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나셨도다 (12.22.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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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43회 작성일 Dec 23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마태복음 2: 1-6
제목: 왕이 나셨도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시한 인생, 사나마나한 인생을 가리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별 볼 일 있는 인생’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별 볼 일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광명한 새벽 별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 별이 되십니다.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 인생을 경성시키는 별이 되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희망의 빛을 주시는 별이십니다. 무기력 가운데 있는 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시는 별이십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는 별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별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현실의 유익과 실리를 따라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특히 돈과 재물, 인기와 권력, 재미와 쾌락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도 지극히 현세적이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까지도 물질적인 축복과 현실적인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하나님은 마치 요술 램프에서 나오는 요정 ‘지니’와도 같습니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하루밤 사이에 화려한 궁전을 뚝딱 만들어 줄 수 있을 만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시장 좀도둑에 불과했던 알라딘을 왕자로 만들어 주고, 공주와 결혼하게 만들어 줄 만큼 능력을 가진 자이지만 램프의 주인 알라딘의 손에 완전히 장악 되어 있는 종에 불과합니다. 알라딘에게 꼼짝 못하고 그가 명령을 내리는 대로 이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신이 아니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는 신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해서 만들어 진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이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김이곤 씨의 소설 “손길”(원제:새로운 시작)에서 주인공 리건은 바로 이 엄연한 진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내 믿음은 한낱 욕심에 불과했다. 내 자신의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난 누구든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만 해준다면 그 자를 예배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게만 해준다면, 나는 그 자도 예배했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나의 왕이 아니었다. 누굴, 왜 예배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내 인생의 왕좌엔 여전히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오, 예수님!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폭군처럼 군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이제 자발적으로 기쁜 맘으로 그 분을 섬깁니다. 내 인생의 왕좌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내가 움켜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왕 되신 주 앞에 나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간절한 마음을 찬양을 바칩니다.
오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축하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그 분을 내 삶의 왕, 내 인생의 목자로서 믿고서, 그 분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며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별을 찾은 박사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헤롯은 정치적 수완과 모략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약관 25세에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의 혈통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으로서 본래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모술수가 능하여 로마에 있는 고위층에게 로비를 잘 한 덕택에 유대의 왕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극장과 경기장 등을 건설하는 등 문화사업에 힘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항상 반란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반항의 조짐이 보였다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감쪽같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까지도 죽여 버릴 정도로 잔혹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헤롯이 나라를 통치하는 41년 동안 제대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처럼 절망적이고,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탄생하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 없고, 그 잔인한 헤롯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한 가운데 아기 예수로 조용히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땅도 아니고 저 멀리 동방에서 부터 메시아의 탄생 사실을 예감하고 이 유대땅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로서 초대 교회 전승에 의하면 바벨로 출신의 가스팔, 메키올, 발다살이라는 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magi)’란 고대 페르시아, 아니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학자, 점성술사, 또는 종교학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별자리를 연구하여 신의 뜻과 인생과 국가와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고자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메시아의 출현을 대망하는 신앙과 사상에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대의 역사와 철학, 천문학 등에 정통한 박사들로서, 메시아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메시아가 인류역사를 위해 뭔가 큰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관찰하던 그들은 어느 날 마침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크고도 환한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선명하고, 유난히 반짝이는 메시아의 별을 보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 분은 과연 어디에서 태어 나실까?’ 마침내 그들은 그 별의 주인공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차가운 사막의 모랫바람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헤롯 궁으로 들어가 메시아의 탄생지를 묻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여기서 우리는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 머나먼 길을 따라온 동방 박사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를 향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진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현실적인 유익을 주는 일을 위해서라면 밤을 새워 노력을 하고 별의 별 고생을 다합니다.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횡재의 꿈을 꾸며 금을 캐기 위해 서부로 서부로 달려 갔습니다. 여러 가지 기후의 악조건과 계곡에 숨어있는 인디언들의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서부를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황금을 발견하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얻고,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지노에서 며칠 밤을 새우며 끼니를 걸러가면서까지 도박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도 혹시 대박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허황된 기대감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은 메시야를 만난다고 해서 어떤 현실적 유익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병을 치유함 받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거나, 학문적인 업적을 쌓아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거나, 아니면 무슨 신비한 비법을 전수 받아서 도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처럼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고 머나먼 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그들이 별의 주인공인 메사아를 만나고, 그에게 단지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We have come to worship him" "worship" 이것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본래 worship이란 worth+ship의 줄임말로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열망과 충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는 부와 명예와 쾌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것들을 다 소유하고, 즐겨봐도 그것이 정말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도 아마 사는 날 동안 여러 왕들을 거치고, 여러 시대를 지내오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인생의 재미와 즐거움들을 다 누려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순간적일 뿐이지 영원한 가치가 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고백했던 것처럼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땅엣 것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되었고, 위엣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메시아의 별을 보게 되었고, 그 별의 주인공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별이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 것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절).
