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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 (08.25.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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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88회 작성일 Aug 26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8월 25일
본문: 요한계시록 3: 1-6
제목: 살았으나 죽은 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제가 이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 까지 어언 3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처음부터 아주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해 온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점점 더 장성한 믿음을 보이고 제직이 된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지금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서 이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는 의아해 할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으면 구원 받아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믿다가 안 믿은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란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었고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이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에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두 가지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져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으로 어떤 열매가 맺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고난을 겪으시고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요15:8-10)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날”(22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22)”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신의 신앙행위로 증명하려고 하고, 이로써 주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즉 오늘날로 말하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눈 앞에서 누군가가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진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배에 참석을 하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목사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성경공부를 했고, 교회에 봉사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23절)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실상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 증거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빙자하여 자기 사욕과 정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죄의 욕구에 따라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의 결말은 “내게서 떠나가라”(23절), 주님으로 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뜻합니다. (계 20:13-15)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마 13:41,4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줄로 알았는데 죽고 난 후에 지옥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 신앙이 가짜이었고, 본인의 착각인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이처럼 망해버린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데 교회가 바로 그런 종류의 교회입니다. 명성이 자자하여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의 경우처럼 분량이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의 분량이 적은 이유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을 받았는데, 사데 교회는 칭찬 없이 책망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머나 교회가 심한 고난으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부요했고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사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생명이 없는 죽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교회들 또한 단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이 가진 좋은 장점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서는 어떤 칭찬거리를 찾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판결은 무서울 정도로 간결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1. 실상은 죽은 교회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약5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주전 1,200년 정도에 세워졌고,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특별히 사데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는데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남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을 떨쳤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이었습니다.

또한 사데 가까이 있는 팍톨루스 강에는 많은 사금을 캘 수 있었는데, 그렇게 생산한 금으로 사데는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최초로 금화가 개발된 곳으로 전해지며 금화를 보급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고학자가 폐허가 된 사데의 터에서 금을 제련하는 수백 개의 도가니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사데가 언덕 위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은 군사적으로 큰 이점이 있었지만 도시가 성장할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언덕 아래에 새로운 도시가 생겼고, 사데는 점점 그 명성을 잃어가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때 이름을 떨쳤지만 과거의 일이 되었고, 지난 추억이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도 이러한 도시의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사데 교회도 도시처럼 쇠퇴의 길로 점점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으로 부터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1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사람들의 평가, 평판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다르게 평가하십니다. ‘세상은 너를 살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를 죽었다고 말한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행위를 아십니다. 사데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지, 얼마나 풍성한 물질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삶을 아시고, 그들의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그러면 사데 교회의 행위가 어떠했기에 이런 책망을 받은 것일까요? 무엇이 생명을 잃은 교회가 되게 했을까요? 본문에서는 사데 교회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2절과 4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 3:2)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가득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온전하지 못한 것은 비어 있는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사데 교회는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텅텅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실속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상한 심령이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갈급함이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고 높이지만 마음은 주님으로 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는 달리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며 회피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여 그 당시 풍습대로 신전에 올라가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하고, 음행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계 3:4)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온갖 죄의 오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더럽혀졌습니다. 일단 죄를 범하게 되면 이성과 양심이 마비가 됩니다. 선악을 구별하는 분별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마음이 강팍하여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반복하여 짓게 되고,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 영이 완전히 죽어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식은 있지만 그 내용과 헌신에 있어서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갈망도, 성장에 대한 몸부림도 없는 사데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사냥을 즐기는 사람의 집에 가보면 벽에 박제된 사슴이나 곰의 머리를 걸어 놓은 봅니다. 얼핏 보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유럽의 교회를 가보면 100년, 200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거에 얼마나 흥왕하였는지 웅장한 건물을 보면 알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주일 아침이 되면 각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서 모든 시민들이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림니다. 너도 나도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오지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할 뿐이지 더 이상 영적 힘도, 선교 열정도,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데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몸부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연어시즌 봄철에 강가로 나가 보십시오. 살아있는 연어는 어떠합니까?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열심히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갑니다. 작은 폭포의 장애가 있으면 물 위로 솟구쳐 뛰어 올라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력을 느낍니다. 반면에 죽은 고기는 어떻습니까? 하늘을 향해 배를 뒤집고 물살에 둥둥 떠내려갑니다. 물결 치는 대로 떠내려 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살아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할 것을 기대하는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까? 찬양과 기도에 내 마음을 쏟아 붓습니까? 말씀에 경청하며 순복하십니까? 허물과 죄가 있을 때에는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며 돌이킵니까? 세상의 유혹과 죄악에 대해 저항하며 거절하십니까? 살아 있는 영혼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현하게 됩니다. 

