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으로 아뢰라.(11.24.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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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1회 작성일 Nov 25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1월 24일
본문: 빌립보서 4: 6-7
제목: 감사함으로 아뢰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농사지은 것을 거두어드리며 감사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고,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그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말 그대로 우리가 땀 흘리고 수고하여 지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따스한 봄날에 씨를 뿌리고, 여름 뜨거운 태양볕 아래 김을 매며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그런데 그것만으로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적절한 비와 태양 빛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농부는 이것을 잘 알기에 추수를 거두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이유를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신 것에만 둔다면 우리는 온전한 감사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거둘 것이 많을 때 많이 감사하고, 거둘 것이 없다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의 감사의 기준은 항상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너희를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인도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과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생존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시고, 집과 과수원을 거져 얻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늘의 각양 좋은 것들을 내려 주십니다. 구원과 영생과 거룩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필요한 것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악한 자들이 손도 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얻은 재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재물 자체를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비참한 곳에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서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품에 있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그때는 당연한 줄 알고 하찮게 여겼는데 그것이 엄청난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굶어 죽지 않으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대우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품꾼의 한 사람으로 써 주신다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 달려와 얼싸 안습니다. 그리거 그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살아돌아온 아들을 위해 동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만약 이 때에 탕자가 아버지가 입혀 주신 새 옷이나 금가락지가 얼마나 비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감동한다면 그는 정녕 구제불능한 탕자일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해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재물만으로만 감사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약속하는 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은 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감사요 진정한 추수감사의 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1. 염려하지 말라
물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려갈 때에 우리도 수많은 고민과 걱정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경제적 문제, 취직 문제, 건강 문제, 결혼 문제, 자녀교육 문제, 목장식구 섬기는 문제 등등 여기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 앞에서 근심하며 수심에 잠길 때가 많습니다. 일단 근심과 염려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로 ‘merimnao’라는 말인데 ‘merizo’(나누다, 찢다)라는 단어와 ‘nous’(마음)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살면서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며 나뉘어 집니다. 누가복음 10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집에 맞이한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식사 준비를 하는데 분주한 나머지 마음이 나뉘어졌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기에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가 본문과 동일한 ‘merimnao’입니다. 마음이 나뉜 상태입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기쁘게 대접하려고 음식을 준비하는데 너무 분주하니까 그만 마음에 평정을 잃어버렸어요. 염려가 생기고 동생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만 일에 분주한 나머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단되었어요. 일 자체에 매달리게 되니까 그만 마음이 흩뜨러진 거예요. 염려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를 그쳐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염려는 아무 힘이 없어요. 염려는 한마디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오히려 염려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타격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는 영적 질병과도 같습니다. 우리 영적 생명력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일로 염려가 꽉 차있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신앙생활해도 믿음이 자라지 않아요. 염려가 영적 양분을 야금야금 다 먹어 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염려가 무익하고 오히려 해롭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대신 무얼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대조적인 두개의 단어는 ‘아무것도’와 ‘모든 일에’(영어로 anything과 everything)입니다. Anything 염려하지 말고, Everything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할 모든 일을 기도할 모든 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염려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평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왜 감사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시고, 생명까지 희생하신 분이시라면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우리 중에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가 밥을 달라는데 돌을 집어주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집어줄 사람이 있겠어요?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고자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일까 보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행복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어느 때 주는 것이 가장 좋은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내게 베풀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에 우리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우리가 이처럼 염려대신에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뢸 때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뜻은 ‘모든 이해와 이성과 상식을 초월한 하늘의 평강’을 의미합니다.
