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을 입은 큰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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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84회 작성일 Oct 21 2024본문
본문: 계시록 7:1-17
서론: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섯 가지 인봉이 차례로 떼어지면서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흰 말을 타고서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은 자가 파죽지세로 승리하며 압도하는 장면으로 첫 번째 인을 떼는 것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는 전쟁, 세 번째에서 기근으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네 번째 인에서는 전쟁과 기근과 함께 역병과 짐승을 추가 되어서 심판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을 떼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큰 지진과 함께 각 산과 섬이 이동하는 지각 변동이 일어납니다.
이제 7번째 인봉이 떼어질 차례인데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천상에서 구원 받은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배와 찬양하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 가지 재앙이 계속 부어질 때 (계 6:17)“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하고 사람들이 외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어린 양의 진노에 우리에게도 ‘과연 누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큰 재앙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인을 찍어 주신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 모두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완하는 계시를 보여줌으로써 저와 여러분의 불안한 마음속에 위로와 확신을 주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이마에 인치기
7:3절입니다. 주의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이 사방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놔두시면 노아의 홍수심판 때와 같이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구원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마에 인을 받은 사람들. 이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해 주십니다.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서부영화에는 울타리가 없는 드넓은 초원에 소를 방목해 키울 때에 주인들이 자기 소를 구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불로 달군 쇠로 엉덩이에 화인을 찍어서 자기 소유를 구별합니다. “이 소는 내 소니까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에서는 자기 물건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안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때에 주님으로 부터 인침을 받은 사람을 감히 누가 손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백성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예수께서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생명을 대가로 치루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안전은 확실합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세에 재앙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합니다. 출애굽기서에서 문설주와 문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말세의 때에도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침을 받은 자들은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침을 받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침은 내 맘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도장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을 쳐 주십니다.
2. 십사만 사천 명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 쳐 주시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사람이 144,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로 부터 각각 만이천 명씩 총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12 지파 후손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됩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장정들만 60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여자들과 아이까지 포함하면 200만명이 족히 넘을 것입니다. 만약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지파 후손 십사만 사천명으로 제한한다면 해석의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에 이미 이방인들이 대다수를 차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과 신약시대 하나님 백성들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 명만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 숫자를 지금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 안에 들어가려면 자기 집단에 헌신해야 하고, 헌금도 얼마 해야 하고, 전도도 몇 명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근래 한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하고 있는 이단 ‘신천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이 정확히 구원 받은 자들의 숫자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기들만이 진리이고 참교회이기에 여기에만 구원이 있고, 기존 교회들은 다 타락한 바벨론 교회이어서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은 정확히 구원 받는 숫자이기에 이 숫자가 채워질 때 비로소 그 숫자 안에 든 사람들은 영생불사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변화하여서, 그들이 제사장이 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십사만 사천 안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천지의 신자 수가 이미 십사만 사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포교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들은 영생불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꿉니다. 신천지 교인이 되었다고 다 참된 신자가 아니기에 아직 그 수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해명하면서, 또 열심 있는 신자가 기존의 십사만 사천에 들어간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들어간다는 해괴망측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서로 경쟁을 부추기고, 전도도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직장과 학교도 팽개치고, 부모 자식도 버리고,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이단들은 십사만 사천 이란 숫자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들을 맹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십사만 사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신앙생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상징과 비유가 많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사자’로 비유하거나 ‘어린양’이란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상징이나 숫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 숫자를 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숫자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국에는 숫자 ‘4’는 한자어 죽을 사(死)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사용하기를 꺼려 합니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예를 들면 숫자 ‘3’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바로 완전하신 존재이시죠. 그리고 숫자 ‘4’는 피조물을 뜻합니다. 본문 1절에서 ‘땅 네 모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피조 세계를 나타냅니다. 또 9절에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총 4개인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에 대한 관념이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숫자 ‘7’에는 완성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심판들을 보면 완전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의미로 모든 심판들이 일곱개의 시리즈로 묶여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숫자마다 고유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십사만 사천은 12x12x1000, 이렇게 곱하면 나옵니다. 여기서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데 구약의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열두 사도입니다. 그리고 숫자 1000은 10의 3제곱입니다. 숫자 10은 유대인의 표현으로 볼 때 ‘많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10을 세번 곱하면 천이 나옵니다. 즉 10에 완전수인 3을 제곱한 숫자가 바로 천입니다. 그래서 숫자 천은 모든 사람,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12x12x1000 이 144,000이 되는데 앞에 열둘은 구약의 성도를, 뒤의 열둘은 신약의 성도를, 숫자 천은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즉 십사만 사천 명은 신, 구약 모든 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9절에서 등장하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흰 옷 입은 큰 무리
