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감사하라 (11.03.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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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1회 작성일 Nov 27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1월 3일
본문: 시편 136:1-26
제목: 여호와께 감사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만큼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에서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가’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믿음의 정상에 이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여건에 따라 감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환경과 상관없이 먼저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시골 교회 장로님이 여름 땡볕 아래서 밭을 매고 있었습니다. 햇볕은 뜨겁고, 잡초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짜증스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사단이 슬그머니 나타나 유혹하기를 “아무개 장로야, 네가 이래도 감사할 수 있어?” 그 장로님은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려고 한참을 궁리하다가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많은 잡초가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서 단번에 확 뽑을 수 있도록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시편 136편은 예배자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감사 찬양시 입니다. 이 시를 가만히 보면 앞에 “감사하라”는 단어와 뒤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구절이 댓구가 되어 반복됩니다. 앞부분에서 제사장이 감사 제목을 이야기하면, 예배자들이 입을 모아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외치며 뒤따라 갑니다. 마치 풍년이 들어서 흥겨운 농악소리에 맞춰 민요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앞서 선창하면 뒤이어 사람들이 꽹과리 소리에 맞춰 ‘쾌지나 칭칭 나네’하고 따라 부르던 방식처럼 1절부터 26절까지 한 절, 한 절마다 “감사하라”에 이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응답합니다. 그 이유가 1절에 한 구절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인자”란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헤세드’입니다. 좀 쉬운 말로, 긍휼, 사랑, 자비, 성실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영원’이란 단어가 별로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영원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란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셨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4-5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주가 생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연이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연이 예수 믿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축복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듣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함께 역사하셨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 우리 몸에 전율이 돋고,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우리 입술에서는 감사 찬송을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을 때 어려운 곤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을 믿을 때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고통스러운 날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우리는 감사 절기를 맞이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인도 시편 136편에서 크게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둘째는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셋째는 오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2-9절).
2절을 보십시오. “모든 신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3절에서는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 우상들이 있습니다. 각 부족과 각 종족마다 각자 섬기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상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135:15-18절에 보면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만든 우상들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출애굽기 3: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는 자존자,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신 분,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셨던 분, 곧 창조주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홀로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십니다. 홀로 우주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립니다. 실수로 계속 비를 내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세상이 물난리가 날 것입니다. 일 년 내내 눈을 퍼부어 버리시면 어떻게 될까요? 온 세상은 얼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십니다.
6절에서 우리는 또한 땅을 물위에 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처음 세상을 만드실 대 땅과 물의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뭍이 드러나라’고 명하시자 뭍이 드러나고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었습니다(창 1:9). 이처럼 땅을 물 위에 펴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땅의 표면이 지금보다 더 무르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빠지게 되었을 것이고, 딱딱했다면 곡식을 경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게 적당하게 만드셔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고, 경작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냉장고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 속에 수많은 물고기들과 조패류들을 싱싱하게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8절과 9절에서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와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저녁에는 깜깜하지 않도록 달빛을 비춰 주십니다. 운치가 있도록 많은 별이 반짝이게 하십니다. 이렇게 신비롭게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고대 중동사람들에게 ‘해(태양)’는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태양을 신으로 섬기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왕들은 대부분 태양신의 아들로 여김을 받아서 숭배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달도 숭배의 대상이 됨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달은 밤에 일을 할 수 있게도 해주며,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 주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열가지 재앙 중 하나가 하늘의 해가 빛을 잃어 버린 것인데 그것은 애굽의 신을 심판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해와 달과 별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즉 해와 달과 별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일 뿐이고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경이로운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하나님의 작품 세계를 바라보며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의 행복을 위해 미리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란 맨 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이것 가져가고 저것 가져가고. 다 하나님 것인데 감사하단 말도 없이 열심히 갖다 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괘씸하다고 당신의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베푸시고 또 베푸시고,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시고 인자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 구원의 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합니다(10-26절).
10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15절에 보니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18절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19, 20절 “아모리 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고 억압하던 원수들입니다. 이들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힘이 세고 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세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그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훌륭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똑똑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힘이 세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원망 불평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그렇습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사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 아래 종살이하던 우리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일생 죄와 사망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출하여 그리스도의 나라, 은혜의 왕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세상 그 어떤 질병 보다도 심지어 암병 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건강식으로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비타민과 건강식품을 먹어도 방지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약을 복용하고, 최신의 의술을 발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장사나 영웅호걸도 거침없이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죄라는 병입니다. 이 죄라는 질병은 아주 치명적이어서 치사율이 100%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롬 6:23a).
