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라 (08.11.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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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35회 작성일 Aug 12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8월 11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2-17
제목: 회개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세속화’라는 말이 서구사회에서는 주로 탈(脫)기독교화를 뜻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현상을 가리켜 말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 가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의 가르침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물질주의와 외형성장주의, 이기주의와 교권주의로 교회는 깊이 병들어 앓아눕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이나 권력, 쾌락과 재미를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추구해 왔습니다. 입술로는 신앙 고백하지만 행위로 신앙을 부정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만 실상 바알 종교에 빠져 살았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흡사합니다. 이러한 세속화는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이런 현대 교회에,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오셨던 모습 그대로 다시 방문하신다면 그 때와는 달리 우리는 맞이하게 될까요? 그분을 환영하며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게 될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보면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합니다. 스페인은 당시 인근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였지만 무서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추기경이 대심문관이 되어 유대인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는데, <대심문관> 이야기도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종교재판 끝에 화형에 처해진 어느 여름밤이 지나고 이튿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500년 만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심문관이었던 추기경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대심문관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마치 이교도를 대하듯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대심문관이 던진 첫마디입니다. 그의 심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면 예수, 당신 방식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특별히 세 가지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적과 신비와 권위다. 먼저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기적이라는 게 뭔가?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들은 절대로 교회나 당신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삶보다는 내세의 존재를 확신시켜야 한다. 이들이 내세를 믿지 않으면 결코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단을 처형하고 잡아 가두고 하는 것 아닌가!”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친 복음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식으로 하지 않고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죠. 소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도 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유혹했을 그때 왜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나? 그때 떡을 만들어줬으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중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데 왜 거기다 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했는가?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었더라면 혁명도 안 일어나고, 도둑질도 없고, 굶어죽은 자식 앞에서 통곡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기독교는 지금 대단했을 것이다.”
대심문관의 말은 얼핏 휴머니즘으로 들립니다. 빵 때문에 죄를 짓고 빵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는 빵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이야말로 사람들이 믿고 따를만한 참된 기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1,500년 동안 ‘대심문관’으로 상징되는 교회가 빵이라는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해 왔는데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서 그 빵이 사실은 ‘돌’에 불과하며, 참된 빵, 생명의 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니 대심문관은 어쩔 수 없이 예수를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끔찍한 교회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또 500년이 지나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어느날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심문관>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출처:코람데오닷컴 http://www.kscoramdeo.com,김석홍)
오늘 말씀 본문은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영적 분별력으로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며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받았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 중에 믿음을 잘 지킴으로써 책망대신 칭찬만을 받았습니다. 비록 환난과 궁핍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다고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나중에 10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될텐데,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의 고난을 잘 견디어 칭찬을 받은 반면에 오늘 본문 버가모 교회는 세속화로 인해 내부에서 부패해 버린 교회입니다. 성경 진리와 가르침을 벗어나 복음의 핵심을 놓쳤을 때 세상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누룩처럼 퍼졌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교훈과 가르침을 좇다가 주님으로 부터 엄히 책망을 받았습니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 버가모 교회에 대한 칭찬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60-65 miles(9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약 300미터 높이에 위치하여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이름의 뜻은 ‘요새’입니다. 주전 2세기엔 “헬라 문명의 가장 화려한 꽃”이라 불렸고, 계시록 편지가 전해진 무렵까지 250여 년 동안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가 오늘날 미국의 뉴욕과 같다면 버가모는 워싱턴 디씨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방 종교와 풍습이 만연한 도시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제우스 제단을 시작으로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치료의 뱀 신), 데메테르(수확의 신) 등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십 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자랑하는 학문과 문화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가장 먼저 황제 숭배를 시작했던 도시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세르베루스까지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 개나 짓고,’신전지기’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황제 숭배 사상과 우상의 세력이 강했던 버가모를 향해 주님께서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고 하셨는데, 곧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 사단의 본부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우상숭배가 가득한 버가모에서 교회가 얼마나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우리 주님은 아셨습니다. 13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힘든 곳에 산다는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그런 곳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충성됨을 바로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 증명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버가모 교회의 성도 안디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아래 놋쇠 그릇 안에서 천천히 구워지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안디바를 가리켜 주님은 얼마나 믿음직했으면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부르셨습니다. 계시록 1장 5절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디바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핍박, 거센 환란 중에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도 낙심하지 않고 더욱 굳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느니라”고 칭찬했습니다(히 11:38).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까?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핍박, 불이익이나 조롱을 받더라도 충성스럽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서슬퍼렇게 칼을 쥐고 교회를 위협해도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모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시기 때문입니다(12절).