9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이 보니까 천상교회에 들림 받는 성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단지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 명이 아니라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나와서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10절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6), 이에 한탄하신 하나님은 땅의 모든 것을 홍수로 일거에 쓸어버리시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닥칠 종말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고, 각종 자연 재해과 재앙은 점점 더 빈번하게, 강도는 더 심화 될 것이고, 사랑이 식고, 온갖 불법과 불의한 일이 성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이 살기 힘든 최악의 상황으로 몰릴 때 천지를 뒤집어 엎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 받았지만 세상 끝날에는 불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천체가 불에 타서 녹아 버릴 것이며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벧후 3:10).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린 양의 피로써 희게 씻은 자들은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악인들이 온 세상에 득세할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극소수이고 별로인 듯합니다. 그런데 천상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하나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과 순교를 당했지만 천상에서 보니 승리한 성도들이 구름떼와 같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때로는 너무나 외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세상이 너무나 압도해서 우리는 별것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또 세상이 주는 유혹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믿음을 지키며 사는 자들이 사회에서 소수이다 보니 믿음대로 사는 삶이 뭔가 잘못 된 것처럼 느껴지고, 믿지 아니하는 저들이 대다수이기에 마치 그들의 삶이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하늘에서는 흰옷 입은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13,14절을 보십시오. 천상교회에서 한 장로가 물었습니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그때 요한이 뭐라고 답변합니까?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알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하고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승리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까? 그런데 수많은 위기를 잘 극복하고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려면 크고 작은 환난을 잘 극복해 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린 양의 보혈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만이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찬송가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가 인침을 받고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원하심이 누구에게 있다고요?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고, 의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만이 천성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큰 환난 중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용사들이 천국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의 축복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천성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16,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구절의 제대로 음미하려면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의 처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느라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이기에 뜨거운 태양빛 아래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박해를 받으며 고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수고와 희생을 다 보상해 주십니다. 생명수 강으로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당한 설움과 아픔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전도하다 무시 당하며 겪은 설움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없는 물질을 쪼개어 헌금하고, 금쪽같은 시간을 드려서 맛있는 음식으로 소외되고 약한 성도들을 섬겼던 분들의 손길들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은 단지 천국에 가서만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천상교회의 복을 지금 맛볼 수 있습니다. 천상교회는 본점이요, 지상교회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데서 맛 볼 수 없는 천국의 기쁨과 감격을 교회에서 맛 볼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공부하면서, 목원들과 교제하면서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천국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예배 때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채워 주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 닦아 주심과 어루만져 주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목마른 영혼을 채워 주시고, 곤한 영혼을 풍족하게 해 주시는 감격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나라를 체험하고, 지상교회에 있지만 천상교회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예배의 영광과 감격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마다 생수의 강이 터지고, 막힌 심령이 뚫리고, 상하고 찢긴 심령들이 회복되고 강건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서론: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섯 가지 인봉이 차례로 떼어지면서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흰 말을 타고서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은 자가 파죽지세로 승리하며 압도하는 장면으로 첫 번째 인을 떼는 것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는 전쟁, 세 번째에서 기근으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네 번째 인에서는 전쟁과 기근과 함께 역병과 짐승을 추가 되어서 심판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을 떼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큰 지진과 함께 각 산과 섬이 이동하는 지각 변동이 일어납니다.
이제 7번째 인봉이 떼어질 차례인데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천상에서 구원 받은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배와 찬양하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 가지 재앙이 계속 부어질 때 (계 6:17)“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하고 사람들이 외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어린 양의 진노에 우리에게도 ‘과연 누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큰 재앙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인을 찍어 주신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 모두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완하는 계시를 보여줌으로써 저와 여러분의 불안한 마음속에 위로와 확신을 주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이마에 인치기
7:3절입니다. 주의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이 사방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놔두시면 노아의 홍수심판 때와 같이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구원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마에 인을 받은 사람들. 이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해 주십니다.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서부영화에는 울타리가 없는 드넓은 초원에 소를 방목해 키울 때에 주인들이 자기 소를 구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불로 달군 쇠로 엉덩이에 화인을 찍어서 자기 소유를 구별합니다. “이 소는 내 소니까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에서는 자기 물건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안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때에 주님으로 부터 인침을 받은 사람을 감히 누가 손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백성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예수께서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생명을 대가로 치루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안전은 확실합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세에 재앙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합니다. 출애굽기서에서 문설주와 문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말세의 때에도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침을 받은 자들은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침을 받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침은 내 맘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도장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을 쳐 주십니다.
