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09.01.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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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09.01.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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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7회 작성일 Sep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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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9월 1일
본문: 요한계시록 3: 7-13
제목: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세상 사람들은 힘을 숭상합니다. 세상이 힘에 의해서 질서가 이루어지고 유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세상의 상호관계를 면밀히 관찰해 보십시오. 힘의 공백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더 힘을 가지고 주도하기 마련이고, 힘이 없는 자는 이 질서를 수용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힘의 균형이 깨지면 다툼과 갈등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치의 힘, 경제의 힘, 군사력의 힘이든지 그것으로 자신의 힘을 삼아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몫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도 이런 힘의 논리에 빠진 적이 아주 많습니다. 중세 십자군 전쟁 뿐만 아니라 19세기,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도 교회가 정권과 결탁해서 힘으로 식민지를 기독교화 시키려고 했던 사례가 그렇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용해서 식민지를 정치적 경제적 뿐만 아니라 종교적 정신적 세계까지 완전히 지배하여 통치하려 했고, 기독교는 이런 제국주의의 정치와 군사의 힘을 등에 업고 쉽게 선교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서로 전략적 제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3세계에서는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가고 불신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그 뒤를 이어 총과 대포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힘을 숭배한 경우의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힘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힘의 논리에 말려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프로그램과 조직과 체계가 잘 돌아가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힘이 있어서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이로니한 점은 교회가 힘을 많이 가질 수록 교회는 더 부패하여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에 대한 국가적 탄압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입니다. 그가 내린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 받았습니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크리스천이 되자 수많은 고관들과 부자들이 물밀듯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부요해지고, 세상 권력마저 가졌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점점 더 타락하였고 부패해졌습니다.

한국을 보십시오. 초기에는 소수의 크리스천들이었지만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평양에서는 예수 믿지 않으면 상거래에서도 신용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치 문화 예술 학문, 사회의 모든 면에서 기독교가 주도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1919년 3.1 운동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중에 개신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민족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민족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기독교는 서양 종교가 아닌 민족 종교처럼 받아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선교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고, 교회들도 부유해져서 큰 교회당을 건축했습니다. 각 교단마다 가장 큰 교회들이 서울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기독교가 예전에 아주 열악했던 초기 기독교 때보다 사회에 더 선한 영향력이 끼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 한숨 쉬면서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인들의 숫자, 헌금액수, 교회 프로그램과 조직 등등에 사람들은 압도 되고, 부러워하며 자랑합니다. 물론 교회가 부흥하면 이런 것들은 자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기에 그 자체가 문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역의 경우에는 사람도 돈도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사람과 물질의 힘을 더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대신에 프로그램과 조직을 앞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려면 아주 능력이 많은 교회, 교인 숫자도 많고, 재정 능력도 많고, 좋은 체계와 조직, 그리고 프로그램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지목하여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바로의 학정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속히 능력의 구원자를 보내어 그들을 해방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레위 지파 한 부부에게 모세가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없이 칭찬만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시련과 핍박 중에서도 적은 능력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인내하여서 주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본받을 점이 무엇인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난 주에 살펴 보았던 사데 교회로 부터 동남쪽으로(튀르기예 내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Φιλαδέλφεια)는 ‘사랑’을 의미하는 헬라어 ‘필로스(φίλος)’와 ‘형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델포스(ἀδελφός)’의 합성어로 ‘형제애(형제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닌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B.C 2세기경 유메네스 2세와 그의 동생 아타루스 필라델부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형제 사랑’이라는 빌라델비아의 이름의 유래는 도시를 세운 두 형제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땅이 비옥하여 포도 농사가 잘 되었으며 ‘술의 신’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 숭배가 이뤄졌습니다.

A.D 17년에 빌라델비아를 강타한 큰 지진으로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안전을 염려한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면서 빌라델비아의 경제는 곤두박질 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려는 모습을 칭찬하시며 끝까지 인내하여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주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편지를 전하실 때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편지의 발신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4:6).

거룩하시고 진리이신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다윗의 열쇠’는 이사야 말씀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으로써 국고를 맡은 궁내대신 셉나 대신 엘리아김(여호야김)이 그 직위에 오를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구약에서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윗의 집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의미가 완성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집의 열쇠’를 온전히 성취하신 만왕의 왕으로써 온 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하늘 보좌의 주인이십니다. 이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 통치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여시면 그 누구도 닫을 수 없고, 주님께서 닫으시면 그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우리를 둘러싼, 닫혀 있는 모든 문제들을 열게 해줄 만능 열쇠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은 우리가 열고자 하는 문을 열어 주시는 수호신 정도가 아니라, 땅과 하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을 수단 삼아 우리가 열고자 하는 문을 열려고 하는 태도는 주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상황에 주인 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굳게 닫힌 문 앞에서는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크신 주님의 뜻이 있음을 신뢰하고, 우리 앞에 열어주시는 문을 향해서는 감사와 찬양의 태도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2.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한 칭찬

