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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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95회 작성일 Sep 23 2024본문
본문: 계 3:20-22
서론: 우리 자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갈급함이 내 안에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합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인일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는 영성은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에 입맛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가난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습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립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애통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에 하나님의 부요함이 부어지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있습니까?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말씀처럼 충만함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부요함에 이르고 있는가? 만족함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끄시지 아니하시면 내게로 올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만나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기에 복되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그 맛을 보았기에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습니다. 목마른 것처럼, 굶주린 것처럼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이 은혜를 다윗은 맛보았습니다. (시 63:3-5)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왜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놀라며 감격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초라하고 비참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만큼만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이 목말라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은혜도 부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미지근하여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 후 충만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한 끼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하며 사귐을 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고, 누구와 더불어 같은 꿈을 꾸며, 누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누구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내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교제하면 결국 술과 친해질 것입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 교제하면 도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자꾸 만나면 같이 운동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책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하고 교제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치는 사람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식사 자리는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는 신분과 계급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과 종이 먹는 음식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종은 절대로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비슷한 신분의 사람끼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스스로 낮추셨고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고,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우리와 함께 교제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다윗의 은혜로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식사하게 된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우리가 놀라운 은총을 받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그분을 문밖에 두고, 내 삶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살고 있다면 어찌된 일입니까! 언제까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그 분의 음성을 외면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미루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세상과 주님을 두고 머뭇머뭇해야 할까요? 이제는 결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삶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회개함으로 주님께로 돌이키면, 그렇게 내 삶에 주님을 초대하면,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먹으며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은 비단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일곱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 그리고 교회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이는 ‘누구든지’라는 주님의 표현이 특정 교회만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문객이 집에 찾아왔을 때 집 문을 열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집으로만 들이겠습니까? 음식을 대접하며 같이 먹고 마십니다. 이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듯 주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그동안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새겨들어야 세 가지 사실에 대한 말씀으로 정리하기 원합니다. *
1. 먼저 이 말씀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일곱교회에 각각 경고와 책망과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신 후에 주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경청해야 하고 마음에 새겨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일곱 교회에 말씀을 주시는 분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2:1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8절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8절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3: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7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14절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혼동 속에서 쉽게 낙심하거나 좌절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확신의 결핍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는 했지만 그 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 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도 그 분을 몰라보았어요. 나사렛 동네 이웃들도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다’는 주장에 오히려 분노하여 참람 죄로 돌로 쳐 죽이려고 했고, 결국 그 미움과 증오 끝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저들의 무지가 살인을 낳은 것입니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영광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 (계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 광경을 기록한 자는 한 때 제자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랑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웠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며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자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 1: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자 썩은 동아줄이 흘러내리듯이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죽은 듯이 그대로 쓰러진 것입니다.
요한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 변화되기 이전 사람 사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 영광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행 22:6)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태양빛 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빛, 주님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의 광채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각하고 있습니까? 처음 믿을 때 보다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너무나 고상하여서 이 세상 것을 분토처럼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까? 주님을 얼마나 충만하게 알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뵈었던 그 영광의 주님으로 인식하십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신자들이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각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시하게 하는 사람들일 수록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시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처럼 그 발 앞에 엎드리며 겸손하게 옷깃을 여밀고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두번째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사데 교회에 대하여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십니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십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내 사정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에게도 행위는 중요합니다. 물론 행위들로써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로 우리 죄악을 씻을 수 없고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해서 행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무는 그 열매로 알지니”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만약 행위로 그 분을 부인하다면 그 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행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은밀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주님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생각해도 그 생각조차 상세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분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어요.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그 분 앞에서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됩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됩니까?
주님을 섬기다가 실망한 분이 계시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낙심한 분이 계시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사소한 일 가운데서도 황금 낱알을 집어내시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사랑과 눈물, 헌신, 이웃을 위한 숨은 선행,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냉수 한 그릇의 보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 마 25:37-39)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 목장 식구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분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조그마한 사랑의 정성을 베푼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나니”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 않습니까?
