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08.18.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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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9회 작성일 Aug 19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8월 18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8-29
제목: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2차 세계 선교 여행 중에 사도 바울이 드로아 항구 도시에서 밤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그에게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환상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바울의 일행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유럽의 첫 번째 도성 빌립보에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성밖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때 소아시아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복음을 영접하여 그녀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아디라 교회는 루디아가 자기 고향에 돌아가 아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개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까지 판매망을 두면서 루디아가 장사한 것을 보면, 두아디라 성의 염색 기술이 아주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자주색을 내는 원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소라나 조개에서 원료를 채취하는 방법입니다. 반면에 바다가 없는 두아디라에서는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원료를 채취해서 자주색 옷감을 생산했습니다. 이 나무 뿌리를 물 속에 오래 담가두면 자주색 물이 우러나는데, 그 물에 실이나 천을 넣어 물감을 들였습니다. 이렇게 얻은 자주색 옷감은 고가에 팔렸습니다. 한 번 물든 자주색은 퇴색이 잘 안 되고, 당연히 가격이 비싸기에, 고대 세계에서 자주색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였습니다.
1.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핍박 때 보다는 모든 일이 평온할 때 더 신앙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환란을 잘 이겨냈던 버가모 교회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세상과 타협하여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분명하게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어느 길이 거짓된 길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그랬습니다. 무서운 탐욕과 정욕에 이끌려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런 버가모 교회 앞에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는데,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 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예리한 양날 칼과 같아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주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명하게 분별해 냅니다. 말씀의 검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들어오면 예리하게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을 분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혼재해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예리하게 분별해 잘라 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뼈 속에서 어느 부분이 관절이고, 어느 부분이 골수인지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의사도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이 심판주이신 분으로 더 돋보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이신 이미지는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모습입니다.
1) “그 눈이 타는 불꽃 같고” 두아디라 교회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불꽃과 같은 눈으로 그 심령 골수까지 통찰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불꽃과 같은 눈’이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됩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2)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엄중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두아디라는 주석을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한데, 마치 잘 제련하여 빛이 나는 주석 같은 발로 한 번 밟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살과 뼈가 으스러질 것이고, 납작 뭉개질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두아디라 성은 제우스를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 아폴로를 가장 많이 숭배하였는데 자기들에게 물질과 풍요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천지 만물의 주재자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앞에 심판주의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신 이유는 지금 두아디라 교회의 형편이 버가모 교회 보다 훨씬 더 절망적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예리한 검으로 자르고 책망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아무런 말씀 없이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2.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칭찬
그런데 우리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책망하기 앞서 칭찬을 하십니다. 책망으로 인해 아주 절망하여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업’이라 번역한 ‘에르가 (ἔργα)’는 ‘일’, ‘행위’를 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은 그들의 행위들, 곧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인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더 나은 모습에 대해 칭찬하십니다.
1)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의 행위를 칭찬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신앙 사수를 위해 법과 규율을 지키다가 잃어버린 사랑을 두아디라 교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마 24:12).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이전보다 더 많으므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2)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은 충성(πιστός 피스토스)과 같은 어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고(마 14:31), 로마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은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15:28).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이 부요했었습니다.
3) 봉사(διακονία디아코니아)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봉사, 디아코니아의 어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집사)는 디아(διά 통하여)+코니오르토스(κονιορτός 먼지)의 합성어로 ‘먼지 속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남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자리를 마다 하지 않고, 낮은 곳에 내려가 섬기며 빛을 발하는 교회였습니다.