우리는 매일 답답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뉴스를 시청하면 비극적이고 잔인한 뉴스가 먼저 시선을 끕니다. 그래서 뉴스를 시청하면 할 수록 우울해집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광명한 새벽 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요, 진정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이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이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달려들어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예수님의 첫 번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나 기뻐서 자신의 형제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내면에서 억누를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진리의 별이요,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희망을 되찾고, 샘솟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이스라엘의 왕과 목자가 되신 예수님
6절을 보십시오. 6절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왜 그처럼 기뻐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예수님은 통치하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열왕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열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폭력과 전쟁, 세금과 억압 등을 통해 다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사무엘상 8:10-18).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고 동원합니다. 헤롯왕은 백성들을 폭력과 음모와 술수로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근심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의 왕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마가복음 10:45). 그는 겸손과 희생, 사랑과 공평으로 다스립니다(요한복음 13:3-5).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와 평강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십니다.
그 분은 또한 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은 양과 같이 무지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대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처럼 지혜롭고 명석하며, 능력이 많은 존재가 없는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정말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생명의 꼴을 풍성히 공급해 주시는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온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의 인생의 짐과 죄 짐을 대시 짊어져 주시는 사랑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어 주시고, 허물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섬김의 목자가 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세상은 겉모양은 목자인 체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삯군이나 이리로 돌변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도 양들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심으로써 우리의 참 목자라 되심을 친히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요 10:10,11)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로부터 영원토록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자기의 목숨까지 희생하시다니! 이는 정말 감격스럽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은 그들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다같이 11절을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집에서 부터 가지고 온 귀중한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예물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신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황금은 그의 왕권을, 유향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나타냅니다. 몰약은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죽으실 희생양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사들은 이 예물을 출발할 때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탄축하 주일을 맞이한 이 아침 우리는 어떤 마음의 준비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까?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와 찬양의 보배합을 열어 드림으로써 하늘의 기쁨이 우리 심령에 충만히 임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다스리는 자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하였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렸습니다. 때문에 원치 않게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죄의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안되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영롱한 삶, 빛나는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안되었습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어둡고, 추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사망권세가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참된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왕,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왕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라를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나라는 그 영혼이 피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실 때에 우리의 내면은 화평케 됩니다. 항상 기쁨과 은혜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진심과 열정을 다 바치며 섬겨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고와 헌신을 다 아시고, 받아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왕으로서 예수님이 진정으로 통치하시며 다스리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마태복음 2: 1-6
제목: 왕이 나셨도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시한 인생, 사나마나한 인생을 가리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별 볼 일 있는 인생’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별 볼 일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광명한 새벽 별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 별이 되십니다.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 인생을 경성시키는 별이 되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희망의 빛을 주시는 별이십니다. 무기력 가운데 있는 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시는 별이십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는 별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별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현실의 유익과 실리를 따라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특히 돈과 재물, 인기와 권력, 재미와 쾌락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도 지극히 현세적이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까지도 물질적인 축복과 현실적인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하나님은 마치 요술 램프에서 나오는 요정 ‘지니’와도 같습니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하루밤 사이에 화려한 궁전을 뚝딱 만들어 줄 수 있을 만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시장 좀도둑에 불과했던 알라딘을 왕자로 만들어 주고, 공주와 결혼하게 만들어 줄 만큼 능력을 가진 자이지만 램프의 주인 알라딘의 손에 완전히 장악 되어 있는 종에 불과합니다. 알라딘에게 꼼짝 못하고 그가 명령을 내리는 대로 이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신이 아니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는 신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해서 만들어 진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이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김이곤 씨의 소설 “손길”(원제:새로운 시작)에서 주인공 리건은 바로 이 엄연한 진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내 믿음은 한낱 욕심에 불과했다. 내 자신의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난 누구든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만 해준다면 그 자를 예배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게만 해준다면, 나는 그 자도 예배했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나의 왕이 아니었다. 누굴, 왜 예배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내 인생의 왕좌엔 여전히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오, 예수님!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폭군처럼 군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이제 자발적으로 기쁜 맘으로 그 분을 섬깁니다. 내 인생의 왕좌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내가 움켜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왕 되신 주 앞에 나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간절한 마음을 찬양을 바칩니다.