3.셋째로 이기는 자에게 놀라운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일곱 교회들에게 각각 일곱 번씩 크고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기는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2장 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10절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 는 권세를 주리니” , 28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3장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여러분은 말씀 듣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알기에 때때로 읽습니다. 또 밤낮으로, 아니면 기회가 되는 대로 기도합니다. 매우 좋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싸움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음에 있는 갈등과 염려, 유혹과 시험, 그리고 시련과 고난에서 승리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기고, 승리하고 있나요?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는 것에서 승리하고 있습니까? 마음속의 정욕과 분노와 은밀한 욕망에는 이기고 있습니까? 마귀의 궤궤를 대적하여 물리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의 다스림을 받든지 아니면 싸워 이기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승리하지 아니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러설 수 없습니다. 영생을 취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매일 투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죄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어요. 젊었을 때 권력과 부와 쾌락이 주어졌어요.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택했어요. 이것이 승리입니다. 모세는 쾌락 사랑하는 것에서 승리했어요.
미가야 선지자는 악한 아합왕 때에 진리를 말하면 박해받을 것을 알면서도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안일을 사랑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겼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세관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공회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사울은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특권을 버리고 한 때 핍박했던 그 예수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승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고자 한다면 이전의 성도들이 행하였던 동일한 것을 우리 또한 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우리와 동일한 정욕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당한 어려움과 환란에 직면했으나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분연히 싸웠습니다. 씨름하였습니다. 분투하였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사랑하는 주님이 이전에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강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모든 싸움마다 주님만 바라보았고 그 분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기대한대로 그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어린양의 피와 저희의 증거 하는 말로 이기었으니” (계 12:11)라고 말씀하듯이 여러분 또한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지치셨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해 의심과 회의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십니까? 대장부답게 마음을 붙잡으십시오. 싸울 용기를 되찾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습니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십니다. 여러분처럼 수많은 성도들도 연약한 중에서도 동일한 싸움을 싸웠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중에서 한 사람도 완전히 패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보다 우리의 주님이 더욱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시매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두 번 넘어졌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낙심하십니까? 결코 완전히 버림받지 않습니다. 일곱번 실패했습니까? 결코 완전히 쓰러지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죄를 주의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담대하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붙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리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의 칭찬과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 John C. Ryle, <성결한 생활(Holiness)>에서 발췌
서론: 우리 자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갈급함이 내 안에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합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인일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는 영성은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에 입맛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가난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습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립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애통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에 하나님의 부요함이 부어지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있습니까?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말씀처럼 충만함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부요함에 이르고 있는가? 만족함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끄시지 아니하시면 내게로 올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만나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기에 복되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그 맛을 보았기에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습니다. 목마른 것처럼, 굶주린 것처럼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이 은혜를 다윗은 맛보았습니다. (시 63:3-5)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왜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놀라며 감격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초라하고 비참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만큼만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이 목말라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은혜도 부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미지근하여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 후 충만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한 끼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하며 사귐을 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고, 누구와 더불어 같은 꿈을 꾸며, 누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누구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내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교제하면 결국 술과 친해질 것입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 교제하면 도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자꾸 만나면 같이 운동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책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하고 교제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치는 사람입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식사 자리는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는 신분과 계급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과 종이 먹는 음식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종은 절대로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비슷한 신분의 사람끼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스스로 낮추셨고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고,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우리와 함께 교제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다윗의 은혜로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식사하게 된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우리가 놀라운 은총을 받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그분을 문밖에 두고, 내 삶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살고 있다면 어찌된 일입니까! 언제까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그 분의 음성을 외면해야 할까요! 언제까지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미루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세상과 주님을 두고 머뭇머뭇해야 할까요? 이제는 결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삶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회개함으로 주님께로 돌이키면, 그렇게 내 삶에 주님을 초대하면,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먹으며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은 비단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일곱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 그리고 교회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이는 ‘누구든지’라는 주님의 표현이 특정 교회만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문객이 집에 찾아왔을 때 집 문을 열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집으로만 들이겠습니까? 음식을 대접하며 같이 먹고 마십니다. 이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듯 주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그동안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새겨들어야 세 가지 사실에 대한 말씀으로 정리하기 원합니다. *
1. 먼저 이 말씀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일곱교회에 각각 경고와 책망과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신 후에 주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경청해야 하고 마음에 새겨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일곱 교회에 말씀을 주시는 분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2:1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8절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8절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3: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7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14절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혼동 속에서 쉽게 낙심하거나 좌절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확신의 결핍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는 했지만 그 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 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도 그 분을 몰라보았어요. 나사렛 동네 이웃들도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다’는 주장에 오히려 분노하여 참람 죄로 돌로 쳐 죽이려고 했고, 결국 그 미움과 증오 끝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저들의 무지가 살인을 낳은 것입니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영광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 (계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 광경을 기록한 자는 한 때 제자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랑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웠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며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자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 1: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자 썩은 동아줄이 흘러내리듯이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죽은 듯이 그대로 쓰러진 것입니다.