4) 인내(ὑπομονή 휘포모네)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인내, 휘포모네는 휘포(ὑπό 아래)+메노(μένω 거하다)의 합성동사입니다. 군사 용어로 ‘적의 습격을 받고 숨어서 견디어 낸다’는 뜻입니다. 또한 전쟁 때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의 신분을 말하기도 합니다. 인내를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오래 참음(μακρθυμία 마크로뒤미아)’입니다. 전자 휘포모네는 교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인내를 말하는 반면, 후자 마크로뒤미아는 사람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우리 신앙생활 중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핍박이나 환란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할 때나 침체에 빠질 때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오래참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섬김과 인내에 있어서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에 있어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섬김과 인내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와는 다르게 두아디라는 오히려 사랑이 더 넘쳐가는 교회입니다. 그 믿음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섬김 받기 원하기보다 섬김의 기쁨을 알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래참고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정도면 100점짜리 교회가 아닐까요?
3. 루아디라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이런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것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죄악에 대해 알려면 두아디라 성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자주색 옷감을 염색하는 일 외에도 주석(구리)으로 로마 군인들의 철모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했고, 면직, 모직,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도 발달하였습니다. 각 업종들은 동종 조합원들로 구성된, 아주 결속력이 강한 조직, Guild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조직들은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려면 누구든 필수적으로 이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데,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 조직들 중 가장 단결력이 강한 조합은 섬유 조합으로, 유대인들이 대부분 이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서 성행하였던 각 조합(Guild)은 트림나스 신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도시를 수호하는 트림나스(Trymnas) 신은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되어 숭배되었습니다. 조합원들은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 조직으로써 곗돈의 일부를 신전에 바쳤고, 곗날이 되면 신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제사 분위기가 고조되면, 마무리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이 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트림나스 신전에 가서 우상 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두아디라 교회 성도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먹고 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 살기가 힘들고….
마치 예전에 한국에서 제사 문제와 주일 성수, 그리고 음주 문제 등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오늘날에도 꽤 많은 분들이 이와 유사한 사회생활에서 갈등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됩니다. “무슨 뾰쪽한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할 수 있는 좋은 비법이 없을까?” 이런 방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주의 종들, 즉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였다고 하였습니다(20절).
우리 장로교회에서 당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해서 물리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분별하여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게 옷을 하얀색으로 길게 늘여 입고 신령하게 보이도록 단장합니다. 표정도 신령하게 하고, 말도 신령하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남쪽으로 가서 땅을 사” “올해는 몸 조심해야겠네”(반면에 성령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등등).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신주단지 모시듯 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라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신통방통하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고, 그래서 또 하나의 교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결국 자기 말만 듣도록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을 추종하게 되면 그 후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지도해 줄 목사의 권면도 듣지 않습니다. 성경도 보지 않습니다. 말씀 붙들고 씨름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착실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얕봅니다.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선지자를 찾아가 기도 부탁합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게 마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그 여자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지각을 연단 받아 스스로 영적으로 분별하고,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그런데 간혹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코치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를 아예 맡겨 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다 판단해 주고, 선택해 주는 거죠. 이런 자들이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들의 먹이감이 됩니다. 추종하다가 나중에는 비윤리적인 일도 서슴치 않게 저지르게 됩니다. 이단들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가리켜서 ‘이세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이름이지요. 시돈 왕이자 제사장의 엣바알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이 되어서 온 나라를 바알 우상천지로 만들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이자 전도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바알 선지자들을 집중 육성하였습니다.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그를 돌로 쳐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까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죽는 순간에도 거울보고 화장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던 자 예후를 유혹하고자 했던 아주 사악한 여인입니다. 결국 그녀는 창문 너머로 내던져져서 온 몸이 터져서 죽었습니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려고 가보니 이미 개들이 산산조각이 난 그 시신을 물어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왜 이 여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24절에 보면 “사단의 깊은 것”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소위 하나님께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 여자가 뭔가 깊고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거기에 솔깃하여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잖습니까? 어디에 가면 깊고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아주 신령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머리를 내밉니다. 결국 귀신에 지펴서 아주 비참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거기에 넘어갑니까? 평소에 착실히 말씀과 기도생활에 착념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허영심이 있어서 단숨에 어떤 영적 수준에 도달하여서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강하거나, 어떤 비법이나 방법을 통해서 단 번에 어떤 신령한 체험을 하려는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100 퍼센트 속아 넘어갑니다. 성경적 진리, 복음의 뿌리가 약한 사람, 회개하는 생활을 잘 하지 않아서 심령이 막히고 기쁨이 없는 사람, 봉사가 부담스럽고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 주로 이런 사람들이 이세벨의 교훈에 넘어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탐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큰 환난에 처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각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먼저 사건을 통해서 경고를 주십니다. 여러번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심령이 완악해서 회개치 않는 자들은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질그릇을 밟아 부스러뜨리듯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숨은 죄를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4.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리고 우리가 힘써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제는 의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확실한 진리, 참된 진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이미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하게 여기며 주님 오실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셔서 나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이요, 영생의 복음인데 뭐가 부족해서 우리가 한 눈 팔겠습니까?
