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09.15.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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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09.15.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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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39회 작성일 Sep 16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9월 15일
본문: 요한계시록 3: 14-22
제목: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비결 중 하나는 각 음식마다 거기에 상응하는 온도에 맞춰서 먹는 것입니다. 찌개와 탕 종류는 뽀글뽀글 끓을 때 가장 맛이 있습니다. 여름철 냉면은 아주 차가워야 맛 있습니다. 얼음 사르르 얼은 육수에 냉면을 먹어야 제맛입니다. 물맛의 경우에는 섭씨 13도 일 때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깊은 우물의 물이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온도가 13도에서 15도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땅 속의 물이 인간이 마시기에 딱 좋도록 신경을 쓰신 것입니다. 이 온도 이외 또 하나의 물맛의 온도가 있습니다. 70도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세븐 일레븐 커피 잔 하나 만드는 데도 기가 막히게 과학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커피 잔에 펄펄 꿇는 커피를 붓고, 설탕 한 스푼을 넣고, 밀크를 한 두 방울 떨어뜨린 후 휘저으면 바로 64도가 된다고 합니다. 세븐 일레븐 커피는 아니지만 우리 조상들은 그 온도에서 기가 막히게 맛이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식후에 즐겨서 마시던 숭늉의 온도가 바로 그 온도입니다.

그런데 물이 가장 맛이 없는 온도가 있습니다. 바로 35도에서 40도 사이입니다. 즉 우리의 체온(36.5도)을 중심으로 하는 온도일 때 가장 맛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적절한 온도가 있을 것같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한 번 자신의 신앙 온도를 1에서 10점 사이에서 두고 재 보세요. 아주 뜨끈 뜨끈한 상태라면 10점 만점을 주고, 아주 식어서 차가워진 상태라면 1점을 준다면 지금 나의 신앙 상태는 몇 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뜨거워서 10점 만점을 줄 만합니까? 그렇게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9점입니까? 8점, 7점, 아마 어떤 분들은 겸손하게 5-6점 정도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5-6점은 중간 상태를 말하는데, 중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중간이나 중간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이 미지근한 상태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때로는 아주 날카롭게 찌르고 자르는 말씀이어서 우리가 받아드리기 마음이 아프고 힘들지만 그것이 우리 생명을 살리기에 오늘 우리는 기꺼이 그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보내신 서신 일곱 번 째 마지막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이 교회는 한 마디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아주 교만한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소아시아 브리기아 지방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동서와 남북이 교차되는 교통 요충지입니다. 에게해 항구 에베소로 부터 동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주요 도시들과 연결되어 남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 이 두 무역로가 만나는 지점에 라오디게아 도시가 있었습니다. 교통 요충지이기에 자연히 금융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방에서 양털을 많이 생산하기 때문에 양털로 여러 가지 좋은 옷들을 많이 생산하는, 그래서 의류산업이 활발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또한 안약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특별히 이 지역에는 프리기안이라는 가루가 있는데 그 가루는 눈에 넣으면 안질에 걸린 사람들도, 눈에 백태가 끼였을 때도 금방 낫는 신기한 약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 영양 결핍인지 몰라도 몸과 머리에 부스럼이 많이 났는데 그 때 아주 효험이 있는 약이 있었습니다. 이명래 고약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도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런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위 유행을 타는 교회입니다. 세상과 영합하는 물질중심주의입니다. 부요하다 보니 영적인 갈급함이 없어서 신앙이 뜨뜻미지근합니다.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무사태평의 안일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가장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는 부요했지만 물이 부족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는데 북쪽으로 7~8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 온천’에서 뜨거운 온천물을 끌어왔고, 남동쪽으로 18km 떨어진,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골로새 계곡물’을 끌어다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온천에서 나온 뜨거운 물과 산 위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이 수로를 따라 운송되어서 라오디게아 도착할 때쯤이면 미지근한 상태가 됩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것이지요.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 신앙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에 대해서 모른다고, 믿음이 없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이해하며 기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삶과 행위에서는 전혀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건강한 신앙, 이상적인 믿음생활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뜨거워야 할 때는 화끈하게 뜨겁고, 차가워야 할 때는 얼음처럼 차가워야 합니다. 우리가 커피 마실 때 어떻습니까? 뜨거우려면 화끈하게 뜨겁고, 냉커피는 아예 얼음처럼 차가워야 맛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해야 합니다. 언제 뜨거워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는 정말 100도가 돼서 펄펄 끓을 정도로 뜨거워야 합니다. 한 목원식구를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얼음처럼 냉정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외쳐야 합니다. 사단이 다가와서 “이건 꿀이야, 한번만 먹어 봐. 네 인생이 살 맛 날거야” 이렇게 속삭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 돼. 그건 독이야. 마시면 죽는 거야”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용광로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죄에 대해서는 얼음처럼 차갑게 미워하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동산을 선물로 하락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미지근하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 까지 뜨겁게 정말 생명을 내어놓고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 11:8절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여 불붙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여기서 ‘아드마’와‘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도시를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 상태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아드마와 소보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무서운 성적인 타락과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착취와 학대와 폭력이 가득했습니다. 그들 또한 소돔과 고모라와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생각하면 그들은 유황불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이 돌고 돕니다.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처럼 멸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붙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엄청난 갈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마치 불 속에서 뭔가 하나라도 건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부패한 본질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우리의 죄짓는 본성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드마와 스보임같은 진노로 하시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부담으로 돌리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우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퍼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과 정죄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죄의 형벌로 부터 자유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불붙는 듯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분노하실 때는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십시오. 인생들이 범죄하여서 육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코로 기식하는 모든 생물을 그 지면에서 싹 쓸어 버리셨습니다(창 6:17). 민수기 25장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청년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우상잔치에 참석했을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염병이 발하게 하사 순식간에 24,000명이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서는 이처럼 철저하게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미움을 동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 것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의 정도만큼 죄를 미워해야 정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처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불같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미워하신 하나님을 본받아서 죄의 유혹에 대해서는 차갑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어떠했습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죄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하는 사람을 좋아 합니다. 융통성이 있고, 모난 데가 없어서 참 좋다고 말합니다. 가자는 대로 다 따라가고, 적당히 분위기 맞춰서 하자는 대로 다 하고…그러니까 좋아하죠.