요한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 변화되기 이전 사람 사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 영광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행 22:6)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태양빛 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빛, 주님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의 광채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각하고 있습니까? 처음 믿을 때 보다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너무나 고상하여서 이 세상 것을 분토처럼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까? 주님을 얼마나 충만하게 알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뵈었던 그 영광의 주님으로 인식하십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신자들이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각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시하게 하는 사람들일 수록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시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처럼 그 발 앞에 엎드리며 겸손하게 옷깃을 여밀고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두번째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사데 교회에 대하여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십니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십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내 사정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에게도 행위는 중요합니다. 물론 행위들로써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로 우리 죄악을 씻을 수 없고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해서 행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무는 그 열매로 알지니”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만약 행위로 그 분을 부인하다면 그 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행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은밀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주님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생각해도 그 생각조차 상세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분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어요.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그 분 앞에서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됩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됩니까?
주님을 섬기다가 실망한 분이 계시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낙심한 분이 계시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사소한 일 가운데서도 황금 낱알을 집어내시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사랑과 눈물, 헌신, 이웃을 위한 숨은 선행,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냉수 한 그릇의 보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 마 25:37-39)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 목장 식구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분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조그마한 사랑의 정성을 베푼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나니”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 않습니까?
3.셋째로 이기는 자에게 놀라운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일곱 교회들에게 각각 일곱 번씩 크고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기는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2장 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10절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 는 권세를 주리니” , 28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3장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여러분은 말씀 듣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알기에 때때로 읽습니다. 또 밤낮으로, 아니면 기회가 되는 대로 기도합니다. 매우 좋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싸움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음에 있는 갈등과 염려, 유혹과 시험, 그리고 시련과 고난에서 승리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기고, 승리하고 있나요?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는 것에서 승리하고 있습니까? 마음속의 정욕과 분노와 은밀한 욕망에는 이기고 있습니까? 마귀의 궤궤를 대적하여 물리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의 다스림을 받든지 아니면 싸워 이기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승리하지 아니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러설 수 없습니다. 영생을 취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매일 투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죄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어요. 젊었을 때 권력과 부와 쾌락이 주어졌어요.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택했어요. 이것이 승리입니다. 모세는 쾌락 사랑하는 것에서 승리했어요.
미가야 선지자는 악한 아합왕 때에 진리를 말하면 박해받을 것을 알면서도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안일을 사랑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겼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세관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공회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사울은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특권을 버리고 한 때 핍박했던 그 예수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는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승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고자 한다면 이전의 성도들이 행하였던 동일한 것을 우리 또한 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우리와 동일한 정욕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당한 어려움과 환란에 직면했으나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분연히 싸웠습니다. 씨름하였습니다. 분투하였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사랑하는 주님이 이전에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강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모든 싸움마다 주님만 바라보았고 그 분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기대한대로 그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어린양의 피와 저희의 증거 하는 말로 이기었으니” (계 12:11)라고 말씀하듯이 여러분 또한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지치셨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해 의심과 회의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십니까? 대장부답게 마음을 붙잡으십시오. 싸울 용기를 되찾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습니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십니다. 여러분처럼 수많은 성도들도 연약한 중에서도 동일한 싸움을 싸웠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중에서 한 사람도 완전히 패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보다 우리의 주님이 더욱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시매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두 번 넘어졌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낙심하십니까? 결코 완전히 버림받지 않습니다. 일곱번 실패했습니까? 결코 완전히 쓰러지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죄를 주의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담대하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붙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리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의 칭찬과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 John C. Ryle, <성결한 생활(Holiness)>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