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08.04.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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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93회 작성일 Aug 05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8월 4일
본문: 요한계시록 2: 8-11
제목: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람들은 매년 한 번씩 건강검진하기를 원합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질병을 초기에 발견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발견하면 그만큼 빨리 치료하여 완치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특히 암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요즈음 의학이 많이 발달하여서 암일지라도 초기에 발견하게 되면 고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계시록 2과 3장은 소아시아 7대 교회에 대한 영적 건강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마치 X-ray 나 MRI를 찍듯이 각 교회를 진단하시고 문제점을 말씀해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을 받은 교회가 있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처럼 책망과 칭찬을 동시에 다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곱 교회 중 칭찬만을 받은 서머나 교회와 그 사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에 대해 영적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서머나 교회의 고난
‘서머나’(계 1:11, 2:8) 도시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에게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현재 튀르키에의 3대 도시 중의 하나인 ‘이즈미르’라는 이름으로 계시록의 일곱 도시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도시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이라는 향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몰약’은 고대 이집트로 부터 미용과 방부제로 활용되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서머나는 당시 인구가 30만명 정도 되어 에베소 다음가는 도시였고, 무역을 통해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서머나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기 전부터 로마와 동맹할 정도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었고, 후에는 로마 황제 숭배에도 매우 적극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거절했고, 그로 인해 로마 시민의 자격을 잃었기에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없었고,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궁핍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의 비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9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교회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여겼습니다.
크고 영향력 있는 회당이 있었던 서머나에서도 유대인들은 여러 거짓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가 황제 숭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것을 엄하게 다루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만은 황제 숭배에서 제외시켜 주었습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던 교회는 황제 숭배에서 제외되었는데, 이제 유대인들의 비방으로 인해 더 이상 그러한 특권을 얻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투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9절에 의하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실상은 ‘사단의 회’에 속해 있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환난이 잠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십 일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교회와 세상 권력
교회사를 보면 세상은 항상 기회를 있으면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마귀의 어두운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까닭은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지난날 교회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교회는 끔찍한 시련과 박해의 시기들을 무수히 헤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온을 유지하던 교회에 어느 날 풍랑이 거칠게 일기 시작합니다. 박해는 갑작스레 찾아오고,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소멸됩니다. 교회는 다시 평온하고 조용한 시기를 맞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격렬한 박해가 소용돌이처럼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지고 잠시 고요한 시기가 뒤따릅니다. 이것이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받는 것일까요? 만일 교회가 정부에 대항하여 정치적 군사적 세력을 만들어 위협한다면 그들이 교회를 적대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순수한 영적 기관으로서 세상의 권력과 권세에 대항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준수하는 평화로운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권력에 위협을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국가의 절대 권력을 쥐고 통치하는 자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권력자보다 더 높은 권세를 바라보며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심기를 거스리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쪽 유대왕국을 무너뜨린 바벨론제국 느브갓네살은 광대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바벨론식 신사참배를 제정해서 일사분란한 국가 통합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높이가 27미터, 너비는 2.7미터의 순금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 금 신상 앞에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단 3:6)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넣으리라 하매”이렇게 위협하는 느브갓네살 앞에 유다 포로출신 세 청년들이 체포되어 끌려왔습니다. 번쩍이는 금 신상을 배경으로, 다른 한쪽에는 이글거리며 무섭게 타오르는 불가마 풀무를 가리키며 위협하는 절대 권력자 앞에서 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끌려 나온 순간부터 정신 줄을 놓아버릴 법도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유로 왕의 명령을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공개적으로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언을 하자 느부갓네살이 (단 3:19) “분이 가득하여...낯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에 던지라고 명했습니다. 얼마나 왕의 명령이 추상같고 불길이 뜨거웠던지 세 청년을 붙든 병사들이 타죽었습니다.