요즘 십자가 없는 축복, 고난과 헌신이 없는 영광을 가르치는 가르침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축복, 영광, 형통함을 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동시에게 고난과 환란, 참회와 회개의 눈물, 경건과 훈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진리이고, 반쪽 진리는 거짓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빌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자신이 정말 능력 있고 살아있게 하는 교훈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교훈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다른 성도들도 그 진리를 붙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삼 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로운 체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14년 동안 아무에게도 자신의 체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하게 평가할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것만을 목 놓아 외쳤습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 주님도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우리가 목숨 걸고 붙들어야 할 참된 진리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8절 ‘새벽 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별’은 ‘메시야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좀 고생하고 땀 흘리며 수고할지라도 복음진리를 수호하고 굳게 붙들 때에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축복을 입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예레미야 시대의 선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8:11) 라며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임박했다, 회개하라, 회개치 아니하면 필경 멸망할 것이라고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이를 전하다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옥에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다가 결국 모두 함께 멸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시대를 가리켜 이렇게 경고합니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지금 이 시대가 바로 바울이 경계한 “그 때”가 아닌지, 우리는 위기의식과 아울러 경각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에 가만히 들어온 현대판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서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교훈, 사단의 교훈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참된 영광과 영원한 승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날짜: 2024년 8월 18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8-29
제목: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2차 세계 선교 여행 중에 사도 바울이 드로아 항구 도시에서 밤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그에게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환상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바울의 일행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유럽의 첫 번째 도성 빌립보에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성밖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때 소아시아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복음을 영접하여 그녀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아디라 교회는 루디아가 자기 고향에 돌아가 아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개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까지 판매망을 두면서 루디아가 장사한 것을 보면, 두아디라 성의 염색 기술이 아주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자주색을 내는 원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소라나 조개에서 원료를 채취하는 방법입니다. 반면에 바다가 없는 두아디라에서는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원료를 채취해서 자주색 옷감을 생산했습니다. 이 나무 뿌리를 물 속에 오래 담가두면 자주색 물이 우러나는데, 그 물에 실이나 천을 넣어 물감을 들였습니다. 이렇게 얻은 자주색 옷감은 고가에 팔렸습니다. 한 번 물든 자주색은 퇴색이 잘 안 되고, 당연히 가격이 비싸기에, 고대 세계에서 자주색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였습니다.
1.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핍박 때 보다는 모든 일이 평온할 때 더 신앙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환란을 잘 이겨냈던 버가모 교회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세상과 타협하여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분명하게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어느 길이 거짓된 길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그랬습니다. 무서운 탐욕과 정욕에 이끌려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런 버가모 교회 앞에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는데,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 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예리한 양날 칼과 같아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주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명하게 분별해 냅니다. 말씀의 검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들어오면 예리하게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을 분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혼재해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예리하게 분별해 잘라 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뼈 속에서 어느 부분이 관절이고, 어느 부분이 골수인지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의사도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이 심판주이신 분으로 더 돋보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이신 이미지는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모습입니다.