그런데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미워하십니다. 만약 돌이키지 아니하면 토해 내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엄중한 표현입니까? 사무엘서에 보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의 위험성에 경고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기에 당연히 믿음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어중간하였습니다. 한나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영적 분별이 없어서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두 아들들이 성전의 제물을 훔쳐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종들과 음란죄를 짓는데도 전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뭉둥이로 한바탕 매타작을 한 후 회개를 시켰을 텐데, “얘들아, 그리 말라 백성들의 여론이 좋지 않구나” 그렇게 하고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역겨웠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토해 내셨습니다. 두 아들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당일에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자신도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손주를 낳던 며느리도 죽고 말았습니다. 온 집안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적당주의 신앙.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2. 주님의 판단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처럼 미지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을 봅시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그들은 영적인 포만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잘 살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고, 신앙생활도 어느 정도 하고 있으니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런 영적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여서 배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힘들게 개척하며 도전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교회와 목원식구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굉장히 곤고하고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2) 눈이 멀었습니다. 안약으로 유명한 지역이어서 육적인 눈은 밝았지만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눈이 없었습니다.

3) 그리고 벌거벗은 수치를 안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의의 옷이 없었습니다.

3. 주님의 처방전

라오디게아는 자기만족과 착각에 빠진 무지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정금을 말합니다. 정금처럼 순결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2)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진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의의 옷입니다. 의의 세마포 옷을 입었으면 깨끗이 간직해야 합니다.

3)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신령한 세계를 보고 믿으며 영적 분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처방전을 내리셨으니, 환자는 그 처방전을 따라야 합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습니다. 책망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책망과 징계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처방전을 따르는 것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바른길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처방전을 받고도 열심을 내어 따르지 않는다면 영적 병든 상태를 고칠 수 없습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헌신하기 원하십니다. 매사 적당주의를 회개하고 절대적 신앙과 믿음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화끈하게 쏟아 붓고, 죄악된 것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자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열정으로 섬기고,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자신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야만 하겠습니다. 로마서 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게으름과 안일이 모든 문제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열심을 품고 헌신하는 자는 죄 지을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죄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의 불길이 타올라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열정과 열심이 다시 살아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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