이 정도로 세상 권력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자신의 권세에게만 충성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주 기분 나쁜 것이고, 그래서 왕에 대한 저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훗날 교회가 로마 제국을 비롯해서 세상 권력자들에게 핍박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교회의 삶과 가르침은 세상의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높이 존중 받고, 가치 있게 평가 받는 것들을 성경은 오히려 단죄합니다. 그리고 세상 삶의 스타일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가 복이 있다…형제를 보고 라가(바보, 천치)라 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을 행한 것과 마찬가지고, 음욕을 품은 것은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저히 받아드릴 수도 없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고,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롬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되고,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오. 세상은 그분에게 얼마나 적대감과 증오심을 가지고 박해하였습니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도 그분을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권력싸움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세상 임금인 사단이 자신의 권세와 자신의 영역을 놓고서 예수님께 필사적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과 힘을 동원하여 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나타나는 모든 적대감의 배후에는 이렇게 사단과 그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한복음 1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왜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느냐? 그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6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속했고, 그래서 세상 처세술로 살아간다면 핍박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진리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면 그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둠에 속하여 참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핍박과 환란을 통과하는 교회는 마치 금을 불로 단련하여 정금이 되는 것처럼 더욱 순결해지고, 새로워지고, 내적으로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머나 교회도 악한 세력의 핍박이 심해질 수록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려서 책망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와 달리 주님으로 부터 한 마디의 책망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인정 받으며 격려를 받았습니다.
3.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
이런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1) 8절 하반 절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은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창조주요 심판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핍박을 받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어떠한 핍박과 환난도 능히 참고,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완전히 죄로 죽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순교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 그리고 부활소망을 주십니다.
2) 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핍박을 참고 견딘 것을 아시는 주께서 마지막 날 심판 때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담대한 믿음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들이 환난 당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의 궁핍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생계에 위협을 받는 궁핍함 속에 있었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현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제자들은 가난했고, 별 볼일 없는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성령의 권능이 부어지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말에 권세가 있었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담대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평안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요가 아닌, 영적인 부요에서만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다고 해서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를 당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두려해야 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만용이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비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밖에 두려워할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한마디로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역량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왜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주님이 함께 하셔서 보호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이사야서 10장 10절에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도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고 했습니다.
4) 이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많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위로하고 토닥거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에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투쟁하느라고 힘들었는데 좀 위로해 주시지, 왜 “죽도록 충성하라”고 까지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8절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십니까?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충성하시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러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만큼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그랬을 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으시고 그것으로 다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빌 2:9-11). 죽도록 충성하신 예수님께 최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도 이처럼 가장 영광스러운 최고의 승리자가 되도록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누구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까? 끝까지 충성하는 자입니다. 환란과 핍박에서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죽도록 충성하면 정말 죽고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해 보십시오. 죽지 않습니다. (눅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읽는 자는 살리리라” 오히려 심령이 강해지고, 내면이 청결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에 충만해서 무서운 것이 없어집니다. 담대해집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영광이 주어질지라도 결코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은 나찌의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36년 나찌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 집시, 반체제인사들, 전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용소에는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도 있었습니다. 반체제인사들이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비좁은 독방의 창문에는 나무 가리개가 덮여 있어 수감자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감방 창문 바로 옆에는 고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동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똑같은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지금 독방에는 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 중에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초상화도 걸려 있습니다. 