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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마침내 화해하다 (02.12.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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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11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2월 12일
*제목: 마침내 화해하다 (창세기강해 야곱의 귀향편 4)
*본문: 창세기 33: 1-17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창세기 33:1-17

서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진 젊은이가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생전에 유산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과도 같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유산을 받아 마음껏 써 보려고 집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때에 비로소 제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따뜻한 환영은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멀리서 아들이 귀향하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갑니다. 집을 떠난 아들을 과분할 정도로 관대하게 환영하는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과 화해를 이룹니다.

이 비유가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아름답고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화하여 깨어진 관계를 경험한 적이 있고, 그래서 그런 멋진 용서와 화해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쾌락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마음에 평화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밖에서 성공하였고, 사회적으로 출세하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불화합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외적으로 아무리 부족함 없이 살아도 가까운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지 못하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편안과 평안은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편안하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갖출 것 다 갖추고 불편함이 없어도 내면에 하나님이 없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내 야곱과 에서가 서로 용서하며 화해가 이루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서나 접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목을 이루고 산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또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받을 때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화해와 화평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위기의 순간

20년 동안 헤어졌던 쌍둥이 형과 동생이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정말 오랜만에 만났으니 며칠 동안 잔치를 벌이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밤을 지새웠을까요? 그런데 에서와 야곱, 이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헤어지기 전 동생 야곱은 비열하게도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챘습니다. 또 속임수를 써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형 에서는 동생 야곱에 대해서 이를 갈며 칼을 갈았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의 이런 과거를 생각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워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의 만남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중간에서 중재하거나 말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곁에 이삭이나 리브가가 있으면 뒤에 숨기라도 할 텐데, 그럴 수 없습니다.
일이 어찌되었든 드디어 야곱의 눈에 에서가 오는 것을 봅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몇몇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400명과 함께 자신에게로 오고 있습니다(1절)

야곱은 이 짧은 순간에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나름의 머리를 씁니다. 자신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나눕니다. 여기에서도 야곱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첩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 자녀들을 앞에 둡니다. 그 다음은 덜 사랑하는 아내 레아와 자녀들은 그 다음에 두고, 마지막에는 제일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요셉을 제일 뒤에 둡니다(1b-2절).

야곱은 만약을 대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비라고 생각했겠지만, 문제는 야곱의 선택에 따라서 누군가는 더 안전한 자리로, 누군가는 더 위험한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거나 방패막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누구는 제일 앞에 있어야 했고, 누구는 제일 뒤에 있어도 됩니다. 야곱이 가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야곱 집안에 계속되는 자녀에 대한 편애와 차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대상은 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에서가 잡은 짐승을 요리한 고기를 좋아해서 사냥꾼 에서를 편애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장막에서 조용히 가사 일을 돕던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내 라헬을 사랑한 나머지 그 아들 요셉을 지나치게 편애하였고, 훗날 이로 인해 나머지 자녀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리는 원인이 됩니다.

2. 변화 된 야곱의 모습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은혜를 체험해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야곱이 아내들과 자녀들을 앞에 보내고, 자신이 그 뒤에 숨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 에서를 맞이합니다. 3절입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특별히 야곱은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는데 한 곳에 가만히 서서 한 것이 아니라 차츰 가까이 가면서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왕이나 높은 사람들을 만날 때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멀리서 부터 일곱 번 절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던 방식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앞에 두고 최대한 예의와 존경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4백명이나 끌고 오는 에서의 위세에 눌려 두려운 나머지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불과 몇 분 밖에 차이나지 않는 쌍둥이 형에게 일곱 번 씩 땅에 굽히며 나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움과 비굴함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얍복 나루에서 밤새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한 사건이 그의 심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입니다. 지극한 정성과 노력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의 사나이 야곱이 그만 힘의 근원인 환도뼈가 위골 될 만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한 그는 완전히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아주 가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 앞에서 납작 엎드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에게 있을 수 있는 급격한 태도 전환입니다.       