오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축하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그 분을 내 삶의 왕, 내 인생의 목자로서 믿고서, 그 분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며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별을 찾은 박사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헤롯은 정치적 수완과 모략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약관 25세에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의 혈통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으로서 본래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모술수가 능하여 로마에 있는 고위층에게 로비를 잘 한 덕택에 유대의 왕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극장과 경기장 등을 건설하는 등 문화사업에 힘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항상 반란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반항의 조짐이 보였다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감쪽같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까지도 죽여 버릴 정도로 잔혹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헤롯이 나라를 통치하는 41년 동안 제대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처럼 절망적이고,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탄생하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 없고, 그 잔인한 헤롯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한 가운데 아기 예수로 조용히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땅도 아니고 저 멀리 동방에서 부터 메시아의 탄생 사실을 예감하고 이 유대땅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로서 초대 교회 전승에 의하면 바벨로 출신의 가스팔, 메키올, 발다살이라는 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magi)’란 고대 페르시아, 아니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학자, 점성술사, 또는 종교학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별자리를 연구하여 신의 뜻과 인생과 국가와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고자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메시아의 출현을 대망하는 신앙과 사상에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대의 역사와 철학, 천문학 등에 정통한 박사들로서, 메시아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메시아가 인류역사를 위해 뭔가 큰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관찰하던 그들은 어느 날 마침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크고도 환한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선명하고, 유난히 반짝이는 메시아의 별을 보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 분은 과연 어디에서 태어 나실까?’ 마침내 그들은 그 별의 주인공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차가운 사막의 모랫바람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헤롯 궁으로 들어가 메시아의 탄생지를 묻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여기서 우리는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 머나먼 길을 따라온 동방 박사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를 향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진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현실적인 유익을 주는 일을 위해서라면 밤을 새워 노력을 하고 별의 별 고생을 다합니다.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횡재의 꿈을 꾸며 금을 캐기 위해 서부로 서부로 달려 갔습니다. 여러 가지 기후의 악조건과 계곡에 숨어있는 인디언들의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서부를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황금을 발견하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얻고,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지노에서 며칠 밤을 새우며 끼니를 걸러가면서까지 도박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도 혹시 대박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허황된 기대감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은 메시야를 만난다고 해서 어떤 현실적 유익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병을 치유함 받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거나, 학문적인 업적을 쌓아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거나, 아니면 무슨 신비한 비법을 전수 받아서 도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처럼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고 머나먼 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그들이 별의 주인공인 메사아를 만나고, 그에게 단지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We have come to worship him" "worship" 이것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본래 worship이란 worth+ship의 줄임말로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열망과 충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는 부와 명예와 쾌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것들을 다 소유하고, 즐겨봐도 그것이 정말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도 아마 사는 날 동안 여러 왕들을 거치고, 여러 시대를 지내오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인생의 재미와 즐거움들을 다 누려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순간적일 뿐이지 영원한 가치가 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고백했던 것처럼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땅엣 것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되었고, 위엣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메시아의 별을 보게 되었고, 그 별의 주인공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별이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 것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절).
우리는 매일 답답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뉴스를 시청하면 비극적이고 잔인한 뉴스가 먼저 시선을 끕니다. 그래서 뉴스를 시청하면 할 수록 우울해집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광명한 새벽 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요, 진정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이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이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달려들어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예수님의 첫 번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나 기뻐서 자신의 형제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내면에서 억누를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진리의 별이요,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희망을 되찾고, 샘솟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이스라엘의 왕과 목자가 되신 예수님
6절을 보십시오. 6절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왜 그처럼 기뻐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예수님은 통치하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열왕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열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폭력과 전쟁, 세금과 억압 등을 통해 다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사무엘상 8:10-18).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고 동원합니다. 헤롯왕은 백성들을 폭력과 음모와 술수로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근심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의 왕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마가복음 10:45). 그는 겸손과 희생, 사랑과 공평으로 다스립니다(요한복음 13:3-5).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와 평강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십니다.
그 분은 또한 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은 양과 같이 무지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대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처럼 지혜롭고 명석하며, 능력이 많은 존재가 없는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정말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생명의 꼴을 풍성히 공급해 주시는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온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의 인생의 짐과 죄 짐을 대시 짊어져 주시는 사랑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어 주시고, 허물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섬김의 목자가 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세상은 겉모양은 목자인 체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삯군이나 이리로 돌변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도 양들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심으로써 우리의 참 목자라 되심을 친히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요 10:10,11)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로부터 영원토록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자기의 목숨까지 희생하시다니! 이는 정말 감격스럽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은 그들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다같이 11절을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집에서 부터 가지고 온 귀중한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예물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신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황금은 그의 왕권을, 유향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나타냅니다. 몰약은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죽으실 희생양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사들은 이 예물을 출발할 때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탄축하 주일을 맞이한 이 아침 우리는 어떤 마음의 준비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까?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와 찬양의 보배합을 열어 드림으로써 하늘의 기쁨이 우리 심령에 충만히 임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다스리는 자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하였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렸습니다. 때문에 원치 않게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죄의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안되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영롱한 삶, 빛나는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안되었습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어둡고, 추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사망권세가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참된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왕,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왕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라를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나라는 그 영혼이 피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실 때에 우리의 내면은 화평케 됩니다. 항상 기쁨과 은혜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진심과 열정을 다 바치며 섬겨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고와 헌신을 다 아시고, 받아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왕으로서 예수님이 진정으로 통치하시며 다스리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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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GKY1WDR-hqA 675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