2.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이런 버가모 교회를 무너뜨린 것은 외부로 부터 핍박이 아니라 내부로 부터 부패였습니다. 이솝 우화에서 북풍과 태양이 누가 먼저 나그네 두툼한 겉옷을 벗기느냐로 내기를 했습니다. 먼저 폭풍이 한파와 함께 세찬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오히려 겉옷을 더욱 단단히 조여 매였습니다. 그런데 태양은 추위도 강풍도 없이 그저 따뜻하게 내리쬐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가지 못해 나그네는 스스로 겉옷을 벗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 교회는 거센 세상의 핍박을 이겼습니다. 하지만 따스하게 비취는 세상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주님은 이를 책망하셨습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을 잘 감당했는데 내부로부터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뭐죠? 민수기 22-25장에 보면 바벨론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받습니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속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먼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비법을 슬쩍 알려줍니다. 그것은 미인계 작전이었습니다.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라는 것입니다. 우상 섬기는 제사에 동참하게 하여 음행에 빠지게 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발람의 궤계로 인해 이스라엘 남자들이 우상의 음란한 잔치에 참여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24,000명이 죽습니다. 이처럼 발람의 교훈은 순진한 신자들을 유혹해서 우상도 섬기고, 적당히 쾌락도 즐기도록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발람의 교훈을 따르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이 버가모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로 니골라당입니다. 니골라당의 정체가 무엇인지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을 합리화시키는 거짓 교훈을 퍼뜨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 믿어 구원 받았으니 육체로 죄를 범해도 영혼은 이미 구원 받았기에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육체로 적당히 죄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주의입니다. 소위 율법 무용론자,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없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거룩한 계명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니골라당이 바로 그런 악한 동무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행위로 신앙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재미와 쾌락을 즐기다가 죄에 넘어집니다. 물질의 유혹이 오면 이리 저리 합리화 하면서 받아드립니다. 오늘날 왜 교회에 핍박이 없을까요(물론 지금도 핍박 받고 있는 곳이 많지만)? 사단이 핍박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면으로 치면 오히려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일어나 믿음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방심할 때 슬쩍 걸림돌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미끼를 던져 놓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걸려 넘어집니다. 함정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는 어떤 강대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쳤습니다.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압 여자들이 파놓은 음행의 덫에 빠졌을 때 큰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24,000명이나 염병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판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뭐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다 그러던데 뭐” “딱 이번 한 번 만이야”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성공제일주의, 무한경쟁주의가 판을 칩니다. 돈은 많이 벌어 많을 수록 좋아, 성공하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돼, 수단을 가리지 말고 성공해야 해’라는 사고방식이 무서운 덫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세상의 풍조에 빠져서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축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이요,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주님은 지금 세상 사람들을 향해 책망의 음성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향해 책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교회를 향해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4:4).
3. 회개하라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으로 당장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성도를 가리킨다.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주님이 직접 그들과 전쟁을 치르시겠다는 경고입니다. 감히 누가 심판주이신 분,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을 내시는 분과 싸우고 싶은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과 싸우기 싫으면 세상과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려는 자는 결국 주님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 들을 귀가 있는 자, 아직 조금이라도 생각이 남아있는 자, 아직 조금이라도 양심이 깨어 있는 자라면 새겨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격려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여 이기는 자가 될 때에 주님께서는 크신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천국의 잔치’를 의미합니다. ‘흰 돌’은 ‘승리자에게 주는 상패’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래 참아 이기는 자는 장차 천국에서 어린양의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결론:
성도들은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경각심을 갖고 깨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견디어 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순물에 섞여 있던 우리 신앙은 정결해지고,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그런데 문제 없이 태평한 시절이 지속되면 서서히 성도들의 열심과 열정이 사라집니다. 기도의 눈물이 마르게 됩니다. 사랑의 수고가 사라지고,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소망의 인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은밀히 죄를 즐기게 됩니다. 사단의 팔베게에 누워서 사단의 자장가에 영적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우리와 싸우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각성하여 깨어 일어나십니다. 회개합시다. 다시 헌신하기로 다짐하며 끝까지 충성합시다.
