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07.28.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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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09회 작성일 Jul 29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7월 28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7
제목: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 부터 우리는 주님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지금의 튀르기예(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 말 사도 요한이 생존하던 시대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역사적인 교회들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주님이 일곱 교회에게만 편지를 보낸 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이 일곱 교회가 가진 대표성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가 그 시대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그 후에 존재한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지금 시대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도 종파와 교단과 인종과 민족이 다른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이 모든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0년 전 일곱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이지만 오늘 이 시대의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항구 도시로 최대의 상업 및 교통 중심지이었고,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라는 대단한 건축물이 있을 만큼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에베소에 구약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라는 학자가 말씀을 가르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아볼로를 도와 이곳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도 바울이 다른 어느 장소보다도 집중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목회한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 3개월 동안 회당에서 가르치다가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두란노 서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거기서 2년 동안 가르침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일한 후에 식사하며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 9시 30분까지 다시 일했습니다. 지금도 오전 11시 부터 오후 4시 까지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시에스타(Siesta)라고 하는데,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 및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같은 열대 지방 국가에서 낮잠 시간, 또는 낮잠을 갖는 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휴식 시간에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던 같습니다. 매일 하루에 5시간씩 6일을, 2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그 당시 크고 작은 아데미 여신상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우상숭배가 성한 에베소 도시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만큼 복음 전파가 강력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훗날 사도 요한도 밧모섬으로 유배 당하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상당기간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는 아주 뛰어난 주의 종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여러모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가장 중심적 구실을 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주님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에베소 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상징하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역자들을 상징하고,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주님이 등장하는 까닭은 에베소 교회의 상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래 되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전통과 조직과 규율이라는 명목 아래 목사나 직분자들이 이끌고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성령과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았는데 어느덧 인간의 의견과 논리가 앞서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럴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몸이 머리의 통치를 받듯이, 교회는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1.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에베소 교회는 여러 가지 칭찬할 만한 장점들이 있었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먼저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탁월한 종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이므로 그들은 복음의 잣대와 거울이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자를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이단을 절대로 용납지 않는 결단력이 있었고, 아무 가르침이나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심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인내와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말씀을 가르치며 순회하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여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렇게 수고의 흔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에베소서 5:5절과 6절을 보면, “너희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등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6장 11절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며 아주 전투적인 교회가 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진리 수호를 위해서는 아주 철저하게 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에베소 교회는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세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 수록 더욱 빈번하게 더욱 크게 전쟁과 난리,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될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신 줄을 놓게 되고, 영적으로 혼미한 나머지 거짓 메시아, 거짓 교사들의 꾐과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기적과 기사를 보여 주면서 믿는 자들까지 현혹할 것입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천재지변과 전쟁의 소식, 다원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범람하는 중에 거짓 교사들이 많이 일어나 거짓된 가르침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 유튜브, 이단 발흥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깨어 있어서 영적으로 잘 분별하여 진리를 수호하고, 복음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는 큰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4절과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이 보실 때에 에베소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뭐든지 처음은 좋은 것입니다. 처음 소풍갈 때, 처음 비행기를 탈 때에 얼마나 설레입니까? 처음 사랑은 어떻습니까? 왠지 가슴이 설레이고, 늘 보고 싶고, 늘 가까이 하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렇습니다. 처음 사랑은 어설프기는 하지만 순수한 것입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꾸밈이 없고 진솔한 것입니다.
박목월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자신의 첫 사랑에 대한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골목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온 하늘에 꽃잎에 날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의 충만한 세계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습니까? 시편에”(시 114:4)“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산천이 춤을 추는 것으로 묘사한 것을 두고, 단순히 시인의 시적 표현이라 속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분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분이라면 그것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처음 에베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는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도 낫고 귀신도 떠나고, 마술하던 자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마술 책을 스스로 불태우고 결단할 정도로 열심히 대단했습니다(행 19장).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니까 다른 것들이 하찮게 보였습니다.