이 평강은 과학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말로써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가르쳐 주거나 전수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평강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축복이요, 영적인 비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 내면 가운데 허락해 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뜻은 ‘군인들이 철통같이, 물 셀 틈 없이 방어해 준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파 1세)이 어느날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타당한 논리도 없이, 느닷없이 교회를 박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고’(행 12:1) 손을 들었습니다. 먼저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제자 야고보를 잡아 죽였는데 의외로 유대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교회의 수장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교절 절기를 앞두고 피 흘리기를 원치 않아서 일단 베드로를 옥에 가둡니다. 병사들을 시켜 아주 삼엄하게 지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 사이에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문 밖에도 두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대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날 밤이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이 될 것임을 베드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찔러서 깨워야 할 정도로 안심하고 푹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한 방식입니다. 다음 날 아침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 있는 베드로에게 잠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이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지금 시인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비상한 상황입니다. 시인을 에워싸서 치려 하고, 거짓을 좋아하는 악인들은 그를 파멸시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을 베드로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죽음이 너무도 두려워서 거짓말과 저주로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정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군사들 틈에서 양손이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는 평안한 가운데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며, 자신에게 속한 자를 기억하시며 지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면한 현실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평강입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여건과 조건에 제한을 받지 않는 평강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도 이것을 강력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죽이고자 달려드는데 스데반은 조금도 이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냉정과 침착과 평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를 지켜 보던 원수들이 오히려 놀랍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났습니다.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어둠이나 근심의 빛이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과 기쁨과 영광에 충만한 얼굴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약속된 영광입니다.
결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의 현실은 참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춥고 배고픕니다. 몸이 아프고 불편한 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이라는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매임으로 시위대안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빌 1:18)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일찍이 로마에 오기를 소원하며 시도했으나 번번히 길이 막혀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로마의 한 죄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로마에 압송되어 왔습니다. 감시를 받으며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전에 이런 모습으로 로마에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수의 신분으로 오고 보니 미처 생각치 못했던 복음 전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재판을 받는 곳마다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 변론하게 되었고, 변론할 때마다 다메섹 도상에서 뵌 영광의 주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왕과 귀족들과 고관들 앞에서 복음을 당당히 전파할 수 있었고, 그를 지키는 로마 병사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감옥 속에 갇혀 있지만 그의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시위대에 갇혔던 바울의 복음 전파로 온 시위대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심지어 로마 황실에 까지 믿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롭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 그가 바랐던 것을 뛰어넘어서 로마 감옥 안과 황실에 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파격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염려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그 분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롬 8:32).
이런 하나님을 믿고서 우리가 아무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아뢸 때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이 놀라운 평강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날짜: 2024년 11월 24일
본문: 빌립보서 4: 6-7
제목: 감사함으로 아뢰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농사지은 것을 거두어드리며 감사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고,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그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말 그대로 우리가 땀 흘리고 수고하여 지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따스한 봄날에 씨를 뿌리고, 여름 뜨거운 태양볕 아래 김을 매며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그런데 그것만으로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적절한 비와 태양 빛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농부는 이것을 잘 알기에 추수를 거두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이유를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신 것에만 둔다면 우리는 온전한 감사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거둘 것이 많을 때 많이 감사하고, 거둘 것이 없다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의 감사의 기준은 항상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너희를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인도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과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생존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시고, 집과 과수원을 거져 얻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늘의 각양 좋은 것들을 내려 주십니다. 구원과 영생과 거룩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필요한 것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악한 자들이 손도 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얻은 재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재물 자체를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비참한 곳에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서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품에 있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그때는 당연한 줄 알고 하찮게 여겼는데 그것이 엄청난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굶어 죽지 않으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대우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품꾼의 한 사람으로 써 주신다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 달려와 얼싸 안습니다. 그리거 그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살아돌아온 아들을 위해 동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만약 이 때에 탕자가 아버지가 입혀 주신 새 옷이나 금가락지가 얼마나 비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감동한다면 그는 정녕 구제불능한 탕자일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해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재물만으로만 감사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약속하는 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은 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감사요 진정한 추수감사의 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1. 염려하지 말라