2. 주님의 경고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허물과 죄 가운데 어둠의 세력에 붙잡혔던 너희를 어떻게 은혜를 입혀 주셔서 살리셨는지, 그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 은혜를 간직하여 지키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깨어’라고 명령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추운 날씨로 체온이 저하되어 신체 장기들의 기능에 심각한 악영향을 받는 것을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 저체온증의 증세 중 하나가 졸음인데 여기서 잠들면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서 잠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잠들어 버리면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과거 역사에서 사데 성이 딱 두 번 무너졌다고 합니다. 왜 무너졌느냐? 잠자다가 무너졌습니다. 사데 성은 절벽 위에 세워진 성이기에 아무리 공격을 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지형입니다. 또 그 성 안에는 음식과 물이 충분했기 때문에 대적들이 공격하다가 스스로 지쳐서 후퇴합니다.

한 번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군대가 이 성을 공격을 하는데 성문을 꽁꽁 잠그고 나오질 않으니까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페르시아 병사가 지켜 보는데 저 성 높은 곳에서 군인이 졸다가 투구를 떨어뜨렸습니다. 투구가 아래에 떨어져 떼굴떼굴 굴러서 저만치 있는데, 조금 후에 어느 한 구석에서 슬금슬금 한 군인이 나오더니 투구를 집어들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절벽 한 쪽 옆에 조그마한 틈이 있는데, 그 틈 사이로 나와서 투구를 집어간 거예요.

그래서 몸집이 작은 특공대들을 조직해서 그 옆길로 통과해서 올라갔는데, 올라가 보니 문을 꽁꽁 잠그고 다 깊은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들을 쳐서 물리치고, 성문을 활짝 열어서 페르시아 대군이 들어오도록 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깨어서 제대로 파수하고 있었더라면 조그만 틈새로 올라오는 적군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해서 물리치면 되는데 모두 잠자고 있었으니까 무너진 것입니다.

그 후 몇 백 년이 지나고, 알랙산더 대왕이 또 쳐들어왔습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라”고 지시했더니 과거 역사 기록에서 어디 절벽 옆에 조그마한 샛길이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특공대를 만들어 올려 보내어 가보니까 또 잠을 자고 있어요. 그래서 사데 성이 두 번 망한 기록이 있는데 두 번 다 자고 있어서 망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면 마귀의 공격 받아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절)고 경고하신 후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17절)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영적 안일함과 편안함에 나른하여 깊은 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스스로 흔들어 깨우시기 바랍니다. 서로 흔들어 깨우시기 바랍니다. 

3. 흰 옷 입은 자들

비록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이었지만 그 중에는 깨어 있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입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거룩한 행실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영광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이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5절을 함께 읽습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입혀 줄 것이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게 하고,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그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 이 사람 좀 보세요, 천사들아 이 사람 좀 봐봐. 이 사람이 바로 세상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야!”하고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 서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 등불, 즉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보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종들을 가리키는데 주님이 자기 종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의 상태를 잘 아십니다. 일곱 등불로써 우리를 살피십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상태는 어떤지요? 하나님의 뜻에 온전합니까?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고 있습니까? 솔직히 그렇지 못한다면, ‘일깨워 굳게 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과거에 화려한 명성은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 생명과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또 미래를 보장하는 보증수표도 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내 영혼은 어떻습니까? 거룩하고 의롭습니까? 아니면 더럽고 누추합니까? 비록 지금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성 있게 회개하며 돌이키기를 원합니까?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열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습니까? 숯불이 점차 가열되어 뜨거워지는 것처럼 이전 보다 지금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이 더 뜨거워져 갑니까?

이 시간 스스로 성찰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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