뜨겁게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모여 성경책을 읽으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눈물로 간증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선교헌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도 뜨거웠습니다. 정말 서로를 위해 주고,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며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할 때에 어떠했습니까?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다 크게 울며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배에까지 가서 작별인사를 했다고 했습니다(행20:36,37). 사도행전 19과 20장에 유난히 눈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성도들 간에 진실한 사랑이 흘러넘쳤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처음 사랑이 식어갔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전통도 잘 지켜지고, 교리도 잘 수호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이런 저런 행사를 열심히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영적 감각이 있기에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딱 느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건물이 크고, 조직도 체계적으로 잘 움직이는데 왠지 분위기가 썰렁하거나 차겁습니다. 어떤 교회는 건물은 작고 허름한데 분위기가 훈훈합니다. 은혜가 충만합니다. 사랑이 넘치고 성도들 간에 된장국 하나를 놓고도 서로 권하며 섬기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어느덧 분위기가 차가워졌습니다. 성도들 간에 무관심하고, 썰렁한 그런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단들을 영적으로 분별하여 단죄하고 싸우는 전투 스피릿은 충만한데, 더 이상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사랑의 섬김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출발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죄와 어두움 가운데 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로 헌신을 다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만 봐도 눈에 이슬이 맺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지며 사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미리 와서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예배가 늘 감격스러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야 말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습니까? 비록 가난하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 삶은 충만한 사랑으로 인해 생동감으로 활력이 넘쳤습니다. 기쁨과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이제 평안하고, 먹을 것이 많고, 입고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 오래 계속 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서서히 세상의 편안함과 재미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도, 실상 그 사랑이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실 때 이를 몇 번이나 경고하십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잊어버린다는 말은 무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신론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그들이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우상 바알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놓고 음행한 여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복이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마치 영적 간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필경은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너무나 평안하고, 너무나 잘 살고, 너무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롯을 보십시오.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삼손을 보십시오. 솔로몬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데마와 후메내오와 알랙산더와 니골라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지만 세상에 마음을 주다가 다 멸망으로 끌려가버렸습니다. 스스로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하기를 소원하지만 그럴 수록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전업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찾아와 세 차례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두려움에 세 차례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오시사 세 차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사랑은 식고 형식적인 모양만 남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간절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마음, 차갑고 냉소적인 자세가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는 무덤덤한 마음, 형식적인 마음, 교만한 마음,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회개하고 갈아엎어야 합니다. 다시 새롭게 말씀에 대한 소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언제 어디서 부터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렸는지,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메타노이아’,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다시 복음의 감격을 되찾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행위로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겨 버린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를‘생명과 복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지난 50년 동안 소아시아의 대표 교회로서 주변 교회들의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우러러 보고 닮고 싶어 하는 중심 교회였습니다. 본인들 스스로도 그런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영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더 이상 그런 축복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3. 에베소 교회에 대한 약속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면서도 그들이 낙심하지 않고 다시 열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7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가 냉담하게 식은 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키고, 처음 행위를 가지면 새롭게 에덴의 기쁨과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은 우리 신앙생활의 에너지입니다. 사랑에서 주님을 위한 열정이 나옵니다. 사랑으로 인해 헌신합니다. 봉사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고 견딥니다. 사랑으로 이웃을 섬깁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말라버린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어 버
릴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마치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형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회복되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이처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오. 만약 첫 사랑을 잊고서 마음이 냉담한 상태라면 돌이켜 처음 열정과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그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긴급히 해야 할 일이고, 놓쳐서는 안 된 가장 중요한 일인 줄 믿습니다.
날짜: 2024년 7월 28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7
제목: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 부터 우리는 주님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지금의 튀르기예(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 말 사도 요한이 생존하던 시대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역사적인 교회들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주님이 일곱 교회에게만 편지를 보낸 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이 일곱 교회가 가진 대표성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가 그 시대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그 후에 존재한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지금 시대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도 종파와 교단과 인종과 민족이 다른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이 모든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0년 전 일곱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이지만 오늘 이 시대의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항구 도시로 최대의 상업 및 교통 중심지이었고,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라는 대단한 건축물이 있을 만큼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에베소에 구약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라는 학자가 말씀을 가르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아볼로를 도와 이곳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도 바울이 다른 어느 장소보다도 집중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목회한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 3개월 동안 회당에서 가르치다가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두란노 서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거기서 2년 동안 가르침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일한 후에 식사하며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 9시 30분까지 다시 일했습니다. 지금도 오전 11시 부터 오후 4시 까지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시에스타(Siesta)라고 하는데,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 및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같은 열대 지방 국가에서 낮잠 시간, 또는 낮잠을 갖는 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휴식 시간에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던 같습니다. 매일 하루에 5시간씩 6일을, 2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그 당시 크고 작은 아데미 여신상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우상숭배가 성한 에베소 도시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만큼 복음 전파가 강력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훗날 사도 요한도 밧모섬으로 유배 당하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상당기간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는 아주 뛰어난 주의 종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여러모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가장 중심적 구실을 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주님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에베소 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상징하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역자들을 상징하고,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주님이 등장하는 까닭은 에베소 교회의 상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래 되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전통과 조직과 규율이라는 명목 아래 목사나 직분자들이 이끌고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성령과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았는데 어느덧 인간의 의견과 논리가 앞서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럴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몸이 머리의 통치를 받듯이, 교회는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1.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에베소 교회는 여러 가지 칭찬할 만한 장점들이 있었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먼저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탁월한 종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이므로 그들은 복음의 잣대와 거울이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자를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이단을 절대로 용납지 않는 결단력이 있었고, 아무 가르침이나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심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인내와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말씀을 가르치며 순회하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여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렇게 수고의 흔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에베소서 5:5절과 6절을 보면, “너희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등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6장 11절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며 아주 전투적인 교회가 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진리 수호를 위해서는 아주 철저하게 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에베소 교회는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세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 수록 더욱 빈번하게 더욱 크게 전쟁과 난리,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될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신 줄을 놓게 되고, 영적으로 혼미한 나머지 거짓 메시아, 거짓 교사들의 꾐과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기적과 기사를 보여 주면서 믿는 자들까지 현혹할 것입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천재지변과 전쟁의 소식, 다원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범람하는 중에 거짓 교사들이 많이 일어나 거짓된 가르침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 유튜브, 이단 발흥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깨어 있어서 영적으로 잘 분별하여 진리를 수호하고, 복음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는 큰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4절과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이 보실 때에 에베소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뭐든지 처음은 좋은 것입니다. 처음 소풍갈 때, 처음 비행기를 탈 때에 얼마나 설레입니까? 처음 사랑은 어떻습니까? 왠지 가슴이 설레이고, 늘 보고 싶고, 늘 가까이 하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렇습니다. 처음 사랑은 어설프기는 하지만 순수한 것입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꾸밈이 없고 진솔한 것입니다.