그는 독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나찌가 등장하면서 애국주의의 광풍이 독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는 히틀러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를 일찌감치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는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바르멘에서 열린 회의에서 칼 바르트와 더불어 바르멘 신학 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을 이끌어낸 장본인입니다. 그 선언문은 6개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속뜻은 히틀러를 맹종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언문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임이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입니다. 그들은 히틀러에 동조하는 독일 국가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었습니다.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고백교회의 산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고백교회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추방, 투옥, 살해 위협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신앙을 올곧게 지키며 살려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바르멘-부퍼탈(Barmen-Wuppertal)에는 고백교회운동을 기념하는 조그마한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앞에는 히틀러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열렬히 인사하는 군중들이 보이고 뒷면에는 등을 돌린 채 성경을 펼쳐 읽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새겨진 조각입니다. 그 아래에 ‘주의 말씀은 영원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이 독일의 양심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가 나찌 친위대의 감방에 유폐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기념관이 된 독방에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 누구나 한 찬송곡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닌 충성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가 가능한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날짜: 2024년 8월 4일
본문: 요한계시록 2: 8-11
제목: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람들은 매년 한 번씩 건강검진하기를 원합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질병을 초기에 발견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발견하면 그만큼 빨리 치료하여 완치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특히 암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요즈음 의학이 많이 발달하여서 암일지라도 초기에 발견하게 되면 고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계시록 2과 3장은 소아시아 7대 교회에 대한 영적 건강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마치 X-ray 나 MRI를 찍듯이 각 교회를 진단하시고 문제점을 말씀해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을 받은 교회가 있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처럼 책망과 칭찬을 동시에 다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곱 교회 중 칭찬만을 받은 서머나 교회와 그 사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에 대해 영적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서머나 교회의 고난
‘서머나’(계 1:11, 2:8) 도시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에게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현재 튀르키에의 3대 도시 중의 하나인 ‘이즈미르’라는 이름으로 계시록의 일곱 도시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도시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이라는 향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몰약’은 고대 이집트로 부터 미용과 방부제로 활용되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서머나는 당시 인구가 30만명 정도 되어 에베소 다음가는 도시였고, 무역을 통해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서머나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기 전부터 로마와 동맹할 정도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었고, 후에는 로마 황제 숭배에도 매우 적극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거절했고, 그로 인해 로마 시민의 자격을 잃었기에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없었고,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궁핍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의 비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9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교회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여겼습니다.
크고 영향력 있는 회당이 있었던 서머나에서도 유대인들은 여러 거짓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가 황제 숭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것을 엄하게 다루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만은 황제 숭배에서 제외시켜 주었습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던 교회는 황제 숭배에서 제외되었는데, 이제 유대인들의 비방으로 인해 더 이상 그러한 특권을 얻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투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9절에 의하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실상은 ‘사단의 회’에 속해 있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환난이 잠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십 일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교회와 세상 권력
교회사를 보면 세상은 항상 기회를 있으면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마귀의 어두운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까닭은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지난날 교회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교회는 끔찍한 시련과 박해의 시기들을 무수히 헤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온을 유지하던 교회에 어느 날 풍랑이 거칠게 일기 시작합니다. 박해는 갑작스레 찾아오고,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소멸됩니다. 교회는 다시 평온하고 조용한 시기를 맞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격렬한 박해가 소용돌이처럼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지고 잠시 고요한 시기가 뒤따릅니다. 이것이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받는 것일까요? 만일 교회가 정부에 대항하여 정치적 군사적 세력을 만들어 위협한다면 그들이 교회를 적대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순수한 영적 기관으로서 세상의 권력과 권세에 대항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준수하는 평화로운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권력에 위협을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국가의 절대 권력을 쥐고 통치하는 자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권력자보다 더 높은 권세를 바라보며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심기를 거스리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쪽 유대왕국을 무너뜨린 바벨론제국 느브갓네살은 광대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바벨론식 신사참배를 제정해서 일사분란한 국가 통합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높이가 27미터, 너비는 2.7미터의 순금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 금 신상 앞에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단 3:6)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넣으리라 하매”이렇게 위협하는 느브갓네살 앞에 유다 포로출신 세 청년들이 체포되어 끌려왔습니다. 번쩍이는 금 신상을 배경으로, 다른 한쪽에는 이글거리며 무섭게 타오르는 불가마 풀무를 가리키며 위협하는 절대 권력자 앞에서 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끌려 나온 순간부터 정신 줄을 놓아버릴 법도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유로 왕의 명령을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공개적으로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언을 하자 느부갓네살이 (단 3:19) “분이 가득하여...낯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에 던지라고 명했습니다. 얼마나 왕의 명령이 추상같고 불길이 뜨거웠던지 세 청년을 붙든 병사들이 타죽었습니다.