일단 이 병에 걸리며 증세가 나타나는데 먼저 무서운 양심의 고통을 겪습니다. 시편 32편 3절과 4절에서 그의 비참한 형편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이렇게 죄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우리 가정을 파멸로 이끌며, 결국 돌이키지 아니하면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를 구원하셨습니다.나 한 사람을 사단의 올무에서 건지시기 위해 그처럼 값진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엄마들이 왜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합니까?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열심으로 결국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울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원수가 무섭게 달려들고, 거센 풍랑이 몰아치고, 참담한 환경에 놓여 있어도, 돈과 재물이 흩어지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더라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히 12: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를 대적에게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죄와 죄의 비참함 가운데 건져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3. 오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신 것에 감사하며 찬송합니다(21-26절).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거저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아주 강성한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백성 답지 못하게 살았던 조상들의 패역과 반역에게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하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21-22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사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25절을 보세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도 그 놀라운 지혜로 만물을 부족함이 없도록 섬세하게 살펴주십니다. 땅의 열매를 맺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고 살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지만 자랄 수 있도록 땅에 영양분을 주시고, 태양 에너지와 비를 주어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열심히 일해서 수확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농사만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부모의 도움,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공부를 잘하여 좋은 성적이 나온 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요, 사업이 잘되어 재물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65:10-13)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혔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1년 농사를 넘치도록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에서 살다보니 풍족하게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호흡하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영국 격언에도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 1:21-22)
반면에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리고 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우리 자신이 풍요로워진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10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며 구원의 복까지 주셨습니다(눅 17:17-19).
결론: 올해 우리 교회 식구들 가운데 어려운 일을 겪은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 어떤 분은 수술하고서도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직장이나 비즈니스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남들이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네’하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시련 속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낙심과 좌절을 수없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분들을 만나보면 하나님께 감사해 하며 고마워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 위로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위로하여 주십니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을 바꾸어 주심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위로 받게 하십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목장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위로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11월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새롭게 감사를 각성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풍성히 채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믿음이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당연히 여기지 않고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하는 자 되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4년 11월 3일
본문: 시편 136:1-26
제목: 여호와께 감사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만큼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에서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가’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믿음의 정상에 이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여건에 따라 감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환경과 상관없이 먼저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시골 교회 장로님이 여름 땡볕 아래서 밭을 매고 있었습니다. 햇볕은 뜨겁고, 잡초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짜증스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사단이 슬그머니 나타나 유혹하기를 “아무개 장로야, 네가 이래도 감사할 수 있어?” 그 장로님은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려고 한참을 궁리하다가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많은 잡초가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서 단번에 확 뽑을 수 있도록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시편 136편은 예배자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감사 찬양시 입니다. 이 시를 가만히 보면 앞에 “감사하라”는 단어와 뒤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구절이 댓구가 되어 반복됩니다. 앞부분에서 제사장이 감사 제목을 이야기하면, 예배자들이 입을 모아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외치며 뒤따라 갑니다. 마치 풍년이 들어서 흥겨운 농악소리에 맞춰 민요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앞서 선창하면 뒤이어 사람들이 꽹과리 소리에 맞춰 ‘쾌지나 칭칭 나네’하고 따라 부르던 방식처럼 1절부터 26절까지 한 절, 한 절마다 “감사하라”에 이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응답합니다. 그 이유가 1절에 한 구절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인자”란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헤세드’입니다. 좀 쉬운 말로, 긍휼, 사랑, 자비, 성실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영원’이란 단어가 별로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영원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란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셨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4-5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주가 생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연이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연이 예수 믿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축복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듣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함께 역사하셨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 우리 몸에 전율이 돋고,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우리 입술에서는 감사 찬송을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을 때 어려운 곤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을 믿을 때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고통스러운 날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우리는 감사 절기를 맞이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인도 시편 136편에서 크게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둘째는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셋째는 오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2-9절).
2절을 보십시오. “모든 신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3절에서는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 우상들이 있습니다. 각 부족과 각 종족마다 각자 섬기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상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135:15-18절에 보면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만든 우상들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출애굽기 3: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는 자존자,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신 분,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셨던 분, 곧 창조주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홀로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십니다. 홀로 우주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립니다. 실수로 계속 비를 내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세상이 물난리가 날 것입니다. 일 년 내내 눈을 퍼부어 버리시면 어떻게 될까요? 온 세상은 얼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십니다.