박목월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자신의 첫 사랑에 대한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골목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온 하늘에 꽃잎에 날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의 충만한 세계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습니까? 시편에”(시 114:4)“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산천이 춤을 추는 것으로 묘사한 것을 두고, 단순히 시인의 시적 표현이라 속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분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분이라면 그것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처음 에베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는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도 낫고 귀신도 떠나고, 마술하던 자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마술 책을 스스로 불태우고 결단할 정도로 열심히 대단했습니다(행 19장).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니까 다른 것들이 하찮게 보였습니다.
뜨겁게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모여 성경책을 읽으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눈물로 간증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선교헌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도 뜨거웠습니다. 정말 서로를 위해 주고,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며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할 때에 어떠했습니까?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다 크게 울며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배에까지 가서 작별인사를 했다고 했습니다(행20:36,37). 사도행전 19과 20장에 유난히 눈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성도들 간에 진실한 사랑이 흘러넘쳤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처음 사랑이 식어갔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전통도 잘 지켜지고, 교리도 잘 수호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이런 저런 행사를 열심히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영적 감각이 있기에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딱 느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건물이 크고, 조직도 체계적으로 잘 움직이는데 왠지 분위기가 썰렁하거나 차겁습니다. 어떤 교회는 건물은 작고 허름한데 분위기가 훈훈합니다. 은혜가 충만합니다. 사랑이 넘치고 성도들 간에 된장국 하나를 놓고도 서로 권하며 섬기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어느덧 분위기가 차가워졌습니다. 성도들 간에 무관심하고, 썰렁한 그런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단들을 영적으로 분별하여 단죄하고 싸우는 전투 스피릿은 충만한데, 더 이상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사랑의 섬김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출발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죄와 어두움 가운데 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로 헌신을 다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만 봐도 눈에 이슬이 맺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지며 사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미리 와서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예배가 늘 감격스러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야 말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습니까? 비록 가난하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 삶은 충만한 사랑으로 인해 생동감으로 활력이 넘쳤습니다. 기쁨과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이제 평안하고, 먹을 것이 많고, 입고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 오래 계속 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서서히 세상의 편안함과 재미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도, 실상 그 사랑이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실 때 이를 몇 번이나 경고하십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잊어버린다는 말은 무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신론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그들이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우상 바알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놓고 음행한 여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복이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마치 영적 간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필경은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너무나 평안하고, 너무나 잘 살고, 너무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롯을 보십시오.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삼손을 보십시오. 솔로몬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데마와 후메내오와 알랙산더와 니골라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지만 세상에 마음을 주다가 다 멸망으로 끌려가버렸습니다. 스스로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하기를 소원하지만 그럴 수록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전업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찾아와 세 차례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두려움에 세 차례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오시사 세 차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사랑은 식고 형식적인 모양만 남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간절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마음, 차갑고 냉소적인 자세가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는 무덤덤한 마음, 형식적인 마음, 교만한 마음,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회개하고 갈아엎어야 합니다. 다시 새롭게 말씀에 대한 소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언제 어디서 부터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렸는지,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메타노이아’,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은 다시 복음의 감격을 되찾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행위로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겨 버린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를‘생명과 복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지난 50년 동안 소아시아의 대표 교회로서 주변 교회들의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우러러 보고 닮고 싶어 하는 중심 교회였습니다. 본인들 스스로도 그런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영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더 이상 그런 축복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3. 에베소 교회에 대한 약속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면서도 그들이 낙심하지 않고 다시 열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7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가 냉담하게 식은 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키고, 처음 행위를 가지면 새롭게 에덴의 기쁨과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은 우리 신앙생활의 에너지입니다. 사랑에서 주님을 위한 열정이 나옵니다. 사랑으로 인해 헌신합니다. 봉사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고 견딥니다. 사랑으로 이웃을 섬깁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말라버린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어 버
릴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마치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형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회복되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이처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오. 만약 첫 사랑을 잊고서 마음이 냉담한 상태라면 돌이켜 처음 열정과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그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긴급히 해야 할 일이고, 놓쳐서는 안 된 가장 중요한 일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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