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직분자로 살라 (12.08.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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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빛의 직분자로 살라 (12.08.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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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061회 작성일 Dec 09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2월 8일
본문: 고후 4:1-6
제목: 빛의 직분자로 살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 주일 오후에 장로 권사 임직식을 갖습니다. 임직 받으시는 분들에게는 축하를 드립니다. 물론 이 직분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금전적인 혜택을 입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눈물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열과 성을 다해서 교회를 섬기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되는 직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세운 직분이기에 이처럼 영광스러운 자리도 없다고 믿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와도 같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자리였지만,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직분자에게는 영광과 욕됨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신령하지 않으면 잘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 충만, 믿음 충만, 지혜 충만한 일곱 집사를 세워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저들이 임직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왕으로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부을 때 성령 충만하여 새 마음을 주셨던 것처럼 저들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물론 임직 받는 분들만이 하나님의 귀한 직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으로 우리 모두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워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함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언약을 지킬 힘이 없음을 아시기에 새 언약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믿는 자에게 누구든지,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는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또한 은혜 받은 자로서 새 언약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과 특권이고 하나님 백성으로 주어진 책임과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떤 자세로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했는지(1-4절), 그리고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 선포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줍니다(5-6절). 우리도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신 직분에 잘 감당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낙심하지 맙시다(1절)

(고후 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았으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기독교 역사 한 줄기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회심하는 장면입니다. 이웃나라 도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영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정오 햇빛 보다 더 밝은 빛이 홀연히 사울을 비추며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이것은 뜨거운 태양빛이 헷가닥해서 헛소리하는 것 아닙니다. 그는 탁월한 지성인입니다. 감정에 사로잡혀 왔다 갔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더구나 그를 전격적으로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습니다. 이만하면 큰 소리 칠만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이 의미심장합니다. 다메섹에 있던 제자 아나니아가 ‘그가 교회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데 그를 일군으로 삼으시냐’고 항의를 하자 주님은 왜 그를 택하셨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행 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하여 주님의 그릇으로 택했고, 이를 위해서 그에게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그를 죽이고자 했어요. 예루살렘 성을 방문했을 때는 그를 죽이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명이 있을 정도였습니다(행 23:21). 또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이단의 괴수라는 비방을 받아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도 인간인지라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낙심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낙심될 때마다 영광의 직분자로 불러 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친히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격려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는 중에 유럽, 지금의 그리스로 건너갔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자기 헬라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많아서 이방사람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 아덴(아테네)에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채로 고린도 도시로 갔습니다. 고린도 도시는 동서무역의 교통 요충지로써 상업적으로 아주 융성하여 부를 쌓고 있습니다. 상인들과 뱃사람들로 인해 흥청망청하는 곳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울은 내심 의기소침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지금 일행과 떨어져 홀로 있던 차라 더욱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순간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행 18:9-10)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아무도 너를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라! 이 성 안에는 내 백성이 많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 힘입어 일년 육 개월 동안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며 가르쳤습니다. 이로써 고린도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하나님 말씀이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낙심하여 돌아갔더라면 어떻게 수많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좌절합니다. 사람들로 부터 애매히 비난이나 오해를 받을 때, 심지어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 낙담하기 쉽습니다. 또 열심히 신앙 생활하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쉽사리 맺히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이럴 때 ‘구태여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그래서 선한 일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낙심하지 않고 주어진 위치에서 꾸준히 사명을 감당하면,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지 않습니까?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되면 주께서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 새 언약의 직분자로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립시다(2절)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다시 말하면 이중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란 궤휼 가운데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궤휼’이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 아래 사리사욕을 취하는 거짓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이 방해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이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인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사심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사도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새 언약의 직분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떳떳치 못하고, 은밀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 부터도 칭찬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새 언약의 직분자로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고, 진리대로 삽시다(2-4절)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단의 궤계와 술수에 사로잡혀 멸망으로 향하는 인류에게 빛을 비추어서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심문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증거 하십니다. (요 18:37)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면 영적 무지 가운데 이 세상의 신, 곧 사단이 역사하여 그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마음을 어둡게 한다는 것은 영적 소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으로 눈이 멀어버립니다. 이렇게 영적 소경이 되면 영적인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눈에 어리석고 가치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 영적 무지와 미몽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비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아들의 영광에 관해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의 빛이 비취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었어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빛이 어둔 마음에 비춰서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사도 요한처럼 우리도 감격하여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잘 아는 노예 선장 죤 뉴톤은 교만과 정욕과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영적 눈이 먼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의 빛이 비췄을 때 회개하고, 영적 눈이 떠졌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서 감격에 찬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새 언약의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자신이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진리대로 살았습니다. (고후 4:2)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진리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떳떳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본래 믿음과 양심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믿음에서 파선합니다(딤전 1:19).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만큼 그 직분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 점을 사도 바울로부터 본 받아야 합니다. 진리를 밝히 드러내고,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4. 예수님이 주되심을 전파합시다(5,6절).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종이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예수님이 주되심을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는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이라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시요, 나의 마음과 삶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시요,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 중 핵심은 바로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시고,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기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주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몰라 방황합니다. 어거스틴은 주님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그 마음에 진정한 안식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누구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기 전까지는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영혼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빛이 비취자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만물이 창조되기 전의 땅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이 짙게 드리워진 상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혔습니다. 이처럼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에 생명의 빛을 비춰서 마음속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고후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사도 바울 또한 그에게 찬란한 부활의 빛이 비춰졌을 때 그를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지고 영적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이렇게 빛을 받은 사람만이 빛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은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증거 합니다.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 자신이 구원 받은 것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을 받은 것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이란 청년을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었다면 그는 부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잘못된 열심과 하나님을 위한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어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감옥소에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다메섹까지 쫓아갔습니다. 그곳으로 피신한 크리스천들을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공문서를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살기등등하게 가던 그를 부활하신 주님이 전격적으로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자 그는 거기에 압도되어 항복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가 너를 구원한 목적은 다시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너처럼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또한 나를 믿어 죄 용서받아 성도들이 받을 유업을 함께 상속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의 목적이 바로 이 사명을 위한 부르심 때문인 줄 깨달은 후부터 항상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구원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방인들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누구의 도움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렇게 구원하셨던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이 어느 누군가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처럼 여러분 또한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통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친구와 직장 동료가,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이 구원 받기를 우리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저들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우리가 저들을 위한 통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저들은 복음을 듣지 못할 것이고,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복음에 가려진 채로 망할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더 우리 주위를 관심 있게 돌아봅시다. 저들 또한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서 저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심정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합시다. 빛의 직분을 잘 감당하시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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