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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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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65회 작성일 Sep 3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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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계시록 4:1-11

서론: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서신서를 쓸 무렵에 교회는 두 가지 위협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핍박이고, 내부로 부터는 이단의 발흥과 부패입니다.

본래 로마제국은 정복한 민족과 나라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게 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신흥종교 그리스도교도 유대교의 한 분파쯤으로 여기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성장하며 그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자 주시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이 로마제국의 황제 가이사의 지배를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와 힘에 의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로마 정부는 긴장하게 됩니다. 더구나 황제 숭배를 거절하자 국가의 막강한 힘으로 교회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 달려듭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배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남은 이들도 숨을 죽이며 두려움과 공포심, 낙심과 좌절감,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으로 팽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부로 부터의 핍박도 무시무시했지만 더 큰 위협은 내부로 부터 왔습니다. 슬며시 교회 안으로 파고든 각종 이단들의 활동과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분열적 행위, 그리고 영적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더욱 심각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은 사라지고, 탐욕과 탐심과 음란이 교회의 영성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우리는 이대로 끝장인가, 교회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인가,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를 버리셨는가…이 캄캄한 암흑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사도 요한이 찾은 한 줄기 희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목격한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요한계시록 2, 3장을 통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교회들은 칭찬 받을 만한 점들도 많았지만 책망 받을 만한 문제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천상 교회의 모습입니다. 2장과 3장에 나오는 지상 교회와는 차원이 다른 천상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1. 보좌에 앉으신 이

1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이 일어날 일들을 내게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만 그래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영적 세계. 천상의 신령한 감격, 신령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말씀의 은혜의 세계.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세계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상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절과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같더라”

천상 교회의 맨 중앙에는 하늘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 위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곳에서 좌정하사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란 단어는 40회가 등장합니다. 보좌란 통치자가 다스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이 보좌에 앉는 존재가 왕이며 통치자입니다. 지금 지상에서는 로마의 도미티우스 황제가 보좌에 앉아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온 세계가 두려워 벌벌 떱니다. 이 권세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권세 아래 풍전등화처럼 아주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지금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로마 황제가 이 땅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였는데, 영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세상 역사의 핸들을 잡고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위로를 줍니다. 아무리 세상에 악과 죄가 만연하고, 불의와 부정이 가득하고, 범죄가 득실거린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심판하시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앉은 이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3절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그 분의 빛나는 광채, 빛나는 영광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습은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써는 도저히 형용할 길이 없어서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보석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보석들이 가진 빛의 특성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엿보게 됩니다.

벽옥은 수정과 같이 티없이 맑은 보석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상징합니다. 홍보석은 붉은 빛 나는 보석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의미합니다. 녹보석은 푸른 빛으로서 심판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와 자비를, 그리고 무지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세상의 강대국들이 좌지우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저 하늘 성전에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모든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0: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여져서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으며 짐승같이 생활한 것처럼 비참하게 됩니다. 그의 후계자 벨사살 왕은 귀족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여호와의 기명들에 술을 따라 마시며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 날 밤에 죽게 하시고, 그의 나라는 메대와 파사에게 패망하게 하셨습니다.

현실에서는 세상 왕들이 높은 보좌에 앉아 자신의 힘과 지혜를 자랑하며 세상 역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그 분의 뜻이 성취됩니다. 사도 요한이 이처럼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지금 아무리 이 지상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짓밟히는 것 같지만 천상 교회는 여전히 영광 가운데 존재하고 있구나!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이 지상 교회를 친히 보호하시고 굳게 붙들고 계시는구나!’하는 확신을 갖지 않았겠습니까?

2. 천상에서 드리는 예배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4절입니다. “또 보좌에 둘러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전통적으로 이십 사 장로들은 구약과 신약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구약 십이 지파, 신약 십이 사도들로서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3장 21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지금 교회의 성도들은 이 땅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에게 붙잡혀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채찍에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네로나 도미티안 황제들은 성도들을 붙잡아서 그 몸에 아스팔트 재료가 되는 코르타르를 발라서 하루 종일 불태워 죽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불쌍하고 억울합니까?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했던 성도들이 지금 어디에 앉아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빛나는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숨어 지내느라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칼과 창에 죽고, 채찍에 맞아 피범벅이 된 옷 그대로 땅에 묻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 찬란한 금 면류관을 쓰고 밝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퍼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위용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은 일곱 영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샅샅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밀한 생각과 행위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는 네 생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6절). 그 생물들은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사들로서 각각 사자, 송아지, 독수리, 그리고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자와 같이 용맹하고, 송아지와 같이 부지런하며, 독수리와 같이 빠르고, 사람과 같이 지혜롭습니다.

더구나 그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를 지녔습니다. 또 그 안팎에는 눈들이 가득했습니다. 날개가 여섯이나 되니 천사들이 못 가는 곳이 없습니다. 눈이 안팎에 달렸으니 못 보는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CCTV를 설치하면 세상 어디에서 일어나도 다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있는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8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천사들은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24장로들도 세세토록 살아계실 하나님께 면류관을 벗어 드리며 경배를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는 속주의 왕들은 황제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황제 앞에 자기의 왕관을 벗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십사 장로들도 자기들의 머리에 금으로 된 관을 벗어 보좌 앞에 드렸습니다. 이것은 복종의 의미로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충성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경배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온 우주와 세상 역사를 친히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을 돌려 드렸습니다.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지금도 우리의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굴복하며,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예배의 능력

사도 요한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이 영광스러운 광경을 자세히 기록하여 전해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해 무엇을 말씀해 주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육적인 눈으로 세상만을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세상과 역사 배후에 있는 영적 실체를 바라보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 관점에 사로잡혀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던 성도들의 눈을 천국의 관점으로 바꾸어 주려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안목이 생길 때 우리는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관점이 바뀌자 성도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싸우고 있는 믿음의 싸움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무의미한 고난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섭리하고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여 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다!’

