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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02.05.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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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60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2월 5일
*제목: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강해 야곱의 귀향편 3)
*본문: 창세기 32: 22-32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창세기 32:22-32

서론: 최근 인터넷에서 한국의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 명품을 가장 많이 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비싼 외제차가 가장 잘 팔리는 나라이기도 한데 어떤 사람들은 외제차를 새차로 살 형편은 도저히 안되니까 중고차를 산답니다. 그런데 그만 고장이 나서 정비소에 맡기니 수리비가 산 가격보다 더 비싸서 포기한다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기 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답니다.   
특히 MZ 세대라 부르는 젊은 세대는 내일을 준비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기 위해 삽니다. 맛집이나 유명한 카페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긴 줄 뒤에 섭니다. 내가 여기 왔다는 사진 한 장 찍기 위해서 입니다. 진짜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세상의 허탄한 것과 허영에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세상에서 얻은 재물과 사회적 지위가 마치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성취한 것으로 우쭐거리며 자랑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홀로 있을 때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이 떠나지 않아요.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져요. 나이가 들면서 이런 불안감과 초조함이 더 심해지고, 우울증, 신경증, 불면증, 손톱 물어뜯기, 줄담배 피우기, 술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인 아이’라고 합니다. 겉모습은 어른인데 내면세계는 어린아이 그대로 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딱 멈춰 있습니다. 더 이상 변화가 없고, 성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좋은 부분만 자기의 진실한 모습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은 어쩌다 실수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쪽이 진짜 모습이겠습니까? 밖에서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 진짜입니까? 가정에서 불화하고, 직장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진짜입니까? 어쩌면 감추고 싶은 추한 부분이야말로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진정으로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진정한 사랑과 은혜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은 사랑에 굶주려 있고, 은혜에 메말라 있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겉모습으로 자신의 참모습인 양 포장한다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여전히 피가 흐르고,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불안감과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밖에서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아도, 어쩌면 가정에서 성마르고, 까다롭고, 화를 잘내는 것이 진짜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교회에서 존경 받는 신앙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메마르고 까칠하며 변덕스러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며, 성령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 우리 자신 내부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안에 변화와 성숙이 시작됩니다.

1.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야곱도 자신의 참 모습에 정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살아왔던 사람이예요.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어요. 그러고도 자신의 잘못을 잊고서 하란 땅에서 재산을 모으는 일에 온갖 수고를 다 했어요. 그러다가 20년의 세월이 지나 고향 길을 향하고 있는데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그것은 까맣게 잊었던 형 에서와의 불화한 관계였습니다. 고향 땅이 가까워 올 수록 형 에서가 점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왔어요.

야곱은 에서에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또 엄청난 화해의 선물을 보냈어요. 고민 끝에 그날 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어요. 그리고 가족들과 소유한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야곱만 홀로 얍복 나루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고독한 시간을 맞이합니다. 지혜를 다 짜내서 현재 다가온 위기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심한 고독과 공포가 그를 엄습해 옵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낸 후 홀로 남았을 때 야곱은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출세나 성공의 거품을 걷어낸 후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어떤 사람은 병들어 병상에서 자기 홀로 누워 있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배신을 당하고, 실패하고 버림을 당하고서야 이 자리에 서게 됩니다. 홀로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홀로 서는 자리로 몰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합니다. 자기 조카 롯을 떠나 보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도 떠나 보냅니다. 그리고 홀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모세를 바로 궁궐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미디안 광야로 가게 하십니다. 애굽의 모든 부귀와 영화에서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홀로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남편 탓, 아내 탓, 부모와 자식 탓, 환경 탓을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문제가 결정적입니다. 하나님과 묶인 매듭이 풀리면 다른 어떤 것도 문제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가정 문제, 직장과 사업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등으로 곤경에 빠졌어도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은혜 받으면 더 이상 문제가 문제 아닙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하지 않습니다. 너끈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으면부스럭거리는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두려움과 공포로 떨고 있던 야곱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이상한 경험에 대해서 30절에서는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어요.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호 12:3-4)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즉 밤에 야곱을 찾아온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깊은 밤에 천사를 통해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의 생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야곱이 굴복하지 않아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 완전히 굴복시키시는 하나님

