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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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59회 작성일 Oct 07 2024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5:1-14
인간은 본래 고도의 주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고, 다시 소생할 기회가 있는데도 생을 포기하고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극복할 수 없어. 그만 죽어버리자!” 반면에 남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 둘 사이를 다르게 할까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사건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건을 해석하는 능력의 차이입니다.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이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귀에 들려오는 대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란과 핍박의 시대에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보았던 환상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 높은 곳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상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과 권세를 보이셨다는 표현이고, 또 그분이 지금 집무를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집무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로마였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모든 국가와 나라들을 제패했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길을 닦았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학문, 종교, 건축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로마를 향했고, 또 로마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로마 중심에는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여 찬양과 경배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세상이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로마 황제 권력자가 자신을 ‘주’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목격한 장면은 로마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존하신 분이 왕으로서 친히 온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성도들의 마음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확 달라졌습니다. 심지어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도하면서 담담히 맞이했습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계시록 4장에서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광경을 통해서 우리의 관점이 바뀌도록 하였다면 오늘 말씀에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촛점이 맞춰지면서 우리를 놀라운 예배의 광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를 통해 우리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지,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오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일곱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지금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오른 손에 책이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그 책, 두루마리 안팎으로 종말에 대한 계획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안팎으로 써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세워져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수석 장관들이 결정한 사항은 기밀에 붙여집니다. 그러다가 30년, 50년이 지난 뒤에 공개됩니다. 중요한 군사적 행동이나 외교 관계사항은 극비 문서이기 때문에 즉시 공개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최측근 몇 사람만이 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유력자가 죽을 때에 유언장을 여러 겹으로 싸서 납이나 밀랍 같은 것으로 인봉하여 함부로 못 열어 보게 했습니다. 오직 상속자만 열어보게 했습니다. 한 나라와 가문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취급하여 이처럼 비밀스럽게 다루게 되는데 하물며 인류의 구속과 종말에 관한 문제라면 얼마나 더 신중하겠습니까?
그래서 힘 있는 천사가 큰 소리로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외치는데, 하나도 아니고 일곱 개나 봉인이 된 그 책을 감히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그 누구도 그 인을 떼어서 펼쳐 볼 수 없었습니다. 누가 감히 영광과 거룩의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책이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지금 지상 교회들은 어마어마한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까?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충성한 자들은 어떻게 보응해 주실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두루마리에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어서 그 안에 써진 글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십시오. 24장로 중에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유다 지파 출신의 사자, Lion이 그 일곱 인을 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뿌리로서 왕의 혈통을 타고 나신 분입니다. 왕권을 가진 메시아 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두루마리의 일곱 인봉을 떼시고 거기에 담긴 천상의 비밀, 역사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어린 양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서 계셨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분명히 5절에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사자와 같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잖아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그 큰 머리를 흔들면서 갈기를 세우고 포효하는 모습을 나타나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이 애처롭고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그 이유를 우리는 9, 10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피로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가끔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다 죽어가는 자식을 병원으로 안고 와서 의사와 간호원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사 선생님, 이 아이를 꼭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매달립니까? 그 자식을 나중에 잘 써 먹으려고? 자식 통해서 무슨 대가를 바라기 때문에?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한 가지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피로써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을 닮은 자녀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상속자로 삼기 위해서, 땅에서 왕노릇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본래 성자 하나님이시나 우리를 사시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비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6절에서 예수님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데, 일곱 뿔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능력과 완전한 지혜로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2. 예배 받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 두루마리를 취하셨을 때에 천사들과 24장로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천사들과 24 장로들이 새 노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왜 새 노래입니까? 어린 양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감격으로 부르는 노래이기에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의 구원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에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리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이기에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피로서 우리를 사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시고, 왕처럼 살게 하셨으니 어린 양 예수님을 마땅히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와 수치와 무능의 상징으로 봅니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해 보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얼마나 무능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패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하나님께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어요. 칼이나 창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고상한 말로 승리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죄인들을 사셨습니다. 십자가로 원수 마귀 사단을 박살 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서 죽음의 권세까지 파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시고, 죽음에 대해서는 무덤에서 일어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승천하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어떤 내용으로 찬양을 돌립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영원토록 받기에 합당 하십니다. 이 찬양의 내용과 십자가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1) 먼저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는 실패와 패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어린 양이 경배와 찬양을 받습니다. 그 십자가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2)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난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에서는 ‘부’가 됩니다. 그분이 가난케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3) 십자가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천상의 관점에서는 십자가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4) 십자가는 연약함과 무력함의 전형적인 표시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관점에서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5) 십자가는 수치를 드러냅니다. 죄수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켜 주지 않고 다 발가벗기는 형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시와 조롱과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해서 ‘존귀’한 분으로 올림을 받습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6) 십자가는 치욕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7)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찬송’입니다. 십자가는 저들에게 저주이었지만 이제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높이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입을 열어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고 역사를 완성시킬 수 있으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심판 하시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수 있으십니다. 역사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찬양의 이유되시며 찬양의 대상 되십니다.
