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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비극의 소용돌이 (02.19.2023) 주일예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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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53회 작성일 Apr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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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년 2월 19일
*제목: 비극의 소용돌이 (창세기강해 야곱의 귀향편 5)
*본문: 창세기 33: 18-34:17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창세기 33:18-34:17

서론: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은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그가 상담하고 치유했던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환자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를 ‘생각의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생각의 게으름 때문에 병적인 생각, 파괴적인 생각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즉흥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현대인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쭉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태초 아담과 이브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 더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뱀의 유혹을 거절했을 터인데 생각없이 그 유혹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생각의 게으름’이 우리 인간의 원죄라고 스캇 펙은 말합니다.

그의 책에는 이것에 상응하는 실화가 나옵니다. 월남 전쟁 때 베트콩이 미군 한 명을 죽이니까, 그가 소속된 미군 부대가 마을에 쳐들어 가서 그만 주민 전체를 죽이고, 증거 인멸을 위해서 아예 마을 자체를 없애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스캇 펙은 그 사건에 관련된 군인들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34장에서 전쟁에서나 벌어질 법한 그런 사건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야곱의 집안에 의해 집단적으로 저질러졌다는 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 전 르완다에서, 보스니아에서 소위 ‘인종 청소’가 일어나서 그 만행에 세계의 사람들이 경악한 적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야곱의 집안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수많은 정보와 대중 매체에 노출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환경들이 우리를 더욱 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대중의식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깊은 사고와 생각 없이 유행과 풍습을 따라갑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만연해있는 정신적 태도 중의 하나는 분명 ‘생각의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가벼워지고, 말초적이 되어가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생각의 게으름 1: 야곱

마침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형 에서와 야곱이 만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곱 번 절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생 야곱을 본 에서는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서로 울기 시작합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과 동생, 그동안의 후회와 아쉬움, 미안함, 모든 것이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형도 울고 동생도 웁니다. 화해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과 동생은 다시 만났고, 지난날의 아픔을 씻어버립니다. 용서와 화해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함께 가자는 에서의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아직 자녀들이 어리고 짐승 떼도 많아서, 에서가 데리고 온 400명의 장정들과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무리가 되지 않도록 천천히 나아가 에서가 사는 세일로 가겠다고 합니다. 물론 야곱은 세일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에서가 길잡이 겸 호위병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사람을 야곱에게 머물게 하려고 하자 야곱은 이 또한 사양합니다. 그리고 에서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야곱은 에서가 살고 있는 ‘세일’이 아니라 ‘숙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겜이란 곳으로 옮겨가 정착하게 됩니다.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런데 정작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형 에서와의 불화를 해결한 야곱은 이제 오래 전 하나님 앞에 서원한 내용을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를 피해 하란 땅을 향해 갈 때에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인 벧엘로 가서 하나님 앞에 했던 서원을 지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20-22절)에서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했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먼저,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조건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신다면, 저의 가는 길에서 저를 지켜주신다면, 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면, 제가 안전하게 아버지 집(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면’이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건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가 요청한 것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가는 길에 그를 지켜주셨고, 아무것도 없이 집을 떠났지만 풍족하게 해 주셨고,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해주셨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는 강도나 도적 떼가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자기 보다 한 수 위인 외삼촌 라반 아래서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했지만 결국 그가 돌아올 때는 대가족이 되어 있었고, 많은 종들과 가축 떼를 소유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응답해 주셨다면 이제 자신이 서원했던을 지켜야 할 차례입니다. 첫째로,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둘째로,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이곳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전을 세우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자원해서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강요하신 게 아니라 자기가 자발적으로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풍성한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서원했던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세겜 땅에서 밭을 사서 그곳에 정착하고, 거기에 단을 쌓습니다. 사실 세겜에 장막을 치고 정착할 것이 아니라 벧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벧엘은 세겜으로 부터40-50 km 정도의 거리라서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서 땅을 사서 정착하려고 했습니다. (19-20절)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의 바뀐 이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 속에 내포된 마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래서 이 이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으니까 누구와 겨루어도 자신이 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는 믿음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세겜에 단을 쌓은 것은 좋은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약속대로 하면 야곱은 벧엘로 가서 거기에 하나님의 전을 세워야 했습니다. 단지 작은 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의 십일조를 ‘반드시’바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은 이전에 맹세했던 서원을 지키지 않고 뭉게고 있습니까? 20년이나 흘렀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자신이 서원했던 것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그런데 계산이 빠르고 정확한 야곱이 잊어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자기가 서원한 것을 안 지키면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음이 있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서원한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직전에 있었던 에서와의 사건을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32장에서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예물을 엄청나게 준비해서 그것도 몇 차례에 나누어 보냈습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는 낙타 30마리, 거기에 딸린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입니다(32:14-15).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것을 요즘 돈으로 환산해보면 100만 불이 가볍게 넘어가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가 사양하는데도 강권하여 받도록 했습니다(33:11). 어쨌든 그렇게 했는데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돈을 너무 많이 쓴 겁니다. 아무리 야곱이 백만장자였다고 해도, 이 정도면 자기 재산의 엄청난 부분이었을 텐데, 이제 막상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행하려보니 망설이게 된 겁니다.