야곱은 지금까지 인간과 겨루어 항상 이겨 왔어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고, 남을 넘어뜨리고 살아 왔어요. 야곱과 씨름하면 누구든 다 넘어지고 말았어요. 형을 넘어뜨려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고, 외삼촌도 따돌리고 지산을 빼았어요. 그런데 지금 씨름 대상은 다릅니다.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세요. 그런데도 야곱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야곱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밤새 붙들고 씨름하는 야곱처럼 우리도 복을 받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기를 꺽지 않으면 안될 그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타락한 이후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태생적으로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웃이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렸다해도 내 손가락 아픈 것이 더 신경 쓰이는 법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 점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아요. 심지어 성령충만 받아도 이를 통해 자기가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지만 실상 내 욕망과 야심을 성취하는데 하나님을 이용하려 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세요.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자기 살자고 주를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척, 고상한 척 할 수 있지만 생명이 위협 받는 일이 터졌을 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죽여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본질입니다. 유대인들은 살인자 바라바 대신에 무죄하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이토록 우리에게는 자기중심적 성향이 얼마나 질긴지 모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사건이나 상황을 자기 통제 아래 두려고 합니다. 내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해요. 이게 얼마나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지 몰라요. 자기 자신도 힘들게 하는 거예요. 결국 십자가에 우리의 정과 육을 못박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환도뼈를 치는 것처럼 자아가 깨지는 아픔이 있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되지 않은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위대한 믿음의 족장으로 세울 수가 없었어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복을 줄 수 없었어요. 사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용서하여 달라고, 변화시켜 달라고 매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 그를 무력화시켰어요. 야곱은 무능자가 됩니다. 이제 자기 힘으로 겨룰 수 없어서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게 됩니다. 26절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 한 분밖에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삽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못삽니다” 매달리며 복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능력, 경험, 처세술, 건강을 의지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꿈과 야망, 그리고 자기 주장과 고집을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드린 후에 찾아오는 달콤함을 아십니까? 기쁨과 평강이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축복을 아십니까?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이 찾아옵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요”

3. 새 이름으로 변화되는 축복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축복해 달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십니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그 사람이 가진 속성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는 말은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너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살아왔느냐?’하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어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묻는 순간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나는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붙잡다’입니다. 태어날 때 쌍둥이 형인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속이는 자’, ‘사기꾼’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저는 사기꾼입니다. 나는 세상만을 붙잡고 산 자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며 살았습니다. 주변인물들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자신이 주인이자 왕이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야곱입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29절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라”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네 인생의 주인은 네 자신이었어. 야곱이라는 이름 아래 네가 주인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네 인생은 속고 속이며 허망하고 복잡했던 것이야. 이제 삶의 주인을 네 자신에게서 나로 바꾸어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야곱은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주인 된 인생을 청산하고, 이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를 살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십자가와 함께 옛 자아가 죽을 때 새로운 삶으로 부활됩니다. 우리가 죽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이미 나도 죽었습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그동안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분이 주인 되시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제멋대로 사는 신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자입니다. 야곱은 육신에 속한 신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신령한 신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힘으로 쟁취하고, 하나님은 자기 일을 도와주시는 분 쯤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사람으로 부터 복을 빼앗는 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는 자입니다. 야곱은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이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면한 자입니다.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새벽 동이 틀 때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의 얼굴에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새마음, 새사람, 위대한 믿음의 족장의 출발입니다.

결론: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이자 기독교 변증가이었던 C.S 루이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지성으로 똘똘 뭉쳐서 끝까지 버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는 그 날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항복했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마도 그날 밤, 영국 전역에서 가장 침울하고 마지못해 하는 회심자였을 것이다.” 그가 “영국 전역에서 가장 침울하고 마지못해 하는 회심자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항복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 안에는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회심이 이루어질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진리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어느 길이 진리의 길인지도 압니다. 그런데 그가 드린 기도는 “ 주여, 내게 순결을 주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였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쾌락을 탐하는 자신을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께 항복하기 쉽지 않은 존재인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 고집과 아집, 자기 방법과 자랑을 붙들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는 까닭은 얼마나 우리가 쓸데없이 고집이 센 존재들인지를 의미합니다.

어느 양파 농장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던 도둑이 잡혔습니다. 주인은 도둑에게 세 가지 벌 중에 한 가지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양파를 100개 먹든지, 매를 100대 맞든지, 돈을 1,000불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돈 1,000불 내기에는 너무 아깝고, 100대 매를 맞는 고통 또한 참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도둑은 양파 100개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한 20개 쯤 먹었는데 도무지 매워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를 100대 맞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대 30대를 넘어가면서 맞아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돈 1,000불을 내고 풀려 났습니다. 괜히 양파 먹고 매를 맞은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여전히 혈기가 살아 있고, 육이 죽어본 경험이 없다면 온전한 신자로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생살이에도 많은 질곡이 생깁니다. 그래서 야곱이 애굽왕 바로 앞에서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고 회고하지 않습니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그를 하나님이 마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로 몰아가셔서 홀로 서게 하시고, 싸움을 거십니다. 자녀다운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하신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도대체 너는 누구냐?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이름의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지난날 어떤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힘과 노력을 더 의지했습니까? 자신의 경험과 지혜와 기술을 믿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교회 직분자, 권사, 집사라는 타이틀 뒤에 자기의 참모습을 감추는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한 것으로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올바르게 아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외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볼 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때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가 술술 풀려지듯이 우리의 헝클어진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비로소 술술 풀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내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내 아픔을 해결해 주시고,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십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회피하지 말고,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하나님 제가 야곱입니다. 이스라엘로 고쳐주옵소서. 변화되기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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