찬양은 해야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그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찬양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고민이 되어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솟구칩니다.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까?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기도를 올려 드리고, 그 분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찬양을 영원토록 드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간은 본래 고도의 주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고, 다시 소생할 기회가 있는데도 생을 포기하고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극복할 수 없어. 그만 죽어버리자!” 반면에 남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 둘 사이를 다르게 할까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사건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건을 해석하는 능력의 차이입니다.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이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귀에 들려오는 대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란과 핍박의 시대에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보았던 환상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 높은 곳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상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과 권세를 보이셨다는 표현이고, 또 그분이 지금 집무를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집무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로마였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모든 국가와 나라들을 제패했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길을 닦았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학문, 종교, 건축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로마를 향했고, 또 로마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로마 중심에는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여 찬양과 경배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세상이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로마 황제 권력자가 자신을 ‘주’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목격한 장면은 로마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존하신 분이 왕으로서 친히 온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성도들의 마음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확 달라졌습니다. 심지어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도하면서 담담히 맞이했습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계시록 4장에서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광경을 통해서 우리의 관점이 바뀌도록 하였다면 오늘 말씀에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촛점이 맞춰지면서 우리를 놀라운 예배의 광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를 통해 우리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지,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오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일곱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지금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오른 손에 책이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그 책, 두루마리 안팎으로 종말에 대한 계획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안팎으로 써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세워져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수석 장관들이 결정한 사항은 기밀에 붙여집니다. 그러다가 30년, 50년이 지난 뒤에 공개됩니다. 중요한 군사적 행동이나 외교 관계사항은 극비 문서이기 때문에 즉시 공개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최측근 몇 사람만이 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유력자가 죽을 때에 유언장을 여러 겹으로 싸서 납이나 밀랍 같은 것으로 인봉하여 함부로 못 열어 보게 했습니다. 오직 상속자만 열어보게 했습니다. 한 나라와 가문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취급하여 이처럼 비밀스럽게 다루게 되는데 하물며 인류의 구속과 종말에 관한 문제라면 얼마나 더 신중하겠습니까?
그래서 힘 있는 천사가 큰 소리로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외치는데, 하나도 아니고 일곱 개나 봉인이 된 그 책을 감히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그 누구도 그 인을 떼어서 펼쳐 볼 수 없었습니다. 누가 감히 영광과 거룩의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책이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지금 지상 교회들은 어마어마한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까?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충성한 자들은 어떻게 보응해 주실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두루마리에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어서 그 안에 써진 글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십시오. 24장로 중에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유다 지파 출신의 사자, Lion이 그 일곱 인을 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뿌리로서 왕의 혈통을 타고 나신 분입니다. 왕권을 가진 메시아 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두루마리의 일곱 인봉을 떼시고 거기에 담긴 천상의 비밀, 역사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어린 양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서 계셨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분명히 5절에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사자와 같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잖아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그 큰 머리를 흔들면서 갈기를 세우고 포효하는 모습을 나타나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이 애처롭고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그 이유를 우리는 9, 10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피로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가끔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다 죽어가는 자식을 병원으로 안고 와서 의사와 간호원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사 선생님, 이 아이를 꼭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매달립니까? 그 자식을 나중에 잘 써 먹으려고? 자식 통해서 무슨 대가를 바라기 때문에?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한 가지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피로써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을 닮은 자녀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상속자로 삼기 위해서, 땅에서 왕노릇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본래 성자 하나님이시나 우리를 사시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비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6절에서 예수님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데, 일곱 뿔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능력과 완전한 지혜로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2. 예배 받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 두루마리를 취하셨을 때에 천사들과 24장로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천사들과 24 장로들이 새 노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왜 새 노래입니까? 어린 양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감격으로 부르는 노래이기에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의 구원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에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리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이기에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피로서 우리를 사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시고, 왕처럼 살게 하셨으니 어린 양 예수님을 마땅히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와 수치와 무능의 상징으로 봅니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해 보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얼마나 무능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패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하나님께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어요. 칼이나 창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고상한 말로 승리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죄인들을 사셨습니다. 십자가로 원수 마귀 사단을 박살 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서 죽음의 권세까지 파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시고, 죽음에 대해서는 무덤에서 일어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승천하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어떤 내용으로 찬양을 돌립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영원토록 받기에 합당 하십니다. 이 찬양의 내용과 십자가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1) 먼저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는 실패와 패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어린 양이 경배와 찬양을 받습니다. 그 십자가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2)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난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에서는 ‘부’가 됩니다. 그분이 가난케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3) 십자가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천상의 관점에서는 십자가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4) 십자가는 연약함과 무력함의 전형적인 표시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관점에서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5) 십자가는 수치를 드러냅니다. 죄수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켜 주지 않고 다 발가벗기는 형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시와 조롱과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해서 ‘존귀’한 분으로 올림을 받습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6) 십자가는 치욕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7)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찬송’입니다. 십자가는 저들에게 저주이었지만 이제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높이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입을 열어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고 역사를 완성시킬 수 있으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심판 하시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수 있으십니다. 역사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찬양의 이유되시며 찬양의 대상 되십니다.
찬양은 해야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그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찬양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고민이 되어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솟구칩니다.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까?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기도를 올려 드리고, 그 분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찬양을 영원토록 드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