날짜: 2024년 8월 11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2-17
제목: 회개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세속화’라는 말이 서구사회에서는 주로 탈(脫)기독교화를 뜻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현상을 가리켜 말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 가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의 가르침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물질주의와 외형성장주의, 이기주의와 교권주의로 교회는 깊이 병들어 앓아눕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이나 권력, 쾌락과 재미를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추구해 왔습니다. 입술로는 신앙 고백하지만 행위로 신앙을 부정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만 실상 바알 종교에 빠져 살았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흡사합니다. 이러한 세속화는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이런 현대 교회에,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오셨던 모습 그대로 다시 방문하신다면 그 때와는 달리 우리는 맞이하게 될까요? 그분을 환영하며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게 될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보면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합니다. 스페인은 당시 인근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였지만 무서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추기경이 대심문관이 되어 유대인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는데, <대심문관> 이야기도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종교재판 끝에 화형에 처해진 어느 여름밤이 지나고 이튿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1,500년 만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심문관이었던 추기경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대심문관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마치 이교도를 대하듯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대심문관이 던진 첫마디입니다. 그의 심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면 예수, 당신 방식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특별히 세 가지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적과 신비와 권위다. 먼저 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기적이라는 게 뭔가?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들은 절대로 교회나 당신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올바른 삶보다는 내세의 존재를 확신시켜야 한다. 이들이 내세를 믿지 않으면 결코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단을 처형하고 잡아 가두고 하는 것 아닌가!”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친 복음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식으로 하지 않고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죠. 소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도 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유혹했을 그때 왜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나? 그때 떡을 만들어줬으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중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데 왜 거기다 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했는가?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었더라면 혁명도 안 일어나고, 도둑질도 없고, 굶어죽은 자식 앞에서 통곡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기독교는 지금 대단했을 것이다.”
대심문관의 말은 얼핏 휴머니즘으로 들립니다. 빵 때문에 죄를 짓고 빵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는 빵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빵이야말로 사람들이 믿고 따를만한 참된 기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1,500년 동안 ‘대심문관’으로 상징되는 교회가 빵이라는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해 왔는데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서 그 빵이 사실은 ‘돌’에 불과하며, 참된 빵, 생명의 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니 대심문관은 어쩔 수 없이 예수를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끔찍한 교회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또 500년이 지나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어느날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심문관>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출처:코람데오닷컴 http://www.kscoramdeo.com,김석홍)
오늘 말씀 본문은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영적 분별력으로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며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받았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 중에 믿음을 잘 지킴으로써 책망대신 칭찬만을 받았습니다. 비록 환난과 궁핍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다고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나중에 10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될텐데,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의 고난을 잘 견디어 칭찬을 받은 반면에 오늘 본문 버가모 교회는 세속화로 인해 내부에서 부패해 버린 교회입니다. 성경 진리와 가르침을 벗어나 복음의 핵심을 놓쳤을 때 세상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누룩처럼 퍼졌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교훈과 가르침을 좇다가 주님으로 부터 엄히 책망을 받았습니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 버가모 교회에 대한 칭찬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60-65 miles(9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약 300미터 높이에 위치하여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이름의 뜻은 ‘요새’입니다. 주전 2세기엔 “헬라 문명의 가장 화려한 꽃”이라 불렸고, 계시록 편지가 전해진 무렵까지 250여 년 동안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가 오늘날 미국의 뉴욕과 같다면 버가모는 워싱턴 디씨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방 종교와 풍습이 만연한 도시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제우스 제단을 시작으로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치료의 뱀 신), 데메테르(수확의 신) 등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십 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자랑하는 학문과 문화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가장 먼저 황제 숭배를 시작했던 도시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세르베루스까지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 개나 짓고,’신전지기’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황제 숭배 사상과 우상의 세력이 강했던 버가모를 향해 주님께서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고 하셨는데, 곧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 사단의 본부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우상숭배가 가득한 버가모에서 교회가 얼마나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우리 주님은 아셨습니다. 13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힘든 곳에 산다는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그런 곳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충성됨을 바로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 증명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버가모 교회의 성도 안디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아래 놋쇠 그릇 안에서 천천히 구워지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안디바를 가리켜 주님은 얼마나 믿음직했으면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부르셨습니다. 계시록 1장 5절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디바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핍박, 거센 환란 중에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도 낙심하지 않고 더욱 굳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느니라”고 칭찬했습니다(히 11:38).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까?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핍박, 불이익이나 조롱을 받더라도 충성스럽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서슬퍼렇게 칼을 쥐고 교회를 위협해도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모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시기 때문입니다(12절).