이미 에서를 위해 엄청난 돈을 사용했습니다. 거기서 또 재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치고, 게다가 벧엘에 하나님의 성전까지 짓는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가게 되니까, 계산이 빠른 야곱으로서는 암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꼭 돈 욕심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딸린 식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아내가 넷이고, 아들들이 열하나이며 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종들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그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싸우는 군사 비슷하게 자기 집에서 기르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축들이 많은데 다 먹여 살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루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조금만 계산해보아도 ‘여기서 돈이 더 나가면 힘들겠는데’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야곱의 돈 욕심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돈을 다 쓰면 어떡하지? 가족이 굶어죽으면 어떡하지?’

우리의 문제도 돈 욕심 보다는 두려움이 더 근원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은혜 받고서 올바른 헌금생활를 하고 싶어 합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한 번 십일조를 바치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렇게 잘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잘 안 되는 경우에 ‘이걸 다 했다가는 생활이 어려워질 텐데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 욕심 보다 ‘이렇게 하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다 썼다가 내가 쓸 돈이 없으면 어떡하지?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우리 애들이 힘들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입니다.

이전에 벧엘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내리락 했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서원했는데 세겜에서 그냥 작은 제단 하나를 대충 쌓았습니다.

결국 야곱은 서원을 지키는 흉내만 낸 겁니다.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하게 된 원인은 물질적인 것이었고,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의 식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까 봐 염려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신앙적 결단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돌리며 꾀를 내어도, 우리에게 속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돈을 제대로 안 바쳤으니까 네가 값을 치르게 하겠다.’라고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 꾀를 내어 살고자 하는 자에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언제까지 일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기 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마음 속에 염려와 두려움이 없어지기 까지 묵묵히 지켜 보시며 기다리십니다.

이후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쭉 보면, 나중에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는데, 그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사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더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하셨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도록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도록 훈련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랑하는 요셉이 없어져 죽은 줄 알게 되고, 베냐민마저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서 그는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하고 담담히 상황을 받아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 있던 두려움, 즉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이 지점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는 험악한 세월을 보내며 연단과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아주 혹독한 댓가를 지불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너희는 아무 것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신뢰하며 내 명령에 순종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지켜 보호하겠다, 내가 책임져 주겠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는 그들에게 메추라기 새떼를 몰아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원망 불평합니다.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을 져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의 채찍으로 이방 나라의 압제를 당하도록 하셨지만 그때뿐, 그들은 다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며 혹독한 연단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지만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내 자신의 삶과 마음을 성찰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마음이 야곱처럼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식으로 살기를 고집하는지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도 크고 작은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때로는 야곱처럼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노라’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2. 생각의 게으름 2: 디나와 세겜