3. 용서와 화해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형 에서에게 나아갈 때에 죽일 듯이 달려오던 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4절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곱 번 절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생 야곱을 본 에서는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서로 울기 시작합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과 동생, 그동안의 후회와 아쉬움, 미안함, 모든 것이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형도 울고 동생도 웁니다. 불화한 채로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과 동생은 다시 만났고, 지난날의 아픔을 씻어버립니다.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에서가 보여준 이 따뜻한 환영은 에서가 야곱을 용서했고, 야곱에 대해 복수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에서의 생각에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하나님이 에서에게도 복을 주셔서 그도 번성하였기에 야곱에 대한 시기나 원망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마음을 녹이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풀어지고 너그러워졌습니다. 야곱을 믿음의 족장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에 따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서 가서 에서의 마음을 미리 만져 주신 것입니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야곱을 껴안고 울던 에서가 곁에 있는 무리를 보고 묻습니다. 5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가족이라며 그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순서대로 에서에게 나아가 몸을 굽혀 절을 합니다. 가족 소개가 끝나자 에서가 예물로 보낸 수많은 가축들에 대해서 묻습니다. 8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야곱은 에서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만나러 오는지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 했습니다. 에서로 부터 은혜를 입으려고 선물 공세를 펼쳤던 것입니다. 물론 에서도 그 많은 가축 떼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물로 받기에는 너무 과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9절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우리는 에서의 대답을 보면서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예물 때문에 야곱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바꾼 것은 야곱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에서가 야곱의 예물을 거절하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10-11절 읽겠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은 형이 자신을 용서한 것은 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강권하면서 에서가 선물을 받도록 했을까요? 그렇게 예물을 받도록 간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가축이 너무 많아서 좀 줄여야 했기 때문에, 어차피 줄일 거면 형에게 주자.
둘째, 이미 준 것을 다시 돌려받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에.
셋째,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형과 나누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넷째, 나중에 혹시 형의 마음이 바뀌더라도 예물이 화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야곱의 입장에서는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섯째, 옛적에 했던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넷째와 다섯째를 꼽습니다. 예물을 받는 것은 서로 화해했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훗날 혹시 마음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을 미리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에게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잘못을 갚으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간청하면서 했던 말 중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아부성 발언이라고 보기에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요즘 표현으로 좀 오글거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여기 나오는 얼굴이라는 말은, 야곱이 앞 장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고백했던 브니엘의 사건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야곱은 내가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겠다고 했고, 또한 내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지만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저자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두 사건을 연결합니다.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셨던 하나님과의 만남과 지금 에서와의 만남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두 인물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씨름했던 알 수 없는 낯선 사람,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했던 에서, 그런데 동일하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사람과의 만남 이후 야곱은 마음에 평화를 얻습니다. 생명이 보전되었고, 화해를 얻게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형으로부터 용서를 얻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경험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지금 에서와의 만남으로 다시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용서하는 형의 얼굴에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이 말을 할 때, 에서의 입장에서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없이 화해를 이룬 두 형제는 또한 다툼 없이 평화로운 분리를 이루어냅니다. 평화롭게 각자 자기 길을 갑니다. 두 형제의 헤어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17절)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숙곳은 ‘오두막, 초막’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곳에 임시 거처를 세웠습니다. 가축들을 위해 우리도 지었습니다. 이는 야곱이 그 땅에 정착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여행을 했던 야곱과 일행은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것입니다. 야곱은 숙곳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이 땅에 부자가 되어 돌아왔고, 문제없이 평화롭게 정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새 차를 뽑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차 문을 열면 새 차 냄새가 좋습니다. 푹신푹신한 쿠션에, 스위치만 넣으면 좌석에 열선이 들어오죠. 오디오도 팡팡 터지지요. 너무너무 좋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운전합니다. 주차해도 다른 차들로 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합니다. 틈만 나면 차를 닦고, 광택을 내고, 번쩍번쩍 빛을 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차한 차를 보니 누가 봐도 고의적으로 차의 옆구리를 확 긁어놨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온갖 신경질과 미움과 분노와 짜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새 차에 난 흠집을 보고 마음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모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평강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과 편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와 쾌락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셔야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런데 하늘로 부터 오는 평강을 누리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심각하게 말씀해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역겨워하시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시며, 죄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동시에 죄인과 화목케 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화해를 담은 사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희생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사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한 화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터 위대한 새출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생명이 충만한 세계, 환희와 기쁨이 충만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신앙생활이란 고행이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이것저것 지켜야 되는 율법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끊임없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화평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더 깊어지고 충만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누리며 화평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도 화목하게 되고, 이웃과도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왜 성도의 삶이 팍팍하고 기쁨이 없을까요? 왜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을 걷는 것 처럼 고달플까요?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데서 기쁨을 얻으려고 시도합니다. 세상 재미와 쾌락에 한 눈 팔게 됩니다. 그러다가 죄의 올무에 걸려 넘어집니다. 또 다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빼앗기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지금도 말씀과 기도 대신에 인터넷 영상과 TV을 보도록 하고, 말씀 묵상하는 대신 세상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하도록 유혹하여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며, 말씀과 기도생활을 등한히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더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십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오는 평안을 누리십니까? 그리고 이 화평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셨습니까?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모두 이 복된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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