물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려갈 때에 우리도 수많은 고민과 걱정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경제적 문제, 취직 문제, 건강 문제, 결혼 문제, 자녀교육 문제, 목장식구 섬기는 문제 등등 여기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 앞에서 근심하며 수심에 잠길 때가 많습니다. 일단 근심과 염려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로 ‘merimnao’라는 말인데 ‘merizo’(나누다, 찢다)라는 단어와 ‘nous’(마음)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살면서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며 나뉘어 집니다. 누가복음 10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집에 맞이한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식사 준비를 하는데 분주한 나머지 마음이 나뉘어졌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기에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가 본문과 동일한 ‘merimnao’입니다. 마음이 나뉜 상태입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기쁘게 대접하려고 음식을 준비하는데 너무 분주하니까 그만 마음에 평정을 잃어버렸어요. 염려가 생기고 동생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만 일에 분주한 나머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단되었어요. 일 자체에 매달리게 되니까 그만 마음이 흩뜨러진 거예요. 염려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를 그쳐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염려는 아무 힘이 없어요. 염려는 한마디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오히려 염려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타격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는 영적 질병과도 같습니다. 우리 영적 생명력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일로 염려가 꽉 차있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신앙생활해도 믿음이 자라지 않아요. 염려가 영적 양분을 야금야금 다 먹어 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염려가 무익하고 오히려 해롭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대신 무얼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대조적인 두개의 단어는 ‘아무것도’와 ‘모든 일에’(영어로 anything과 everything)입니다. Anything 염려하지 말고, Everything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할 모든 일을 기도할 모든 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염려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평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왜 감사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시고, 생명까지 희생하신 분이시라면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우리 중에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가 밥을 달라는데 돌을 집어주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집어줄 사람이 있겠어요?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고자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일까 보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행복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어느 때 주는 것이 가장 좋은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내게 베풀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에 우리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우리가 이처럼 염려대신에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뢸 때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뜻은 ‘모든 이해와 이성과 상식을 초월한 하늘의 평강’을 의미합니다.
이 평강은 과학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말로써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가르쳐 주거나 전수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평강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축복이요, 영적인 비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 내면 가운데 허락해 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뜻은 ‘군인들이 철통같이, 물 셀 틈 없이 방어해 준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파 1세)이 어느날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타당한 논리도 없이, 느닷없이 교회를 박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고’(행 12:1) 손을 들었습니다. 먼저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제자 야고보를 잡아 죽였는데 의외로 유대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교회의 수장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교절 절기를 앞두고 피 흘리기를 원치 않아서 일단 베드로를 옥에 가둡니다. 병사들을 시켜 아주 삼엄하게 지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 사이에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문 밖에도 두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대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날 밤이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이 될 것임을 베드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찔러서 깨워야 할 정도로 안심하고 푹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한 방식입니다. 다음 날 아침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 있는 베드로에게 잠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이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지금 시인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비상한 상황입니다. 시인을 에워싸서 치려 하고, 거짓을 좋아하는 악인들은 그를 파멸시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을 베드로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죽음이 너무도 두려워서 거짓말과 저주로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정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군사들 틈에서 양손이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는 평안한 가운데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며, 자신에게 속한 자를 기억하시며 지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면한 현실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평강입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여건과 조건에 제한을 받지 않는 평강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도 이것을 강력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죽이고자 달려드는데 스데반은 조금도 이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냉정과 침착과 평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를 지켜 보던 원수들이 오히려 놀랍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났습니다.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어둠이나 근심의 빛이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과 기쁨과 영광에 충만한 얼굴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약속된 영광입니다.
결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의 현실은 참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춥고 배고픕니다. 몸이 아프고 불편한 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이라는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매임으로 시위대안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빌 1:18)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일찍이 로마에 오기를 소원하며 시도했으나 번번히 길이 막혀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로마의 한 죄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로마에 압송되어 왔습니다. 감시를 받으며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전에 이런 모습으로 로마에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수의 신분으로 오고 보니 미처 생각치 못했던 복음 전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재판을 받는 곳마다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 변론하게 되었고, 변론할 때마다 다메섹 도상에서 뵌 영광의 주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왕과 귀족들과 고관들 앞에서 복음을 당당히 전파할 수 있었고, 그를 지키는 로마 병사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감옥 속에 갇혀 있지만 그의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시위대에 갇혔던 바울의 복음 전파로 온 시위대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심지어 로마 황실에 까지 믿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롭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 그가 바랐던 것을 뛰어넘어서 로마 감옥 안과 황실에 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파격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염려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그 분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롬 8:32).
이런 하나님을 믿고서 우리가 아무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아뢸 때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이 놀라운 평강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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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aLbVeni1qnw 31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