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12.01.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12.01.2024)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1,083회 작성일 Dec 02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2월 1일
본문: 요한복음 13:34-35
제목: 서로 사랑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지난 20세기와 21세기는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문화, 정부와 기업 모두에서 아주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사람들이 더 행복하냐고 설문조사를 해 본 결과 오히려 행복지수가 더 떨어졌다고 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의 성장이 또 다른 의미에서 재앙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어 급격한 기후 변화와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하였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먹거리 마저 위협 받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성과 공동체마저도 와해되어갑니다. 비록 가난해도 서로 돕고 살았던 농촌 사회는 산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버려지고 피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지역 공동체와 가족 공동체의 뿌리마저, 아니 결혼제도의 개념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가난하게 살던 옛날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과학 기술의 발달, 세계화의 물결, 그리고 문화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과연 인간성과 공동체의 회복은 가능한 것인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교회는 소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고, 또 진정한 공동체를 언제나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교회만이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고, 진정한 공동체를 제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실 때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긴장된 순간에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서로 사랑하라' 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저희가 기다리는 메시아인줄 믿고 3년 동안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너무도 무력하게, 그리고 처참히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저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적, 영적 위기에서 무엇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 믿음을 꿋꿋이 지켜갈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담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시대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던 때였습니다. 주후 64년부터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면 누구든지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 이야기 가운데 블란디나라는 장애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로마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 신상 앞에 분향할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꺾지 않자 병사들은 블란디나를 경기장으로 데려가서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고서 굶주린 맹수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달려들어 잔인하게 물어뜯을 줄 알았던 맹수들이 블란디나를 건드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그녀를 다시 끌어내어 그녀의 피부를 모두 벗겨내고, 채찍으로 때린 후에 한껏 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습니다.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난 황소가 달려들어 그 뿔로 들이받도록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순교했습니다.

이런 핍박에도 기독교 신앙이 불길 같이 로마제국 전체로 번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 로마 제국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은 주님이 주신 오늘 본문, 이 말씀을 교회가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사회 질서를 뒤집을 만한 폭발력을 가진 에너지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4장에서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행 4:33-37)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기쁜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서로에 대해 사랑으로 돌보고, 책임져 주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1. 언약 공동체의 기원과 성격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근거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약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기원도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습니다. 430년 노예 생활하던 그들을 출애굽하게 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개입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셔서 싸우심으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파별로 분배하고 그들은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런 복을 주신 것은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개화된 문명인이라든지, 도덕성이 더 우월하다든지 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그들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계속 유지되는 한 그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과 보호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엄청난 복을 누린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에 그들은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서로 서로에 대한 헌신과 나눔, 그리고 하나 됨, 서로를 향한 투명하고 개방된 삶, 그리고 너희들끼리 만이 아니라 이방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긍휼의 삶이 필수적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서를 보면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공동체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레 19:9-10)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추수할 때, 추수하기 어려운 밭모퉁의 구석구석진 곡식을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또 땅의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고, 내버려두라. 자기 땅이 없어 농사짓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주워 양식을 삼을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따라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구제를 할지라도 나팔을 불어서 상대방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를 보존하면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곡식을 줍는 수고를 통하여 본인의 노력으로 곡식을 얻는 형태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구제를 행한다는 미명 아래 덥석 집어주거나, 불로소득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인생을 사는 근본정신을 잊게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이웃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되 그 사람이 온전히 설 수 있는 방향으로 지혜 있는 긍휼을 베풀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십니다.

언약의 백성은 사회의 소외계층, 특히 장애인들에게 대해서 배려해야 합니다. (레 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주는 원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도와주는 척 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 상대방의 처지를 악용하여 사기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못보고 못 들을 지라도 나 여호와 하나님은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돌아보십니다. (신 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네 불쌍한 이웃도 하나님의 백성이니 한 식구처럼 돌봐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자기 사사로운 이익을 넘어서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이웃을 긍휼함으로 돌봐줄 때 하나님은 더욱 그들엑 복을 더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2. 옛 언약의 실패와 새로운 약속

만약 언약이 파기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언약에 묶이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더 이상 언약 아래 누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에게만 충성하겠다고 맺었던 언약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무참히 파기되었습니다. 더렵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무시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얕보았습니다.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불의와 부정직이 판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 상실된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을 파기하자 언약에 따른 효력도 상실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맙니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이 암울한 현실 가운데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약속합니다. 그것은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옛 언약이 용도 폐기 되어서 새 언약을 주시는 것 아닙니다. 옛 언약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의 깨어진 언약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외형적으로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지만 내면적으로 그들은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옛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 언약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가령 말을 시냇가에 까지 끌고 갈 수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였지만, 그 자유를 선한 일을 위한 자유로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자유인이 되었으나 내면적 마음과 생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이 파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문제의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율법을 돌에 새기지 않고, 사람 마음 판에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새 언약의 공동체 출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지키셨습니다. 예수께서 배반당하시고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옛 언약 대신 새 언약으로 대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만일 죄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형벌’이라는 두 축에서 왔다 갔다하는 비참한 신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끊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죄를 짓고 난 후 발생하는 죄책감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료하고, 희망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이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 출현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새 언약의 백성들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는 새 언약 공동체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그 중심이 늘 삼위일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예배를 통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치유와 기쁨,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습니다. 누구나 환영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이해, 용서와 화평이 강같이 흐릅니다. 한 가족이 되어 자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주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때 함께 울어주며, 함께 삶을 공유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며 나도 이 모임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초대 교회는 세상을 따라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갔습니다. 우리 교회와 목장이 이런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 피로 우리는 언약 백성이 되었고 언약 공동체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4. 새 언약 공동체의 성격

이 공동체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만찬을 나누신 후 새 계명을 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 사랑은 새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입니다.
“서로 사랑하라”사랑은 새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입니다. 모든 말씀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을 위해 존재하며, 사랑을 목표로 합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동기와 기준이 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이웃의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사랑입니다.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대신 죽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여기에 우리 사랑의 동기와 기준이 있습니다.

3)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됨의 표지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 받는다고 감동하지 않습니다. 등록 교인이 되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에서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됨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분열하며 미워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는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신 있게 밝히려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언약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주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슴에 흘러넘치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서 내 가정과 내 교회를 넘어서 지역 사회를 향해, 세계를 향해 흘러가게 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입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