 일들, 놓친 기회들, 그리고 지나쳐간 소중한 순간들에 대해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후회는 단순히 아쉬움이 아니라, 삶의 진리를 드러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것
노인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일입니다. 부모님께 감사의 말을 더 자주 했더라면, 배우자에게 사랑을 더 자주 고백했더라면, 자녀들에게 지지를 더 많이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큽니다. 사랑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2) 건강을 소홀히 한 것
청춘의 시절에는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면 젊을 때 돌보지 못했던 몸이 고통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들은 “그때 조금만 더 운동을 했더라면, 술과 담배를 멀리했더라면 지금의 삶이 더 나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며 건강의 소중함을 되새깁니다.
3) 꿈을 포기한 것
많은 노인들이 젊은 시절 자신의 꿈을 쫓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안정적인 직장이나 사회적 기대에 얽매여 자신의 열정과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던 시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이런 생각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용기가 내리기가 그 당시에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4) 시간을 낭비한 것
노년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나간 시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무의미한 걱정과 불필요한 감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차라리 그 순간을 더 즐겼더라면, 더 웃었더라면, 더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5) 관계의 소홀함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던 순간들도 깊은 후회를 남깁니다. 중요한 날에 함께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다툼으로 소중한 관계를 잃은 기억은 노년에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렇게 후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그것은 또한 삶의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특히 노인들이 후회 속에서 발견한 삶의 진리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당장 사랑한다고 말하라.”그래서 올해 우리 모두 후회가 아닌 감사와 희망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살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분은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후회없는 인생을 살으셨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분이 확실한 삶의 목적과 소원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을 가리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데 그 긴 기도의 첫 마디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시간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소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개봉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하얼빈>의 주인공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에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당신들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뿐이오.” 김구 선생도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다”고 절규했습니다. 그 한 가지 소원 때문에 그는 19살의 나이에 집을 나가 독립운동에 뛰어 든 이후로 70이 넘어 귀국하기까지 온갖 역경과 위험과 서러움을 다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소원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서 가장 먼저 들고 나오는 내용은 곧 예수님이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소원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하는 소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일생을 그 목적을 향하여,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살으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분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암송하는 웨스트민스터의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을 아실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인생의 첫 번째 존재 이유입니까?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이 단순히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아갈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가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쾌락과 성공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갑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사셨고 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 먼저 예수님 자신이 영화롭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1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제 자신이 먼저 영광스러워져야겠습니다’는 의미입니다. 잘난 아들을 두면 아버지가 영광을 받습니다. 아무개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냐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성취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할까요? 나의 재능, 학문, 능력, 신앙, 아름다움, 물질, 권력, 명예, 선행 등 입니까? 이런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드린들, 무슨 일을 성취한들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때가 무슨 때입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입니다. 2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결연히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그 분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증언합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예수께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이 수치와 패배가 되지 않고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해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어요.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씩 전진해 가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왜 십자가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어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이 드러났어요. 이를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보이셨어요. 십자가를 보면 아무도 이를 핑계할 수 없어요.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줄 만큼 내가 이토록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취할 영광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맡겨주신 일을 다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다 성취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했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시킨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에 영생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일이었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이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영생’(永生)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영원히 길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 즉 죽지 않는 생명은 지옥에도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도 영원히 사는데 이를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야말로 소망이 전혀 없는 가장 비참한 생명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은 영원히 산다는 뜻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질입니다.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영생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명이야말로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림자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찬양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 없는 거룩과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다. 3절에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천상천하 만물에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신입니다. 그외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신이고 우상입니다. 오직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초월자이자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아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차원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 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그 분을 알게 되니 여기에 믿음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다’와 ‘믿는다’는 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안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고(믿게 되고), 하나님을 앎으로써(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 드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일은 바로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복음을 전파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수고하며 봉사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차담당으로, 안내위원으로, 친교위원으로, 영상과 음향으로,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수고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느냐,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생은 바로 그 소원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 자태를 볼 수 있기를 앙망했습니다. 이 소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가슴에도 이러한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한 밤중에 눈을 떴을 때에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도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소원과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원을 가지고 올해도 가정에서 자녀와 손주를 기도하며 키우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여러분의 물질을 쓰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을 쓰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광이었던 것처럼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 성도에게도 영광의 자리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것은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입니다.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혈기와 악한 습관, 세속적인 욕망과 정욕,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김치는 다섯 번 죽어야 영광을 얻는다고 합니다. 땅에서 송두리째 뽑힐 때 한 번, 김치 담으려고 반으로 쪼갤 때 두 번, 소금물로 절일 때 세 번, 고춧가루로 버무릴 때 네 번, 입속에서 가루가 될 때 다섯 번, 이렇게 해야 배추가 김치가 되어 그 구실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자리에 설 때에 비로소 성도다운 성도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것만을 소원으로 삼고 살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밝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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