6절에서 우리는 또한 땅을 물위에 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처음 세상을 만드실 대 땅과 물의 경계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뭍이 드러나라’고 명하시자 뭍이 드러나고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었습니다(창 1:9). 이처럼 땅을 물 위에 펴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땅의 표면이 지금보다 더 무르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빠지게 되었을 것이고, 딱딱했다면 곡식을 경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게 적당하게 만드셔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고, 경작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냉장고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 속에 수많은 물고기들과 조패류들을 싱싱하게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8절과 9절에서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와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저녁에는 깜깜하지 않도록 달빛을 비춰 주십니다. 운치가 있도록 많은 별이 반짝이게 하십니다. 이렇게 신비롭게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고대 중동사람들에게 ‘해(태양)’는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태양을 신으로 섬기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왕들은 대부분 태양신의 아들로 여김을 받아서 숭배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달도 숭배의 대상이 됨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달은 밤에 일을 할 수 있게도 해주며,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 주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열가지 재앙 중 하나가 하늘의 해가 빛을 잃어 버린 것인데 그것은 애굽의 신을 심판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해와 달과 별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즉 해와 달과 별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일 뿐이고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경이로운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하나님의 작품 세계를 바라보며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의 행복을 위해 미리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란 맨 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이것 가져가고 저것 가져가고. 다 하나님 것인데 감사하단 말도 없이 열심히 갖다 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괘씸하다고 당신의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베푸시고 또 베푸시고,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시고 인자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 구원의 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합니다(10-26절).
10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15절에 보니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18절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19, 20절 “아모리 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고 억압하던 원수들입니다. 이들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힘이 세고 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세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그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훌륭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똑똑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힘이 세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원망 불평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그렇습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사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 아래 종살이하던 우리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일생 죄와 사망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출하여 그리스도의 나라, 은혜의 왕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세상 그 어떤 질병 보다도 심지어 암병 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건강식으로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비타민과 건강식품을 먹어도 방지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약을 복용하고, 최신의 의술을 발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장사나 영웅호걸도 거침없이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죄라는 병입니다. 이 죄라는 질병은 아주 치명적이어서 치사율이 100%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롬 6:23a).
일단 이 병에 걸리며 증세가 나타나는데 먼저 무서운 양심의 고통을 겪습니다. 시편 32편 3절과 4절에서 그의 비참한 형편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이렇게 죄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우리 가정을 파멸로 이끌며, 결국 돌이키지 아니하면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를 구원하셨습니다.나 한 사람을 사단의 올무에서 건지시기 위해 그처럼 값진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엄마들이 왜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합니까?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열심으로 결국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울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원수가 무섭게 달려들고, 거센 풍랑이 몰아치고, 참담한 환경에 놓여 있어도, 돈과 재물이 흩어지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더라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히 12: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를 대적에게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죄와 죄의 비참함 가운데 건져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3. 오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신 것에 감사하며 찬송합니다(21-26절).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거저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아주 강성한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백성 답지 못하게 살았던 조상들의 패역과 반역에게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하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21-22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사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25절을 보세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도 그 놀라운 지혜로 만물을 부족함이 없도록 섬세하게 살펴주십니다. 땅의 열매를 맺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고 살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지만 자랄 수 있도록 땅에 영양분을 주시고, 태양 에너지와 비를 주어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열심히 일해서 수확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농사만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부모의 도움,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공부를 잘하여 좋은 성적이 나온 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요, 사업이 잘되어 재물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65:10-13)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혔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1년 농사를 넘치도록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에서 살다보니 풍족하게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호흡하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영국 격언에도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 1:21-22)
반면에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리고 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우리 자신이 풍요로워진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10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며 구원의 복까지 주셨습니다(눅 17:17-19).
결론: 올해 우리 교회 식구들 가운데 어려운 일을 겪은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 어떤 분은 수술하고서도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직장이나 비즈니스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남들이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네’하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시련 속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낙심과 좌절을 수없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분들을 만나보면 하나님께 감사해 하며 고마워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 위로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위로하여 주십니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을 바꾸어 주심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위로 받게 하십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목장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위로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11월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새롭게 감사를 각성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풍성히 채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믿음이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당연히 여기지 않고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하는 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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