주님은 빌라델피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A.D 17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지진이 빌라델비아를 강타하였습니다. 도시가 훼파되었고 시민들은 계속되는 여진에 불안감을 느끼고, 하나 둘 도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시는 급격히 공동화 현상을 겪게 되었고, 이는 경제적 위기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라델비아 교회 또한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작은’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원형은 ‘미크로스(μικρός)’로 이 단어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 단어 ‘마이크로(micro)’가 나왔습니다. 헬라어의 원뜻은 ‘크기가 작은’, ‘의미가 적은’의 뜻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으며 사회적 영향력 또한 작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럼에도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께 책망받지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칭찬의 이유가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나 재정적인 안정성, 사회적 영향력을 근거로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이유는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작고 미약한 교회였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생각과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사람입니다. 출신 배경도 성골 중에 성골인 유대 바리새파 출신입니다. 학문에서도 출중했습니다.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십도 탁월했고, 일을 추진해 가는 열정도 뛰어났어요. 그가 회심한 후에는 그 다음날 부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적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세계선교여행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그가 썼습니다.

여기에 더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적 체험에 대해 말합니다. 셋째 하늘까지 끌려 올라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정도 배경과 경력과 체험을 가진 자라면 기독교계의 황태자라고 부를 만하지 않습니까? 이런 후광으로 인해 더욱 그의 사역은 넓어져 가고, 복음이 수월하게 전파되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
이 열렬히 그를 환영하고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가시’는 헬라어로 ‘스콜롭스’라는 단어인데 ‘말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손가락에 조그마한 가시만 박혀도 온 몸의 신경은 그곳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뚝’이라고 표현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프겠습니까? 이를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늘 그를 괴롭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고침을 위해서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병을 고쳐 주셔야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더욱 크게 돌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소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지금 주님이 무얼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너는 내 은혜 가운데서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역경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 너는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하나님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마치 너의 지혜와 경험, 너의 헌신과 열정과 열심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야, 네게 필요한 것은 나의 은혜다. 나의 은혜 없이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히 나를 더욱 더 의지하게 되지 않니. 그게 네 사역의 비밀이야.’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에 가시가 있기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이 약점이 있기에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붙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의 성공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결을 깨달은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무슨 말입니까? ‘나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겠노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크게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을 그대로 적용해서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 액수가 증가하는 것, 그리고 교회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으로 주님께 칭찬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기준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간증에도 동일한 패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미약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적인 기준에서도) 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세상적인 능력을 칭찬하시지 않으시고,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생활한 것을 칭찬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창성하게 되어 큰 일을 해서 칭찬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적은 능력으로 끝까지 인내하여 말씀을 지킨 것으로 칭찬하셨습니다.

3.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전 서머나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정체를 밝히셨는데 빌라델피아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어려움을 가중 시켰던 사람들은 바로 회당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교회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모임을 “사단의 회당”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지칭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에게 핍박과 모함을 받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그들 중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하겠다고 하십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던 자들 중 몇을 교회에게 주어 교회 앞에 와서 절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발 앞에 절한다’는 것은 완전한 항복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절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엎드리게 하심으로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증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비록 빌라델비아 교회는 온전하지 못하고 능력이 작은 교회이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인정하시는 교회입니다. 아끼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당부하십니다. (10-11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시험의 때’란 단순히 세상적인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일어나는 환난의 기간입니다. 시험의 때에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시험의 때가 오기 전에는 능력이 적었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험의 때에는 자칭 유대인이라 칭하는 자들을 포함해서, 세상적인 능력을 자기의 신으로 삼았던 모든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세상 권세도 높은 것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빌라데비아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주님께서 그날에 삶을 역전시켜 주실 것을 믿고서, 모든 고난과 잠깐의 환난을 인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약속하시며 마지막 까지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이미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면류관은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한 승리자의 면류관이자, 곧 빛을 바래는 세상의 면류관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아무도 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때문에 그 축복을 빼앗기지 않도록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장자 에서는 잠시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구하였지만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히 12:16-17).

4. 주님의 약속

주님께서는 작은 능력으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12-13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전의 기둥으로 삼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거기에 새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의미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터 위에 세워진 주님의 공동체 교회인 것과 주님의 소유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씨나 이광수 씨는 처음에는 민족의 지조를 지키며 계몽운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통치가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만주를 집어 삼키고,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보이는 일제 말기에 그만 변절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일본군국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일제의 통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군국주의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해방은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되자 그들은 친일파로 몰려 영영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감옥에서 해외에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은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영광의 때가 옵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입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적은 능력이지만 우리도 타협하지 말고 인내의 말씀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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