1) “그 눈이 타는 불꽃 같고” 두아디라 교회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불꽃과 같은 눈으로 그 심령 골수까지 통찰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불꽃과 같은 눈’이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됩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2)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엄중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두아디라는 주석을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한데, 마치 잘 제련하여 빛이 나는 주석 같은 발로 한 번 밟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살과 뼈가 으스러질 것이고, 납작 뭉개질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두아디라 성은 제우스를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 아폴로를 가장 많이 숭배하였는데 자기들에게 물질과 풍요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천지 만물의 주재자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앞에 심판주의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신 이유는 지금 두아디라 교회의 형편이 버가모 교회 보다 훨씬 더 절망적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예리한 검으로 자르고 책망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아무런 말씀 없이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2.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칭찬
그런데 우리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책망하기 앞서 칭찬을 하십니다. 책망으로 인해 아주 절망하여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업’이라 번역한 ‘에르가 (ἔργα)’는 ‘일’, ‘행위’를 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은 그들의 행위들, 곧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인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더 나은 모습에 대해 칭찬하십니다.
1)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의 행위를 칭찬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신앙 사수를 위해 법과 규율을 지키다가 잃어버린 사랑을 두아디라 교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마 24:12).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이전보다 더 많으므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2)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은 충성(πιστός 피스토스)과 같은 어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고(마 14:31), 로마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은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15:28).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이 부요했었습니다.
3) 봉사(διακονία디아코니아)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봉사, 디아코니아의 어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집사)는 디아(διά 통하여)+코니오르토스(κονιορτός 먼지)의 합성어로 ‘먼지 속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남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자리를 마다 하지 않고, 낮은 곳에 내려가 섬기며 빛을 발하는 교회였습니다.
4) 인내(ὑπομονή 휘포모네)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인내, 휘포모네는 휘포(ὑπό 아래)+메노(μένω 거하다)의 합성동사입니다. 군사 용어로 ‘적의 습격을 받고 숨어서 견디어 낸다’는 뜻입니다. 또한 전쟁 때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의 신분을 말하기도 합니다. 인내를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오래 참음(μακρθυμία 마크로뒤미아)’입니다. 전자 휘포모네는 교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인내를 말하는 반면, 후자 마크로뒤미아는 사람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우리 신앙생활 중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핍박이나 환란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할 때나 침체에 빠질 때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오래참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섬김과 인내에 있어서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에 있어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섬김과 인내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와는 다르게 두아디라는 오히려 사랑이 더 넘쳐가는 교회입니다. 그 믿음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섬김 받기 원하기보다 섬김의 기쁨을 알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래참고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정도면 100점짜리 교회가 아닐까요?
3. 루아디라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이런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것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죄악에 대해 알려면 두아디라 성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자주색 옷감을 염색하는 일 외에도 주석(구리)으로 로마 군인들의 철모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했고, 면직, 모직,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도 발달하였습니다. 각 업종들은 동종 조합원들로 구성된, 아주 결속력이 강한 조직, Guild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조직들은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려면 누구든 필수적으로 이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데,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 조직들 중 가장 단결력이 강한 조합은 섬유 조합으로, 유대인들이 대부분 이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서 성행하였던 각 조합(Guild)은 트림나스 신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도시를 수호하는 트림나스(Trymnas) 신은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되어 숭배되었습니다. 조합원들은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 조직으로써 곗돈의 일부를 신전에 바쳤고, 곗날이 되면 신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제사 분위기가 고조되면, 마무리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이 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트림나스 신전에 가서 우상 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두아디라 교회 성도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먹고 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 살기가 힘들고….
마치 예전에 한국에서 제사 문제와 주일 성수, 그리고 음주 문제 등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오늘날에도 꽤 많은 분들이 이와 유사한 사회생활에서 갈등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됩니다. “무슨 뾰쪽한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할 수 있는 좋은 비법이 없을까?” 이런 방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주의 종들, 즉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였다고 하였습니다(20절).