2.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이런 버가모 교회를 무너뜨린 것은 외부로 부터 핍박이 아니라 내부로 부터 부패였습니다. 이솝 우화에서 북풍과 태양이 누가 먼저 나그네 두툼한 겉옷을 벗기느냐로 내기를 했습니다. 먼저 폭풍이 한파와 함께 세찬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오히려 겉옷을 더욱 단단히 조여 매였습니다. 그런데 태양은 추위도 강풍도 없이 그저 따뜻하게 내리쬐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가지 못해 나그네는 스스로 겉옷을 벗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 교회는 거센 세상의 핍박을 이겼습니다. 하지만 따스하게 비취는 세상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주님은 이를 책망하셨습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을 잘 감당했는데 내부로부터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뭐죠? 민수기 22-25장에 보면 바벨론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받습니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속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먼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비법을 슬쩍 알려줍니다. 그것은 미인계 작전이었습니다.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라는 것입니다. 우상 섬기는 제사에 동참하게 하여 음행에 빠지게 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발람의 궤계로 인해 이스라엘 남자들이 우상의 음란한 잔치에 참여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24,000명이 죽습니다. 이처럼 발람의 교훈은 순진한 신자들을 유혹해서 우상도 섬기고, 적당히 쾌락도 즐기도록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발람의 교훈을 따르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이 버가모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로 니골라당입니다. 니골라당의 정체가 무엇인지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을 합리화시키는 거짓 교훈을 퍼뜨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 믿어 구원 받았으니 육체로 죄를 범해도 영혼은 이미 구원 받았기에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육체로 적당히 죄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주의입니다. 소위 율법 무용론자,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없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거룩한 계명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니골라당이 바로 그런 악한 동무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행위로 신앙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재미와 쾌락을 즐기다가 죄에 넘어집니다. 물질의 유혹이 오면 이리 저리 합리화 하면서 받아드립니다. 오늘날 왜 교회에 핍박이 없을까요(물론 지금도 핍박 받고 있는 곳이 많지만)? 사단이 핍박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면으로 치면 오히려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일어나 믿음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방심할 때 슬쩍 걸림돌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미끼를 던져 놓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걸려 넘어집니다. 함정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는 어떤 강대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쳤습니다.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압 여자들이 파놓은 음행의 덫에 빠졌을 때 큰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24,000명이나 염병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판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뭐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다 그러던데 뭐” “딱 이번 한 번 만이야”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성공제일주의, 무한경쟁주의가 판을 칩니다. 돈은 많이 벌어 많을 수록 좋아, 성공하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돼, 수단을 가리지 말고 성공해야 해’라는 사고방식이 무서운 덫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세상의 풍조에 빠져서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축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이요,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주님은 지금 세상 사람들을 향해 책망의 음성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향해 책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교회를 향해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4:4).
3. 회개하라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으로 당장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성도를 가리킨다.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주님이 직접 그들과 전쟁을 치르시겠다는 경고입니다. 감히 누가 심판주이신 분,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을 내시는 분과 싸우고 싶은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과 싸우기 싫으면 세상과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려는 자는 결국 주님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 들을 귀가 있는 자, 아직 조금이라도 생각이 남아있는 자, 아직 조금이라도 양심이 깨어 있는 자라면 새겨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격려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여 이기는 자가 될 때에 주님께서는 크신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천국의 잔치’를 의미합니다. ‘흰 돌’은 ‘승리자에게 주는 상패’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래 참아 이기는 자는 장차 천국에서 어린양의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결론:
성도들은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경각심을 갖고 깨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견디어 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순물에 섞여 있던 우리 신앙은 정결해지고,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그런데 문제 없이 태평한 시절이 지속되면 서서히 성도들의 열심과 열정이 사라집니다. 기도의 눈물이 마르게 됩니다. 사랑의 수고가 사라지고,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소망의 인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은밀히 죄를 즐기게 됩니다. 사단의 팔베게에 누워서 사단의 자장가에 영적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우리와 싸우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각성하여 깨어 일어나십니다. 회개합시다. 다시 헌신하기로 다짐하며 끝까지 충성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4JW4j2aio-c 55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