이런 깨달음이 왔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확 달라졌습니다. 심지어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도하면서 담담히 맞이했습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핍박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특징 중 하나가 기쁨 아닙니까? 사도들이 매를 맞고 생명의 위협을 당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예배 드릴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시편 73편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시편 73편을 지은 아삽은 다윗 왕 시대 이스라엘을 대표하던 찬양대 지휘자입니다. 그는 평생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만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나는 사는 게 이처럼 고달픈데, 왜 저 악인들은 저렇게 고민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악인이 형통하고, 반면에 의인이 재앙을 당하는 이 모순을 보고서 아삽은 이 문제를 놓고 계속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 해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간만 점점 흘러가고, 삶에 대한 불만과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민이 쌓여만 가던 어느 날, 아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비로소 두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은 영원히 살아갈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살다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풍이나 여행을 떠나면 미처 챙기지 못한 물품과 시설의 부족으로 불편을 느낍니다. 그래도 개의치 않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둘째로 아삽은 인생의 진정한 복은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이 진짜 복이구나?”

이처럼 아삽이 ‘영원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고통 당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초라해 보이고, 저 형통한 악인들이 무척 부럽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자, 이제는 악인들 앞에 놓여진, 두렵고 떨리는 파멸이란 낭떠러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시 73:18) 

이 땅에서는 악인들이 더 부유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아간 악인들이 올라간 곳은 결국 미끄러져 내려갈 곳입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악인이 망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투수가 포수를 향해 강속구를 던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직접 “파멸에 던지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교만이란 목거리를 차고, 폭력이란 옷을 입고 여기저기 주름잡고 다녔지만, 한 순간에 멸망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저들은 지옥의 아랫목에서 영원토록 처절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들의 최후입니다.

아삽은 악인들의 이런 최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이르렀을 때, 잊고 있었던 이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한 나머지 믿음을 저버리고, 신앙을 포기할까 하고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습니다. 악인들이 누리는 세상의 쾌락과 달콤함에 잠시나마 눈이 멀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연약한 모습에 아삽은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시 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하나님, 제가 어찌 이렇게 어리석었을까요? 세상을 주님 보다 사랑해서 주님을 버리다니요… 제가 너무도 미련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입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의 상황과 현실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악인들은 돈도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삽이 겪던 고통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최근 기사를 보니까 2024년 지금 미국은 중류층이 소유한 모든 부보다 상위 1%가 소유한 부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래프를 보니까 2000년대 들어서 아주 급속도록 그 간격을 좁히더니 이제 초월해 버린 것입니다. 현실은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입니다.

이전 아삽이라면 형통하게 잘 사는 악인들을 보고 질투하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시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 비록 내 몸과 마음은 다 시들어 가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힘을 주시는 든든한 반석 되시니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원한 분깃 되시기 나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환상 가운데 사도 요한을 천상의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분께 찬송과 영광을 드리는 예배에 참여하니 얼마나 감격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이 감격으로 인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서러움을 능히 극복하고,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불신과 회의와 인간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이 영광의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오는 것이지, 무슨 공연 관람하듯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24장로들처럼 왕관을 벗어드리며 찬양과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지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A.W. 토저(Aiden Wilson Tozer)는 ‘종교가 부패해 가는 점진적 삼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 단계는 기계적 상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아무런 느낌이나 감정 없이 그저 반복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똑같은 순서를 반복합니다. 아무런 감격도 없이 찬송하고, 설교를 듣지만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계적 상태의 모습입니다.

기계적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두 번째 단계 습관적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매주일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예배 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 있어도 전혀 문제의식이 없는 상태가 습관적 상태입니다.

습관적인 상태는 필경 그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부패한 상태입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회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길을 고치기 위해서 성경책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상태에 있는 교회도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행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이 없고, 기도의 권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찬양의 능력이 없으며 예배의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의에 빠져 자만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부패한 교회의 끔찍한 모습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싱싱하고 푸른 나뭇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로 나무껍질을 깊이 벗겨 보십시오. 수액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늙어 죽은 나무는 그냥 서 있을 뿐입니다. 칼을 꺼내어 파내어도 그 나무는 죽었기 때문에 수액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영혼이 살아있는 반응입니까? 아니면 죽어 있는 상태라 반응이 없습니까? 예배 중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니까? 그분으로 인해 기뻐하십니까? 그분을 즐거워하며 찬송하십니까? 감격적으로 감사 기도가 터져 나옵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몰입하여 내 영혼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경험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영혼에 불을 지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전율과 희열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 가운데 이런 감정과 느낌이 뒤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다면 예배의 자세를 다시 점검합시다. 우리 내면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호소합시다. 우리에게 예배의 영을 부어달라고 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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