2절을 보십시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우상을 섬기면 결국 음란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이 그랬습니다만 세겜 사람들도 성적인 일에 대해 제한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에 들기만 하면 성관계를 갖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그런 풍습에 살던 여자들과 디나는 달랐습니다. 죄의 문화에 푹 절여 사는 여자들과 뭔가 분위기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세겜의 눈에 디나가 더 마음이 가고 관심을 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하고싶은 대로 디나를 끌어들여 강간한 것입니다. 물론 강간은 약간 물의가 되겠지만 세겜처럼 높은 위치에 있고, 게다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3-4절)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게 주소서 하였더라”

세겜은 그 마음에 깊이 디나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디나의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는 디나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디나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나마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폭행을 한 것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세겜이 저지른 죄악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폭행에 강제구금, 그리고 권력남용과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아주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뉘우침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청혼을 요청하기 전 먼저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12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찌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대로 수응하리라”
오늘날에도 ‘피해보상해 주면 다 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자식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얼빠진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푹 절여 있어서 양심마저 실종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현재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일이 전혀 겪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디나의 경우를 다시 한 번 살펴 봅시다. 2절에서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보러 나갔다”는 ‘보다’라는 히브리어 ‘라아’에서 파생된 동사로서, ‘매우 세심히 관찰하다’, ‘배우다’, ‘즐기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나는 단순히 가나안의 이방 문화를 구경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 여인들, 즉 가나안 여인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교제를 나누며, 그 땅 풍속을 배우고 즐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청소년이기에 적어도 부모가 이를 두고 경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을 비롯한 가족 모두 가나안 족속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낯선 도시를 배회하던 디나는 결국 성적욕망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세겜의 눈에 포착되어, 강제로 겁탈당하는 뼈아픈 상처를 입게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온갖 즐거움과 재미가 참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의 화려한 모습에 빠져 잘못된 발걸음을 내딛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디나의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잊고 세상의 문화를 쫓는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인지를 다시 한 번 더 각성시켜 주는 반면 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비록 세상 가운데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 문화를 추종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백성답게 구별되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서 우리를 위험으로 부터 지켜 보호하는 길입니다.

3. 생각의 게으름 3: 야곱과 아들들의 반응

(5-7절)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야곱은 이 사건을 듣고 잠잠했습니다. 어쩌면 문제가 확대되기를 원치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세겜에 정착하는 것이 장애 받지 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이 문제가 일어난 근본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깨닫기 원하시는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하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각성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였고,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반면에 아들들은 이 일에 대해서 심히 분노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오빠들이 극렬히 분노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 심히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전혀 하나님 백성 답지 못했습니다.

13-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 아비에게 거짓말로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하기만 하면 디나를 주고 그들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 속에 새기기 위해서 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 받은 백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을 영접하고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민족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할례를 이용하여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마치 지금 예수 믿고 세례 받으라고 한 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세례하려고 물에 들어가자 사람을 죽이고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까지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연상케 합니다. 십자가군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들은 성폭행하고 심지어 사람의 고기까지도 먹었다고 합니다. 교황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유익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들은 겉모습만 하나님의 사람이지 실상 마귀의 충동질에 놀아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언약의 백성 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사고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답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족장으로 세워지기 까지에는 앞으로 더 많은 연단과 훈련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결론:
야곱은 세겜에 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며 부르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디나 문제로 인해 일순간에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내가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할 때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다 됐다고 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늘 경계하고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형통하고, 평안할 수록 더욱 그리 해야 합니다. 특히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가 이렇게 평안히 지내니 좋다. 감사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되겠지.’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영적인 삶에서 소홀히 한다면, 갑자기 일이 터질 때 야곱처럼 또 그 아들들처럼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디나처럼 죄에 대한 호기심은 적당한 기회와 합쳐질 때 언제고 폭발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은 또한 죄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가 형통할 때에도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처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히 3:1)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길을 인도하시며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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