이 정도로 세상 권력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자신의 권세에게만 충성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주 기분 나쁜 것이고, 그래서 왕에 대한 저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훗날 교회가 로마 제국을 비롯해서 세상 권력자들에게 핍박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교회의 삶과 가르침은 세상의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높이 존중 받고, 가치 있게 평가 받는 것들을 성경은 오히려 단죄합니다. 그리고 세상 삶의 스타일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가 복이 있다…형제를 보고 라가(바보, 천치)라 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을 행한 것과 마찬가지고, 음욕을 품은 것은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저히 받아드릴 수도 없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고,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롬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되고,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오. 세상은 그분에게 얼마나 적대감과 증오심을 가지고 박해하였습니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도 그분을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권력싸움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세상 임금인 사단이 자신의 권세와 자신의 영역을 놓고서 예수님께 필사적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과 힘을 동원하여 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나타나는 모든 적대감의 배후에는 이렇게 사단과 그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한복음 1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왜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느냐? 그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6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속했고, 그래서 세상 처세술로 살아간다면 핍박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진리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면 그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둠에 속하여 참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핍박과 환란을 통과하는 교회는 마치 금을 불로 단련하여 정금이 되는 것처럼 더욱 순결해지고, 새로워지고, 내적으로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머나 교회도 악한 세력의 핍박이 심해질 수록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려서 책망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와 달리 주님으로 부터 한 마디의 책망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인정 받으며 격려를 받았습니다.
3.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
이런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1) 8절 하반 절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은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창조주요 심판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핍박을 받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어떠한 핍박과 환난도 능히 참고,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완전히 죄로 죽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순교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 그리고 부활소망을 주십니다.
2) 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핍박을 참고 견딘 것을 아시는 주께서 마지막 날 심판 때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담대한 믿음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들이 환난 당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의 궁핍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생계에 위협을 받는 궁핍함 속에 있었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현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제자들은 가난했고, 별 볼일 없는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성령의 권능이 부어지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말에 권세가 있었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담대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평안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요가 아닌, 영적인 부요에서만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다고 해서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를 당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두려해야 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만용이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비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밖에 두려워할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한마디로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역량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왜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주님이 함께 하셔서 보호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이사야서 10장 10절에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도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고 했습니다.
4) 이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많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위로하고 토닥거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에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투쟁하느라고 힘들었는데 좀 위로해 주시지, 왜 “죽도록 충성하라”고 까지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8절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십니까?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충성하시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러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만큼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그랬을 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으시고 그것으로 다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빌 2:9-11). 죽도록 충성하신 예수님께 최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도 이처럼 가장 영광스러운 최고의 승리자가 되도록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누구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까? 끝까지 충성하는 자입니다. 환란과 핍박에서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죽도록 충성하면 정말 죽고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해 보십시오. 죽지 않습니다. (눅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읽는 자는 살리리라” 오히려 심령이 강해지고, 내면이 청결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에 충만해서 무서운 것이 없어집니다. 담대해집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영광이 주어질지라도 결코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은 나찌의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36년 나찌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 집시, 반체제인사들, 전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용소에는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도 있었습니다. 반체제인사들이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비좁은 독방의 창문에는 나무 가리개가 덮여 있어 수감자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감방 창문 바로 옆에는 고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동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똑같은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지금 독방에는 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 중에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초상화도 걸려 있습니다. 그는 독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나찌가 등장하면서 애국주의의 광풍이 독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는 히틀러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를 일찌감치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는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바르멘에서 열린 회의에서 칼 바르트와 더불어 바르멘 신학 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을 이끌어낸 장본인입니다. 그 선언문은 6개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속뜻은 히틀러를 맹종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언문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임이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입니다. 그들은 히틀러에 동조하는 독일 국가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었습니다.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고백교회의 산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고백교회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추방, 투옥, 살해 위협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신앙을 올곧게 지키며 살려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바르멘-부퍼탈(Barmen-Wuppertal)에는 고백교회운동을 기념하는 조그마한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앞에는 히틀러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열렬히 인사하는 군중들이 보이고 뒷면에는 등을 돌린 채 성경을 펼쳐 읽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새겨진 조각입니다. 그 아래에 ‘주의 말씀은 영원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이 독일의 양심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가 나찌 친위대의 감방에 유폐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기념관이 된 독방에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 누구나 한 찬송곡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닌 충성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가 가능한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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