2. 십사만 사천 명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 쳐 주시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사람이 144,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로 부터 각각 만이천 명씩 총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12 지파 후손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됩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장정들만 60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여자들과 아이까지 포함하면 200만명이 족히 넘을 것입니다. 만약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지파 후손 십사만 사천명으로 제한한다면 해석의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에 이미 이방인들이 대다수를 차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과 신약시대 하나님 백성들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 명만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 숫자를 지금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 안에 들어가려면 자기 집단에 헌신해야 하고, 헌금도 얼마 해야 하고, 전도도 몇 명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근래 한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하고 있는 이단 ‘신천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이 정확히 구원 받은 자들의 숫자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기들만이 진리이고 참교회이기에 여기에만 구원이 있고, 기존 교회들은 다 타락한 바벨론 교회이어서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은 정확히 구원 받는 숫자이기에 이 숫자가 채워질 때 비로소 그 숫자 안에 든 사람들은 영생불사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변화하여서, 그들이 제사장이 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십사만 사천 안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천지의 신자 수가 이미 십사만 사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포교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들은 영생불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꿉니다. 신천지 교인이 되었다고 다 참된 신자가 아니기에 아직 그 수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해명하면서, 또 열심 있는 신자가 기존의 십사만 사천에 들어간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들어간다는 해괴망측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서로 경쟁을 부추기고, 전도도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직장과 학교도 팽개치고, 부모 자식도 버리고,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이단들은 십사만 사천 이란 숫자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들을 맹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십사만 사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신앙생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상징과 비유가 많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사자’로 비유하거나 ‘어린양’이란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상징이나 숫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 숫자를 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숫자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국에는 숫자 ‘4’는 한자어 죽을 사(死)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사용하기를 꺼려 합니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예를 들면 숫자 ‘3’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바로 완전하신 존재이시죠. 그리고 숫자 ‘4’는 피조물을 뜻합니다. 본문 1절에서 ‘땅 네 모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피조 세계를 나타냅니다. 또 9절에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총 4개인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에 대한 관념이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숫자 ‘7’에는 완성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심판들을 보면 완전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의미로 모든 심판들이 일곱개의 시리즈로 묶여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숫자마다 고유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십사만 사천은 12x12x1000, 이렇게 곱하면 나옵니다. 여기서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데 구약의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열두 사도입니다. 그리고 숫자 1000은 10의 3제곱입니다. 숫자 10은 유대인의 표현으로 볼 때 ‘많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10을 세번 곱하면 천이 나옵니다. 즉 10에 완전수인 3을 제곱한 숫자가 바로 천입니다. 그래서 숫자 천은 모든 사람,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12x12x1000 이 144,000이 되는데 앞에 열둘은 구약의 성도를, 뒤의 열둘은 신약의 성도를, 숫자 천은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즉 십사만 사천 명은 신, 구약 모든 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9절에서 등장하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흰 옷 입은 큰 무리
9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이 보니까 천상교회에 들림 받는 성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단지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 명이 아니라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나와서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10절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6), 이에 한탄하신 하나님은 땅의 모든 것을 홍수로 일거에 쓸어버리시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닥칠 종말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고, 각종 자연 재해과 재앙은 점점 더 빈번하게, 강도는 더 심화 될 것이고, 사랑이 식고, 온갖 불법과 불의한 일이 성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이 살기 힘든 최악의 상황으로 몰릴 때 천지를 뒤집어 엎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 받았지만 세상 끝날에는 불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천체가 불에 타서 녹아 버릴 것이며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벧후 3:10).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린 양의 피로써 희게 씻은 자들은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악인들이 온 세상에 득세할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극소수이고 별로인 듯합니다. 그런데 천상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하나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과 순교를 당했지만 천상에서 보니 승리한 성도들이 구름떼와 같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때로는 너무나 외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세상이 너무나 압도해서 우리는 별것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또 세상이 주는 유혹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믿음을 지키며 사는 자들이 사회에서 소수이다 보니 믿음대로 사는 삶이 뭔가 잘못 된 것처럼 느껴지고, 믿지 아니하는 저들이 대다수이기에 마치 그들의 삶이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하늘에서는 흰옷 입은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13,14절을 보십시오. 천상교회에서 한 장로가 물었습니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그때 요한이 뭐라고 답변합니까?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알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하고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승리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까? 그런데 수많은 위기를 잘 극복하고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려면 크고 작은 환난을 잘 극복해 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린 양의 보혈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만이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찬송가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가 인침을 받고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원하심이 누구에게 있다고요?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고, 의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만이 천성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큰 환난 중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용사들이 천국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의 축복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천성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16,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구절의 제대로 음미하려면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의 처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느라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이기에 뜨거운 태양빛 아래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박해를 받으며 고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수고와 희생을 다 보상해 주십니다. 생명수 강으로 인도하시고, 이 땅에서 당한 설움과 아픔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전도하다 무시 당하며 겪은 설움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없는 물질을 쪼개어 헌금하고, 금쪽같은 시간을 드려서 맛있는 음식으로 소외되고 약한 성도들을 섬겼던 분들의 손길들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은 단지 천국에 가서만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천상교회의 복을 지금 맛볼 수 있습니다. 천상교회는 본점이요, 지상교회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데서 맛 볼 수 없는 천국의 기쁨과 감격을 교회에서 맛 볼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공부하면서, 목원들과 교제하면서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천국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예배 때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채워 주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 닦아 주심과 어루만져 주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목마른 영혼을 채워 주시고, 곤한 영혼을 풍족하게 해 주시는 감격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나라를 체험하고, 지상교회에 있지만 천상교회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예배의 영광과 감격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마다 생수의 강이 터지고, 막힌 심령이 뚫리고, 상하고 찢긴 심령들이 회복되고 강건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