우리 장로교회에서 당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해서 물리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분별하여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게 옷을 하얀색으로 길게 늘여 입고 신령하게 보이도록 단장합니다. 표정도 신령하게 하고, 말도 신령하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남쪽으로 가서 땅을 사” “올해는 몸 조심해야겠네”(반면에 성령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등등).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신주단지 모시듯 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라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신통방통하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고, 그래서 또 하나의 교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결국 자기 말만 듣도록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을 추종하게 되면 그 후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지도해 줄 목사의 권면도 듣지 않습니다. 성경도 보지 않습니다. 말씀 붙들고 씨름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착실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얕봅니다.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선지자를 찾아가 기도 부탁합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게 마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그 여자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지각을 연단 받아 스스로 영적으로 분별하고,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그런데 간혹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코치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를 아예 맡겨 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다 판단해 주고, 선택해 주는 거죠. 이런 자들이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들의 먹이감이 됩니다. 추종하다가 나중에는 비윤리적인 일도 서슴치 않게 저지르게 됩니다. 이단들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가리켜서 ‘이세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이름이지요. 시돈 왕이자 제사장의 엣바알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이 되어서 온 나라를 바알 우상천지로 만들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이자 전도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바알 선지자들을 집중 육성하였습니다.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그를 돌로 쳐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까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죽는 순간에도 거울보고 화장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던 자 예후를 유혹하고자 했던 아주 사악한 여인입니다. 결국 그녀는 창문 너머로 내던져져서 온 몸이 터져서 죽었습니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려고 가보니 이미 개들이 산산조각이 난 그 시신을 물어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왜 이 여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24절에 보면 “사단의 깊은 것”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소위 하나님께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 여자가 뭔가 깊고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거기에 솔깃하여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잖습니까? 어디에 가면 깊고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아주 신령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머리를 내밉니다. 결국 귀신에 지펴서 아주 비참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거기에 넘어갑니까? 평소에 착실히 말씀과 기도생활에 착념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허영심이 있어서 단숨에 어떤 영적 수준에 도달하여서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강하거나, 어떤 비법이나 방법을 통해서 단 번에 어떤 신령한 체험을 하려는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100 퍼센트 속아 넘어갑니다. 성경적 진리, 복음의 뿌리가 약한 사람, 회개하는 생활을 잘 하지 않아서 심령이 막히고 기쁨이 없는 사람, 봉사가 부담스럽고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 주로 이런 사람들이 이세벨의 교훈에 넘어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탐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큰 환난에 처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각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먼저 사건을 통해서 경고를 주십니다. 여러번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심령이 완악해서 회개치 않는 자들은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질그릇을 밟아 부스러뜨리듯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숨은 죄를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4.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리고 우리가 힘써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제는 의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확실한 진리, 참된 진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이미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하게 여기며 주님 오실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셔서 나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이요, 영생의 복음인데 뭐가 부족해서 우리가 한 눈 팔겠습니까?
요즘 십자가 없는 축복, 고난과 헌신이 없는 영광을 가르치는 가르침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축복, 영광, 형통함을 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동시에게 고난과 환란, 참회와 회개의 눈물, 경건과 훈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진리이고, 반쪽 진리는 거짓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빌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자신이 정말 능력 있고 살아있게 하는 교훈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교훈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다른 성도들도 그 진리를 붙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삼 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로운 체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14년 동안 아무에게도 자신의 체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하게 평가할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것만을 목 놓아 외쳤습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 주님도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우리가 목숨 걸고 붙들어야 할 참된 진리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8절 ‘새벽 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별’은 ‘메시야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좀 고생하고 땀 흘리며 수고할지라도 복음진리를 수호하고 굳게 붙들 때에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축복을 입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예레미야 시대의 선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8:11) 라며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임박했다, 회개하라, 회개치 아니하면 필경 멸망할 것이라고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이를 전하다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옥에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다가 결국 모두 함께 멸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시대를 가리켜 이렇게 경고합니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지금 이 시대가 바로 바울이 경계한 “그 때”가 아닌지, 우리는 위기의식과 아울러 경각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에 가만히 들어온 현대판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서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교훈, 사단의 교훈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참된 영광과 영원한 승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gxyKrvD2vPc 42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